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감정 속에서 자신을 변호하는 연습
법정 드라마는 집에서도 재연된다. 나는 두 명의 변호인을 엄중하게 바라본다. 사춘기에 살짝 발을 담그려는 큰 아이와 자기 편이 아니면 세상 서러운 작은 아이의 심기를 고려하여 판결 내려야 한다. 둘 다를 만족시키는 건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두 명의 변론과 감정을 들어주기 위해서는 상당한 인내심과 집중력이 필요하다. 최대한 솔로몬의 지혜를 구하며 두 명 모두 삐치지 않게 편을 들어주며 다독여야 한다. 평화를 사랑하는 ‘효순 테레사’로 빙의 되는 시점이다.
하루도 빠지지 않고 ‘자매의 난’이 일어난다. 손으로 스매싱을 인정사정없이 날리며 몸싸움이 늘어간다. 그러면서도 상대방이 잘못했다고 억울해한다. ”하지 마라. 그만해라. 마지막 경고다. 진짜 그만해. 둘 다 손 들어.“ 나의 목소리도 한 옥타브씩 높아지며 날카로워진다.
“폭력은 안 된다고 했지? 알간? 모르간?(알아? 몰라?)”
“언니가 잘못했어.”
“아냐. 얘가 먼저 때렸다고, 나는 억울해.”
‘CCTV처럼 모든 장면이 녹화되는 능력이 나에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들이 누가 먼저 때렸고 어떤 말로 서로의 감정을 상하게 했는지 바로 확인할 수 있는 기능. 몇 분 전과 몇 초 전 상황을 슬로우 비디오로 돌려보며 누가 잘못했는지 증거물을 내밀 수 있는 장치 말이다. 같은 장소에 있으면서도 폭력의 시작점이 누구인지 사건의 발단이 무엇 때문인지 몰라 당황스러울 때가 많다. 나의 할 일을 모두 내려놓고 계속해서 아이만을 바라볼 수 없기 때문이다. 내 눈과 귀가 360도 자유자재로 회전하지 못함은 참 안타까운 일이다. 외계인이 되더라도 뒤통수에 눈과 귀가 달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해 본다.
서로를 비난하며 눈물로 호소할 때는 이 분위기를 전환해야 한다. 눈물이 쏙 들어갈 단어 선정이 필요하다.
“대체 선빵을 누가 날린 거야?”
선빵이라는 단어에 아이들의 뾰로통한 입이 어느새 쿠득 쿠득 웃음을 쏟아낸다. 그 찰나를 놓이지 않고 후빵이라는 단어를 통해 정신을 흩트려 놓는다.
“그렇다고 후빵을 날리는 것도 정당화될 수 있어? 선빵과 후빵 누구의 잘못이야? 선빵? 후빵? 네가 선빵? 아니면 네가 후빵?”
아이들은 이미 싸움보다 선빵과 후빵이라는 단어에 꽂혀 날 선 감정을 덜어낸다. 그제야 웃고 있던 아이들에게 왜 싸웠는지 각자의 입장을 듣는다.
“이제 자신을 변호해 보도록.”
작은 아이는 대화로 못 이길 것 같으면 분을 못 이기고 손을 사용했다. 큰 아이는 맞고 나서 울며 일러바친다. 동생을 때리면 더 혼날 것 같은 마음과 몸싸움에서 밀릴 것 같은 마음이 섞여 맞서기보다 맞는 쪽을 선택한다. 처음에는 언니임에도 동생 하나 제압하지 못하고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못마땅했다. 우리 부부는 큰 아이에게 몰래 “그럼 너도 후빵을 세게 날려, 엄마 아빠 몰래, 이렇게 맞고만 있지 말고.” 속삭였다. 이랬더니 선빵과 후빵은 폭주했다. 폭력은 나쁜 것인데도 이를 부추겼으니, 우리의 잘못도 컸다.
“무조건 때리는 건 나쁜 거야. 옆에서 깐죽거려도 3번 경고부터 날리자. 그리고 10초간 심호흡하고 기다려. 그땐 엄마가 날아가서 누구 말이 맞는지 들어 줄게.”
알겠다고는 하지만 지켜질 리 없다는 걸 잘 안다. 몸싸움하기 전에 말로써 의사소통하도록 다시 교육한다. 언젠가는 말로도 싸움이 제어되는 날을 꿈꿔본다.
