3. 서울 시내에서 일어난 유아 단두 사건
오늘 이야기는 연쇄살인마는 아니지만 사람들의 무지와 미신에 대한 신봉이 얼마나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확인할 수 있는 사건이다.
15일 오전 8시경에 시내 죽첨정 185번지 공터에는 나이 3살가량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의 목을 잘라서 버린 참혹한 사건이 있었다. 아지 못할 사람이 해주는 전화로 이 일을 안 소관 서대문서에서는 서장 이하 간부 전부가 현장에 달려갔으며 급보를 접한 검사국에서는 요다 검사가 서기 2명을 대동하고 현장에 급행하였으며, 도경찰부 형사과로부터는 노무라 과장과 후타미 수사계 주임이 역시 현장에 달려와 현장의 조사에 착수하였다.
<조선일보> 1933년 5월 17일자
머리가 잘린 어린아이의 사체가 서울 시내 한복판(지금의 충정로)에서 발견되자 경성의 조선총독부는 비상이 걸렸다. 당시 조선총독부는 식민지의 치안유지가 명분이었기 때문이다.
몸통은 어디있는지 찾을 수가 없고, 발견된 머리는 2치 반(약 4.5cm)이 깨져 있었고, 두개골 안쪽으로는 뇌수를 파낸 흔적도 보였다. 이 두개골은 치마폭, 종이, 수건 등 3겹으로 감싸져 있었다. 이 끔찍한 두개골은 경성제대 법의학과로 옮겨져 부검을 실시한 결과 만 1세 가량의 남아를 10시간 전에 살해한 것으로 밝혀졌다.
당연히 아이를 가진 부모들은 경악했으며, 나병환자나 걸인, 막노동꾼 등은 자신들에게 불똥이 튈까 전전긍긍했다. 하지만 사건에 진전은 없었다. 머리만 발견되었기에 지문을 확인할 수도 없었고, DNA 감정 같은건 당시에 없었기 떄문이다. 단지 머리를 감싼 치마폭이 고급제품이므로 가난한 집 아이는 아닐 것, 뇌수를 파낸 흔적으로 보아 매독이나 간질, 나병 등을 앓는 사람이 치료의 목적으로 살해했을 것, 종이에 묻은 흙과 사건 현장의 흙이 다른 것으로 보아 아이는 다른 곳에서 살해되어 이동되었을 것, 목과 뒷통수 칼날 자국을 보아 범인이 칼을 쓰는데 능숙한 사람일 것이란 정도를 밝혀내었다.
서대문 경찰서 기무라 서장이 인터뷰를 했다.
“아직 범인을 체포하지 못했습니다. 사건이 오리무중으로 들어간다고 꾸지람을 해도 하는 수 없습니다. 그러나 과학적 수사방법은 있습니다. 하여튼 보십시오. 최선을 다해 노력하고 있으니 머지않아 좋은 결과를 볼 겁니다. 언제쯤 잡히겠느냐고요? 그것은 아직 확언을 못하겠습니다.”
<동아일보> 1933년 5월18일자
하지만 도무지 실마리는 보이지 않았고 부모가 범행에 관련되었을 것이란 소문이 나면서 친자가 아닌 양자를 피해대상으로 삼았을지도 모른다며 양자를 키우는 집의 부모들이 수사 대상에 오르기도 했다. 물론 아무런 성과는 없었다.
하다못해 몸통 시신이라도 찾기 위해 아이의 무덤이나 의심 가는 곳을 모두 파내기까지 했으나 역시 성과는 없었고 수많은 암매장 시신들만을 발견했다. 경기도 경찰부의 노무라 형사 과장은 일선 경찰들을 압박하며 수사방침을 하달한다.
1. 집 잃은 젖먹이 아이 호구조사
2. 양육을 맡아 기르는 아이 발육상태
3. 사생아 기아를 기르는 집의 양육 상황
4. 간질병, 문둥병, 정신병자의 행방
5. 토막민과 걸인의 철저조사
이로 인해 서대문경찰서에는 문둥병자 4명, 걸인 39명 기타를 합하여 50여명을 검거했고, 종로경찰서는 60여명, 동대문경찰서는 90여명을 검거했다. 그러다 사건 발생 17일째가 되던 날, 드디어 용의자를 검거하는 데 성공한다. 용의자는 무당 가족 5명과 그들의 하수인 일명 '뻐꾸기'였다.
사건 발생 당시 흘러있던 핏자국의 냄새를 쫓던 경찰견이 무당집으로 뛰어들어가 걸레를 물고 나왔고, 경찰들은 그들을 체포하여 연일 심문을 이어갔다. 하지만 무당 가족들은 극구 부인했고, 경찰들은 그들의 집에서 나온 물증을 들이밀었다.
