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마침내 검거된 살인의 추억, 이춘재
범죄자 이야기를 하면서 온갖 사이코패스와 연쇄 살인범을 소개했다. 하지만 오늘 이야기할 이춘재보다 더 큰 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킨 인물도 없을 듯하다.
1963년 1월 화성에서 태어난 이춘재는 1986년부터 1991년까지 화성시 태안과 정남, 팔탄, 동탄 일대에서 9명을 강간 살해했으며, 검거 이후 5건의 살인을 추가로 자백하였다. 하지만 이미 모든 사건의 공소시효는 모두 만료가 되어 기소조차 할 수 없었고, 처제 강간살인으로 무기징역형을 살고 있던 이춘재에게 할 수 있는 사법처리는 감형없는 무기징역을 연장하는 정도였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방영된 이춘재의 군시절 모습
그렇다면 이춘재는 어떤 사건들을 저질렀을까?
1986년 9월 15일: 경기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서 71세의 할머니를 (강간 추정)살해 후 논밭에 방치 - 1차 사건
10월 20일: 경기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에서 25세 여성을 강간 살해 후 농수로에 은닉 - 2차 사건
12월 12일: 경기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서 귀가 중이던 24세 여성을 집앞에서 강간 살해 후 축대에 은닉- 3차 사건(이춘재 DNA 검출)
12월 14일: 경기 화성시 정남면 관항리, 버스에서 내려 귀가 중이던 21세 여성을 강간 살해 농수로에 은닉 - 4차 사건(이춘재 DNA 검출)
1987년 1월 10일: 경기 화성시 태안읍 황계리에서 18세 여성을 강간 살해 후 논에 방치- 5차 사건(이춘재 DNA 검출)
5월 2일: 경기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에서 28세 여성을 강간 살해 후 야산에 은닉- 6차 사건(이춘재 DNA 검출)
12월 24일: 경기 수원시 화서동에서 18세 여성을 강간 후 살해
1988년 9월 7일: 경기 화성시 팔탄면 가재3리에서 52세 여성을 강간 살해 후 논수로에 은닉 - 7차 사건
9월 16일: 경기 화성시 태안읍 진안리 주택 자신의 방에서 자던 13세 여학생 강간 후 살해 (윤모씨가 범인으로 지목되어 20년 간 억울한 옥살이) - 8차 사건
1989년 7월 7일: 경기 화성시 태안읍 병점5리 7세 여아 실종 - 이춘재의 자백으로 강간 후 살해 된 것으로 밝혀짐
9월 26일: 수원시 권선구의 주택에 흉기를 소지하고 침입했다가 검거 - 집행유예로 석방
1990년 11월 15일: 경기 화성시 태안읍 병점5리에서 귀가 중이던 13세 여학생 강간 살해 후 야산에 은닉 - 9차 사건(이춘재 DNA 검출)
1991년 1월 26일: 충북 청주시 복대동에서 귀가 중이던 15세 여고생 강간 살해 후 공사현장에 은닉
3월 7일: 충북 청주시 남주동 가정집에서 29세의 가정주부 강간 후 살해
4월 3일: 경기 화성시 동탄면 반송리 야산에서 67세 여성을 강간 후 살해 - 10차 사건
1994년 1월 13일: 충북 청주시 복대동에서 자신의 처제20세)에게 수면제를 먹여 강간 후 살해한 뒤 시신을 공장에 은닉
이처럼 이춘재는 유치원생부터 할머니까지 가리지 않고 강간하고 살해한 미치광이 변태성욕 살인마였다. 게다가 그는 살인을 저지르기 전에도 약 7차례 이상 연쇄 강간을 벌인 인간이었다. 또한, 그는 피해자들의 얼굴에 속옷을 뒤집어 씌우거나 음부에 이물질을 집어넣는 등의 만행은 물론 피해자의 가슴을 흉기로 8~9 가량 마구 찌르는 미친 짓을 저지르기도 했다. 한마디로 인간 이하의 짐승이었던 것이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
7차 사건이후 배포된 몽타주와 재소자 신분 카드의 사진을 비교해 보면 상당히 흡사함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이춘재 사건에서 경찰들은 그를 잡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하기도 했으나 엉뚱한 일들을 벌여 이춘재가 도망칠 기회를 만들어주기도 했다.
우선 경찰들도 <살인의 추억>에 등장하는 장면처럼 점쟁이를 찾아가 보기도 하고, 터가 않좋다는 말에 경찰서 건물을 이전하기도 했으며, '자수하지 않으면 너는 사지가 찢어져 죽는다'는 팻말이 붙은 허수아비를 세워 놓는 등 눈물겨운 노력을 벌였다.
하지만, 용의자를 B형이라고 밝혔던 경찰은 이춘재가 O형이라는 사실이 드러나자 자신들도 이유를 모르겠다, 혈액형에 대한 타이핑이 잘못되었다는 말로 넘겨버리고 만다.
그리고 1988년 1월 16세인 명모군이 범인으로 몰려 고문 구타를 당하다 뇌사로 사망했으며, 1989년 7월에는 앞서 이야기한 22살의 윤모씨가 검거되어 고문 등으로 허위자백을 하여 20년 동안이나 억울하게 수감되었다. 1990년 11월에는 38살의 차모씨가 수차례 연행되어 조사를 받다가 정신분열을 일으켜 자살했으며, 1990년 12월에도 18살 김모군이 경찰들의 폭행 및 가혹행위로 정신분열 증세를 일으켰다. 1991년 4월에는 33세의 장모씨가 폭행 및 가혹행위를 견디다 못해 자살했고, 1993년 7월에도 41살의 김모씨가 물고문 등의 가혹행위 끝에 자살하게 된다.
뿐만아니라 1989년 7월에 실종되었던 7세 어린이의 유골 일부를 발견했음에도 경찰이 그것을 숨기기까지 하여 큰 논란이 일기도 하였다.
물론 이춘재의 검거에는 끝까지 사건을 포기 하지 않고 증거들을 간징하던 훌륭한 경찰들의 집념 덕분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일부 경찰들은 말그대로 헛다리를 짚고, 엉뚱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기 위해 온갖 폭행과 고문을 불사했으며,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 피해자의 유골을 감추기까지 하였다. 게다가 불법 주택 침입으로 검거된 이춘재를 법원은 집행유예로 풀어주기도 했다.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큰 화젯거리였던 이춘재 연쇄살인 사건은 이춘재라는 사이코패스 변태성욕자의 욕망으로 시작되었고, 경찰들의 허술하고 끼워맞추기식 수사로 더 커졌던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