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정당한지 정당하지 않은지와는 별개로 우리는 가끔 범죄자들의 의견 혹은 주장에 공감하는 경우가 있다. 물론 사람을 재미삼아 죽이는 사이코패스 연쇄살인마는 우리와 의식의 구조 자체가 다르기 때문에 논외로 쳐야겠지만, 사실 일반적인 범죄자들은 결국 우리와 비슷하게 살아가는 주변인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 이야기할 지강헌 역시 범죄자라는 점을 제외하곤 우리와 비슷한 삶을 살아가던 주변인이었다.
지강헌은 1954년 전남 광주에서 5남매의 막내로 태어났다. 대부분의 범죄자들이 그러하듯 지강헌 역시 부모의 무관심 속에서 겨우 초등학교만 졸업하고 세상에 나오게 된다. 그리고 할 줄 아는 것이 주먹질과 도둑질 뿐이던 그는 벌써 11차례나 감옥에 드나들었고, 다시 상습절도혐의로 체포되어 17년(징역 7년, 보호감호 10년)을 선고받는다.
대한민국이 1988년 서울 올림픽으로 뜨거웠던 여름을 보내고 10월 8일, 영등포 교도소의 죄수 25명을 태우고 대전과 공주의 교도소로 이송 중이던 버스 안에서 12명이 탈출을 시도한다. 그들은 버스가 안성의 중부고속도로 톨게이트 근처에 도착했을 때 숨기고 있던 칼과 드라이버 등으로 교도관을 위협, 폭행하고 버스를 탈취하는 데에 성공한다. 그리고 버스를 다시 서울로 되돌려 서초동의 공무원 교육원까지 몰고와 그곳에서 우면산과 개포동, 말죽거리(양재동) 등으로 흩어지게 된다.
25명 중 탈주에 가담하지 않은 13명은 다시 영등포 교도소에 재수감 되었지만 달아난 이들 중에는 교도관의 총 한 자루와 실탄 35발을 챙긴 지강헌이 포함되어 있었다.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
12명 중 대부분이 쉽게 검거된 데에 비해 지강헌(35세)과 그를 따라갔던 안광술(22세), 강영일(21세), 한의철(20세) 그리고 홀로 행동했던 김길호는 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지강헌 일당은 일주일 뒤인 10월 15일 포위망을 좁혀오던 경찰들을 피해 서대문구 북가좌동 고씨의 집에 들어가 숨는다.
그러나 고씨가 새벽 4시 경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 탈출에 성공해 150m 거리의 파출소에 신고했고, 바로 1천여 명의 경찰 병력이 고씨의 집 주변을 둘러싸는 데, 이때가 새벽 4시 40분 경이었다.
낮 12시까지 경찰들과 대치를 벌이던 이들은 강영일이 경찰들과의 협상을 위해 밖으로 나간 사이 한의철과 안광술이 지강헌이 지니고 있던 총을 빼앗아 자살한다. 덕분에 강영일은 체포 되었고, 혼자 남아있던 지강헌은 경찰에게 <비지스>의 '홀리데이' 테이프를 요구하여 그 노래를 들으며 창문을 깨고 유리 조각으로 자신의 목을 찔러 자살을 기도한다. 깜짝 놀란 인질들이 비명을 지르나 경찰들은 인질들이 위험해 빠진 것으로 생각하여 지강헌에게 총을 쏘며 진입하였고 이 과정에서 지상헌은 다리와 옆구리에 총을 맞아 사망한다.
인질극 과정에서 바로 유명한 "유전무죄, 무전유죄"란 말이 등장하는데, 우선 당시 이른바 잡범이던 이들은 사회보호법 때문에 징역을 살고도 최대 10년의 보호감호소 생활을 해야했다. 지강헌 역시 징역은 7년이지만 보호감호소에서 10년을 더 수감되어야 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사회보호범이 1989년 개정되지만 어쨌든 당시에 500만원을 훔친 자신은 17년을 갇혀 있어야 하는 반면 70억을 횡령한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은 징역 7년 형을 받았지만 2년 만에 가석방으로 풀려나는 일이 있었다.
전경환 - 연합뉴스
하지만 여기서 주목할 것은 지강헌은 단순 절도가 아닌 상습절도였기에 그의 억울함에 대한 이해도가 낮아진다는 점이다. 하지만 당시 국민 대다수는 지강헌의 자기합리화 적인 주장보다는 전경환이 쉽게 법망을 빠져 나온 것에 대한 분노에서 지강헌의 "유전무죄, 무전유죄"에 열광했다.
게다가 인질극을 벌이던 이 네 사람은 고씨 가족에게 전혀 해를 입히지 않았다. 그저 경찰을 피해 숨어들었다가 고씨가 탈출하여 경찰들이 집을 포위하자 어쩔 수 없이 인질극으로 이어졌다고 보는 것이 맞다. 이 과정에서 이들은 고씨 가족에게 "미안하다. 조금만 참아달라."는 말을 수 차례 했고, 인진들의 목에 흉기를 들이대고 경찰과 방송국 기자들에게 고함을 치는 와중에도 인질의 귀에는 "절대 다치게 하지 않겠다. 걱정마시라."고 말했다고 한다.
사진 출처 : 서울신문
또한 강영일이 경찰과 협상을 하면서 경찰이 준비한 승합차를 확인하고 다시 들어오려고 할 때, 혼자 남은 지강헌은 그의 발쪽으로 위협 사격을 하며 "너는 내가 살린다. 들어오지 마라."라고 해서 강영일은 체포되어 목숨을 건진다.
어쨌든 의도치 않은 인질극이 온 나라에 방영되면서 앞서 이야기 한 사회보호법이 최대 7년으로 수정되었다가 2005년 폐지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24시간 일하고 24시간 쉬는 2교대의 교도관 근무 마저 24시간 일하고 다음 날 쉬고, 그 다음날은 주간에만 일하는 형태로 변경되었다.
그리고 지강헌 일당과 함께하지 않은 채 홀로 도망다니던 김길호가 1년 9개월만인 1990년 7월에 검거되면서 영등포 교도소 호송버스 탈주 사건은 끝을 맺는다.
우리가 범죄자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일 필요는 없다.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다보면 그들의 희생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최소한 엉망인 시대에 대해 침묵하거나 오히려 동조했던 사람들에 비해 범죄자의 목소리가 더 와닿는 경우도 있다. 바로 지강헌 사건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