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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문학콘텐츠연구소 Aug 05. 2022

우리 역사 속의 범죄자들.4.우범곤

4.최악의 대량 살인마, 순경 우범곤

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인물들을 굳이 카테고리를 나누어야 할 필요가 있을까 싶기도 하지만, 범죄심리학적 측면에서는 이들을 분류해야 하는 경우가 많다.


대표적인 경우가 연쇄살인인가? 연속살인인가? 를 손꼽을 수 있다.


보통 연쇄살인의 경우에는 '서로 다른 장소에서 살인과 살인 사이에 일정한 휴지기를 두고 일어나는 3회 이상의 사건'을 이야기한다. 그리고 연속살인은 '짧은 시간동안 여러 장소에서 두 명 이상의 피해자를 발생시키는 살인 사건'을 의미하는데, 이중에서도 '6명 이상을 살해, 4명 이상을 살해하고 죽은 사람을 포함해 10명 이상의 피해자 발생, 2명 이상을 살해하고 죽은 사람을 포함해 12명 이상의 피해자 발생, 최소 2명 이상의 살해 등'의 조건을 갖출 경우에는 '대량살인'으로 분류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경우 어떤 인물을 찾아볼 수 있을까? 바로 오늘 이야기할 '우범곤'이 바로 대표적인 인물이 되겠다. 2021년 11월에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를 통해 소개되기도 했지만 다시 정리해 보도록 하자.


우범곤 - 출처: 위키백과


1955년 부산에서 태어난 우범곤은 해병대에 복무 중에는 특등사수로 뽑힐 정도로 총을 잘 다루었다고 한다. 이후 1981년부터 청와대 경호실에서 근무했지만 1년도 안되어 퇴출되는데 술버릇이 워낙 좋지 않아 사고를 일으켰기 때문이라고 전해지는데 당시 별명이 '미친 호랑이'였다고 한다.


결국 1981년 12월 의령군 궁류지서의 순경으로 좌천되어 근무를 시작한 우범곤은 이내 이웃집에 살던 전모씨와 연애를 하며 전씨의 집에서 동거를 시작한다. 하지만 이미 좌천과 전씨 부모의 반대 등으로 우범곤의 예민함은 극에 달한 상태라 걸핏하면 전씨에게 폭력을 행사했다고 한다.


1981년 4월 26. 그날도 비슷했다. 저녁 근무를 위해 낮잠을 자던 우범곤의 가슴에 파리 한 마리가 앉은 것을 본 전씨가 무심결에 파리를 내리쳤는데 이것을 계기로 전씨에게 화를 내며 집을 나간 우범곤이 저녁 7시 40분경 술에 취해 들어와 전씨를 폭행한 것이다. 전씨의 친언니가 이를 말리자 친언니까지 폭행을 하는데 동네 사람들이 시끄러운 소리에 찾아갔다가 그 상황을 보고 뜯어말리며 전씨를 두둔하자 우범곤은 다시 집을 뛰쳐 나간다.


그는 그 길로 지서에 마련된 예비군 무기창고를 찾아가 카빈 소총 2정과 실탄 180발, 수류탄 7발 등을 탈취한 뒤, 그 앞을 지나던 대구 사람(26세 남자)를 총으로 쏘고, 궁류면 재래시장으로 가서 마을 주민 3명을 살해한다. - 밤 9시 40분경


그리고 마을의 통신 시설을 차단하기 위해 궁류우체국에서 교환원 2명과 집배원 1명을 살해하는데, 이때 교환원 중 1명이 숨지기 전에 마을 이장집과 의령우체국간의 통신 코드를 연결하여 최초의 신고(밤 10시 34분)가 이루어진다. - 밤 9시 45분 경


이후엔 압곡리 매실부락에서 10분 간 총기를 난사했고 이때 6명을 살해하는데 여기에 동거녀 전씨과 그 가족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 밤 10시경


그리고 운계리 시장으로 달려간 그는 주민 7명을 사살하는데, 이때 사람들에게 수류탄을 던지기도 했다. - 밤 10시 10분경


이후 평촌리의 한 상갓집에 찾아간 그는 비상이 걸려 무장을 하고 있다고 말한 뒤 부의금 3천원(약 4만원 가량)을 내고나서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셨는데 다시 난폭한 주사를 부리자 상주의 이종사촌이 이를 꾸짖었고, 그러자 격분한 우범곤이 총기를 난사해서 12명을 사살한다. 그 뒤엔 불이 켜진 집을 찾아다니며 총을 난사하여 총 23명을 살해하였다. - 밤 10시 50분경


평촌리 마을로 이동한 우범곤은 한 민가에 들어가 일가족 5명을 모두 깨운 뒤 자신이 지니고 있던 수류탄 2발을 모두 터뜨려 우범곤 본인을 포함한 4명이 즉사하였다. - 새벽 5시 30분경


동아일보


우범곤은 악질적이게도 어린 아이는 물론 갓낫아기마저 잔인하게 살해했는데, 특히 상갓집에서 사람들을 살해하고 피투성이의 현장을 벗어나다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들리자 "아직 안 죽은게 있어?"라며 돌아가서 아이를 살해하였다. 


이 사건에서 가장 형편 없었던 것은 바로 경찰의 대응이었다. 궁류지서장이었던 허창순과 일행은 마을 유지에게 온천에서 접대를 받고 돌아오던(10시 50분경) 중 주민을 만나 상황 설명을 듣지만 무시했으며, 궁류지서에서 상황을 파악한 일행은 무기를 챙긴 뒤 우범곤이 이동한 반대 방향으로 향한뒤 숨어 있었다.


이장의 신고로 의령경찰서에서 출동한 경무과장과 보안과장 그리고 전투 경찰 30여 명도 자정 무렵에 도착은 했으나 캄캄한 시골길에서 피습 당할 것이 두려워 마을 초입 다리에 숨어 대기만 하였다. 관할 책임자였던 의령경찰서장 역시 새벽 1시 20분경 다리에 도착했으나 상황을 파악한 뒤에는 궁류지서로 도망친 뒤 그곳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무엇보다 궁류지성장과 일행, 혹은 늦게라도 의령경찰서 인원들이 지서 맞은편 면사무소에 있던 스피커로 경보를 발령하고 마을 주민들에게 상황을 전달하기만 했어도 희생자를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들은 모두 경찰의 본분을 망각하고 보신에만 신경을 썼다.


그리고 새벽 4시가 넘어 마산과 진주시의 기동대 병력이 도착하자 마을 진입을 시도했지만 이때 우범곤은 이미 마지막 희생자 가족의 집에서 자폭을 준비하던 때였다. 결국, 수많은 병력들은 출동만했을 뿐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꼬꼬무> 제작진이 방송 준비를 하면서 경찰청에 사망자에 대한 질의를 했는데 경찰청 공식 답변은 56명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는 '사건 이후 부상의 정도가 심각하여 사망한 사람의 수는 집계하지 못하였다.'라고 추가 답신을 보내왔다고 한다. 당일 사망자 수만 세고 그 뒤의 사망자 수는 집계하지 않은 즉 조사를 하지 않은 것이다. 이후 부상 악화로 6명이 더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니 결국 우범곤에 의해 사망한 분은 모두 62명, 부상자는 33명으로 파악할 수 있다.


청와대 경호실에서도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문제가 있던 인물을 일선 경찰서롤 발령한 것, 예비군 탄약고의 무기를 일개인이 혼자 탈취가 가능했던 것, 비상상황임에도 경찰들이 진압은 커녕 주민 대피마저 포기하고 몸을 사린 점 등 수많은 문제들이 결국 사상 최악의 비극을 만들어 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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