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초, 그리고 I see you

- 본질에 관하여, 어느 여름밭에서 문득

어머니가 계신 시골에 다녀왔습니다.
풀 매는 일을 도와드리며, 오랜만에 흙냄새를 맡고 손끝에 흙을 느껴보았습니다.

이른 아침에 풀을 뽑고, 해질녁에는 메마른 밭에 물을 주며,

몸도, 마음도 천천히 가라앉히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역시 여름은 ‘풀과의 전쟁’ 시절입니다.

밭이건 마당이건, 풀들은 쉬지 않고 자랍니다.
그 푸름이 반갑기도 하지만, 농사에서는 이야기가 조금 다릅니다.
작물에게 가야 할 영양분을 빼앗아가기 때문에, 제때 뽑아주지 않으면 곤란합니다.

엎드려 풀을 뽑던 어느 순간,
가만히 고개를 들고 밭을 바라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이름이 있지만 '잡초'라 불리는 것들

잡초라고 불리는 풀들도 다 이름이 있다는 것이 떠올랐습니다.
"쇠비름, 바랭이, 괭이밥, 벼룩나물, 깨풀... "

그 이름들은 풀들의 고유의 존재성을 담고 있습니다.

그들도 생태적 역할과 존재 이유를 가진, 엄연한 생명들입니다.

하지만 ‘내가 키우고자 하는 작물’(고추, 참깨 등)을 기준으로 놓고 보면
그 풀들은 단숨에 ‘잡초’가 됩니다.

존재의 이름은 지워지고, ‘불필요한 것’이 되어 뽑혀지게 됩니다.

‘사람 사는 세상도, 어쩌면 이와 다르지 않구나.’


우리는 모두, 본래 이름을 가진 존재

우리는 태어날 때 부모님이 지어주신 고유한 이름으로 세상에 나옵니다.
그러나 사회 안에서 우리는
수많은 ‘호칭’과 ‘역할’로 불리게 됩니다.
누군가는 아들이고, 며느리이며, 또 어떤 이는 부장, 사원, 사장입니다.

어떤이는 알바생이고 소비자이며, 또 어떤이는 유권자이고 정치인입니다.

그 호칭은 어떤 때에는 자부심이 되지만, 어떤 때에는 무게이자 족쇄가 되기도 합니다.


그리하여 높은 지위에 있을 땐 그것이 곧 ‘나’인 줄 착각하기도 하고,
실패를 겪으면 ‘무가치한 사람’으로 스스로를 깎아내리기도 합니다.

내 본질이 아닌, 역할을 위주로 나를 기억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모든 호칭은 결국 사회속에서 만들어진 이름일 뿐, 내 존재의 핵심은 아닙니다.

역할이나 호칭이 나의 본질을 오롯이 정의할 수는 없습니다.


나를 다시 바라보는 일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난 소중한 존재입니다.”
이 문장은 때로 너무 단순해 보여도,
깊이 되새기면 삶의 중심을 붙드는 힘이 됩니다.


잡초도, 사실은 잡초가 아니었습니다.
다만 누군가의 기준에서 그렇게 불렸을 뿐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직업, 지위, 나이, 성취...
그 어느 것도 '나'라는 본질을 온전히 말해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니 우리는 스스로를 바라보는 연습을 종종 해야 합니다.
조용히, 고요히,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 앞에 서보아야 합니다.

내가 나의 본질을 정의하기 위해서 말입니다.


I see you— 나는 당신을 봅니다

영화 아바타에는 이런 대사가 나옵니다.
“I see you.”
이 말은 단지 눈으로 본다는 뜻이 아니라, 이런 뜻일 것입니다.


당신의 존재를 봅니다.
당신의 존재 전체를 인식합니다.

당신의 마음과 감정, 슬픔과 기쁨,
그리고 당신이 지닌 아름다움을 봅니다.


이런 마음으로 서로를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 자신을 그렇게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잡초라 불렸던 그 풀들이 사실은 제 이름을 가진 생명이었듯이,
당신도, 나도,
그저 이름에 붙여진 호칭을 넘어서
존재 자체로 의미있는, 빛나는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I see you.”

오늘 이 말을 내면의 나에게,

그리고 마주한 타인에게 조용히 전해봅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밥상 위에서 만난 타임머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