그것은 어른들만 사는 집에서 어린애 누비저고리 두 벌, 어린애 치마 한 벌, 어린애 버선 두 켤레가 나왔다. 그리고 피 묻은 무당의 치마 한 벌과, 쇠간인지 말간인지 사람간인지 육안으로는 식별이 불가능한 정체불명의 동물 간이 들어있는 약탕 등이었다. 하지만 무당 가족은 어린애 옷가지는 어린애를 위하여 굿할 때에 쓰는 것이고, 치마에 묻은 피는 생리 때 묻은 것이고, 간은 병문안 온 사람이 등창병에 좋다며 가져온 소간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주점에서 일하던 '뻐꾸기'는 일주일 만에 범행을 자백한다.
유력한 혐의자로 시내 죽첨정에서 대금업을 하다 죽은 박준화의 아들과 그의 전 가족 5명은 서대문서에 검거되어 엄밀한 취조를 받고 있다. 그들은, 박준화가 살아있을 때 등창이라는 매독성의 악질로 오랫동안 고생하다가 여러 가지 약을 써도 도무지 듣지 않으므로, 세상이 전하는 미신에 의하여 그 근처 주점에서 고용살이를 하는 뻐꾸기를 시켜 아이를 사다가 살해케 하여 뇌와 몸을 삶아서 먹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한다. 그러나 그들은 범행 일체를 부인하고 있다.
<동아일보> 1933년 6월2일자
'뻐꾸기'는 금화산 일대에 시체를 묻었다고도 진술했으나 시체는 나오지 않았다. 사실 '뻐꾸기'는 알콜중독자로 정신에 이상이 있는 사람이었다. 또한, 무당 남편은 5월 12일 오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하여 이튿날 사망했는데, 아이 머리가 발견된 것은 5월 16일 오전 7시 30분이었고, 부검 결과 사망 시간은 빨라야 15일 밤 9시 30분이었다. 즉, 아이를 죽여 골을 빼먹었다는 무당 남편이 아이보다 먼저 죽은 것이다. 결국, 경찰은 무리한 심문으로 인해 엉뚱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만들 뻔한 것이다.
사건 발생 20일째, 경찰들은 살아있는 아이가 아닌 죽은 아이의 머리를 잘랐을 수도 있다는 생각에 사건 발생 5일전까지 죽은 아이의 시체를 모두 발굴한다. 그리고 마침내 염리동 공동묘지에서 머리없는 아이의 시체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부검 결과 머리와 몸통이 동일한 아이로 밝혀졌다. 바로 아현리에 사는 한창우의 딸 한기옥이었다. 경찰은 바로 출동하여 그 집에 살던 10여 가족, 30며 명을 모두 체포한다.
그리고 마침내 범인을 밝히는 데 성공한다. 범인은 아이 아버지인 한창우의 집 건넛방에 사는 배구석이었다. 배구석과 한창우는 충북 음성에서 농사를 짓다가 4년 전 상경하여 아현리 빈민가에 집을 얻어 방 한 칸씩 쓰고 있었다. 그는 석탄상점에서 일하는 가난하지만 선량한 노동자였다. 그러나 배구석의 지인인 엿장수 윤명구가 5월 11일 한창우의 딸 한기옥이 죽자, 간질병을 앓고 있는 아들에게 뇌수를 먹이기 위해 배구석에게 뇌수를 꺼내달라는 부탁을 받는다. 배구석은 죽은 아이 사체로 산 아이 병을 낫게 해달라는 윤명구의 간곡한 부탁을 거절하지 못했다.
윤명구는 5월 15일 밤 한기옥의 무덤을 파헤쳐 머리를 베고 뇌수를 꺼내 한창우에게 주고 그 대가로 2원을 받았다. 배구석이 검거되면서 서울 한복판에서 내뒹군 아이 머리를 둘러싼 대소동은 23일 만에 종결되었다. 그 후, 배구석과 윤명구는 분묘 발굴 및 사체훼손죄로 재판에 회부되어 배구석은 징역 4년, 윤명구는 징역 3년을 선고받았다.
이 사건은 당시 조선에 얼마나 미신과 무지가 팽배했는지를 드러낸다. 그리고 잃어버린 시체의 몸통을 찾는 도중 수많은 암매장 시신들을 발견하여 조선총독부가 내세운 치안 유지는 전혀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도 알 수 있다. 무지와 미신은 이처럼 무서운 결과를 낳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