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 위에서 만난 타임머신

- 오래된 기억과 지금 이 순간 사이를 오가는 시간여행

그 여름의 꽈리고추찜

아침에 꽈리고추찜을 했다.

어릴 적 어머니가 여름이면 자주 해주시던 그 반찬은, 종종 마음 한켠을 두드리는 그리움의 맛이다.

어린 날의 나에게 '고추는 맵다'는 편견을 넘어서게 했던 음식.

밀가루 옷을 입혀 찐 꽈리고추에 다양한 재료가 들어간 양념장을 끼얹어 먹던 그 맛은, 꽈리고추 특유의 살짝 매운맛을 조심스레 감추고, 양념의 감칠맛으로 입맛을 돋워주곤 했다.

그 반찬을 떠올리면 여름날 아침, 거실문을 활짝 열어둔 채 시원한 바람과 함께하던 밥상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그곳에 앉아있던 가족들, 나눴던 말들, 종알거리던 소리까지.

그 시간들이 마치 우주 어딘가에 생생히 기록되어 있을 것만 같다.


입과 맛으로 기억하는 이야기들

며칠 전 지인들과의 모임에서 이런 질문을 던졌다.

"어릴 때 먹었던 음식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건 뭐예요?"

누군가는 황태찜을, 또 다른 이는 간장 계란밥을, 또 누군가는 김치찌개를 말했다.

그 이야기들 속엔 단순히 음식의 맛뿐 아니라, 그 음식을 먹던 시간과 공간, 그리고 그 곁에 있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들이 오롯이 담겨 있었다.

음식은 때때로 추억을 같이 데려온다.

맛이라는 감각은 단순히 혀끝에 머무르지 않고, 기억의 오래된 서랍까지 열어준다.


한 그릇의 기억, 장닭 이야기

돌나물로 담근 물김치, 부추 넣은 오이소박이는 철을 따라 올라왔다.

어릴 적 우리 집에선 닭을 키운 적이 있었다. 그중에 어린 내겐 타조처럼 보였던 '장닭'도 있었다.

어느 복날, 그날은 친척들이 놀러 온 날이었고, 식탁엔 삼계탕이 올라왔다.

무심코 먹던 중, 그 삼계탕이 우리집 장닭이라는 사실을 알아채고 까무러치게 울었던 기억.

그날 이후 한동안 나는 닭고기를 먹을 수 없었다.

그 경험은 내게, 음식이라는 것이 단순히 '재료'로 구성됨을 넘어서서, 둘러싼 자연환경의 일부였던 존재, 또는 어떤 생명에서 시작된다는 사실을 마음 깊이 각인시켰다.


그것은 누군가의 손길을 거쳐 우리 식탁에 도착한다.

결국 우리가 마주한 밥상 위엔 재료, 손길, 시간, 기억이 겹겹이 쌓여 있는 것이다.


조리법의 변화, 전승에서 유튜브까지

요즘은 조리법을 유튜브나 블로그에서 찾는 것이 익숙해졌다.

예전엔 어머니나 시어머니에게 직접 물어 조리법을 배워야 했던 시절이 있었고,

그건 단순한 요리법 전달 이상의 '따뜻한 전승'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양한 레시피가 널리 공유되고,

심지어 '흑백요리사'같은 프로그램을 통해 요리의 철학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시대가 되었다.

이제는 친정어머니와 전혀 다른 방식으로 된장찌개를 끓여보기도 하고,

유튜브를 보고 태국식 쌀국수나 멕시코 타코를 만들어 보는 일도 자연스럽다.


식탁 위의 세계, 그리고 시간

음식은 더 이상 허기를 채우는 도구만은 아니다.

누군가의 손끝에서 전해진 따뜻한 기억이기도 하고,

새로운 문화와 도전 앞에서의 설렘이기도 하다.

어떤 음식은 추억을 담고 있고,

어떤 음식은 나를 새롭게 만든다.

나는 이 두 가지가 공존하는 시대에 살고 있음에 감사한다.


지금도 부엌에서 조심스레 간을 보며,

과거의 한 장면과 미래의 가능성 사이를 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음식이 소환한 시간들을 타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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