아이를 키우면서 가장 많이 싸웠던 것이 순서를 정하는 일이다. 어떤 일을 할 때 서로 먼저 하려고 하거나 미룰 때 고민이었다. 오은영 박사님의 <금쪽 상담소>를 보며 날짜로 순서 정하는 방법을 적용했다. 큰 아이는 홀숫날, 작은 아이는 짝숫날, 마지막 31은 공동의 날로 정했다. 이로 인해서 싸움이 많이 줄었다.
“엄마, 오늘 누구 날이야?”
“오늘 15일이니깐 홀숫날이야. 언니의 선택은?”
“앗싸. 내 날이다. 그럼 내 노래부터 들을래.”
그 짧은 찰나 큰 아이는 환호성을 지르고 작은 아이는 절망감을 감추지 못한다. 홀숫날에는 큰 아이가, 짝숫날에는 작은 아이가 의기양양해진다.
별것 아닌 것 같은데 아이들은 치열하게 다툰다. 자신이 손해 본다고 생각하는 순간, 마음속의 ‘버럭이’가 어김없이 등장한다. 스마트폰을 함께 보겠다고 했는데 갑자기 마음을 바꿔 남은 시간을 혼자 다 사용한 경우, 반찬 뚜껑을 열고 식사를 도와주는데 상대방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깔깔깔 웃으며 책을 보고 있는 경우, 텔레비전을 볼 때 자기 시간이 지났는데 중간에 끊지 않고 상대방 시간을 침범한 경우, 자기 방에 허락도 없이 발을 내디딘 경우, 하나 남은 바나나를 말도 하지 않고 홀랑 먹어 버린 경우 등 셀 수 없이 많다.
아이들이 싸울 때 나의 스트레스 지수도 하늘을 뚫고 우주 밖으로 나간다. 아이들을 먼저 자제시키는 것보다 나의 감정을 먼저 다스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버럭버럭 화를 쏟아내고 내 분을 못 이겨 씩씩거린다. 나중에야 미안하다며 용서를 구하는 악순환이 된다. 아이들과 나를 안정시키기 위해 잠깐 안아주는 행동이 필요하다. 들쑥날쑥한 감정에 안정을 준다. 아이들을 위한 행동이기도 하지만 나에게 즉각적인 처방전이 된다. 그 조그마한 어깨의 들썩임이 조금씩 가라앉고 나의 심장도 평온한 상태로 서서히 돌아온다. 서로의 체온은 따뜻함으로 다가와 우주 밖으로 달아난 이성을 되돌려 놓는다.
아이들은 싸움을 통해서 자신의 감정과 의사소통하는 과정을 배워나간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생길 수 있고 그 과정을 풀어나가는 방법을 말이다. 물론 말싸움으로 몸싸움으로 치열하게 싸워댄다. 성장하는 과정에 필요한 일이라지만 막상 하루 종일 싸우고 있을 때는 100미터 육상선수가 되어 그 자리에서 벗어나고 싶다. 싸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곳으로 말이다. 특히 중간에서 누구의 편이 아닌 중립에 선다는 건 꽤 어려운 일이다. 아이들에겐 ‘엄마가 내 편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순간, 온 우주와 세상이 내 편이 아닌 것이 된다. 1차 협상으로 타결될 싸움의 마무리는 어렵게 2차 협상과 3차 협상을 거듭하며 전의를 상실케 한다.
나는 감정에 앞서면 말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말싸움이 시작되면 울음부터 터뜨렸기 때문이다.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바보’라고 자책하며 마음은 몇 날 며칠 용암의 불꽃처럼 들끓었다. 이제는 울면서도 이야기할 수 있지만 어느 정도 마음의 분이 가라앉으면 이야기하는 쪽을 선택한다. 침묵을 지키며 마음을 삭이는 시간이 필요하다. 감정 조절은 아직도 서툴고 어렵다. 그래서인지 아이들만큼은 흔들리는 감정 속에서도 자신을 잘 변호하길 바란다. 조금은 덜 속상한 삶을 살았으면 하니까. 그래서 오늘도 연습하고 있는지도.
“대체 왜 선빵을 날렸는지 말해 줄래?”
사진: Unsplash의Jonatan Pi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