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하지 않은 척, 무심한 척, 쿨한 척
남편이 멀어져만 간다. 내 시야 속에 함께 했던 사람 말이다. 두 팔을 뻗으면 충분히 닿았던 거리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되자, 널찍이도 벌어진다. 거리를 좁혀야 한다는 조급함이 고개를 들이민다. 실력 차는 감정을 옭아매며 달갑지 않은 절망감을 선물한다. 다리에 힘을 주며 살며시 속도를 올렸더니 금세 숨은 차오른다.
달리지 않고서 달려야 한다고 충실히 생각했던 여름날, 풀코스를 뛰고 싶다고 잊을만하면 입에 올렸다. 입으론 몇 번이고 완주해 냈다. 폭염, 장마, 아이들 방학, 달릴 수 없는 핑계에서 나와야 했다. 게으름을 벗어던질 실행력은, 결국 마라톤을 접수하고부터였다.
서울을 중심으로 달리는 하프 마라톤을 계획했다. 접수하는 날, 초 단위까지 지켜보며 비장함과 긴장감으로 접속했다. 11시, 서버는 다운. 계속되는 버퍼링에 1시간 30분이 넘어가도록 손을 떼지 못했다. 인원 초과라는 글자가 눈에 들어왔다. 부풀었던 마음의 공기는 맥없이 빠졌다. 마음이 쪼글쪼글, 마라톤의 열기가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같은 날짜, 다른 대회 일정을 검색했다. 소아암 기부 30km 행복 트레일런(비포장도로, 산길 등을 자유롭게 달리는 것), 기존에 뛰어봤던 하프 그 이상의 거리였다. 일반 평지에서조차 뛰어보지 못한 그 숫자, 산과 함께 달린다는 것, 30이라는 숫자는 마법 같은 기운을 불러일으켰다. 힘겨움이 낭만처럼 문을 두드렸다. 역시 무식하면 무모하다. 모르니까 모처럼 용감했다.
남편은 안될 거라고, 30km를 만만히 보지 말라고, 달리기도 푹 쉬고 있으면서 꿈만 크다고, 나를 놀렸다. 그럴수록 나는 뛰고 싶었다. 오기가 생겨났다. 108일이 남은 시점에 이런 쫄깃한 긴장감이 있어야 ‘당장’ 달릴 수 있지 않냐고 반기를 들었다. 나의 달리기에 기부의 의미까지 더해진다면 이보다 좋은 건 없을 것 같았다.
뛰어보자고, 뛰어야 한다고, 완주하면 좋겠지만 될 때까지 달려보자고 했다. 힘들면 포기하면 된다고 집착하지 않은 척, 무심한 척, 쿨한 척을 했다. 서둘러 접수부터 해놓자고 설득했다. 결국 대회비를 입금했다. 새벽에 남편과 완만히 솟은 장수산이 있는 계림공원을 걷거나 달렸다. 어두움 속에 은은히 퍼지는 전등과 색색의 작은 불빛 쇼는 아름다웠다. 다만 여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오르막은 허벅지에 손을 올리며 걷고, 평지와 내리막은 뛸 수 있을 때 최대한 뛰었다. 오르막 이후 평지에서도 계속되는 과호흡 상태, 몸은 쉬지 않고 들썩였고 쉽사리 진정되지 않았다.
희망으로 조잘거리던 말수는 조심스레 줄어갔다. 자신감 넘쳤던 마음도 뛰고 나니 증발하고 있었다. 야트막하던 언덕들이 앞을 가로막는 벽처럼 다가왔다. ‘이보다 더 높은 산들을 어떻게 완주하지? 객기를 부린 걸까?’ 불안함이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심박수는 정상 수치에서 열심히도 이탈했다. 계산대로라면 1시간 안에 5km 후반에서 ~ 6km 정도를 가뿐히 뛰어줘야 했다. 처음에는 힘이 있으니 더더욱 말이다. 5km를 걷고 뛰는데 1시간이 조금 넘었다. 이런 조급함을 들켜서는 안 된다. 완벽한 처세술로 첫술에 배부르냐며 앞으로 열심히 뛰면 된다고 큰소리를 쳤다. 마음은 쪼그라들어 콩보다 더 작아지고 있었지만.
1시간에서 1시간 30분으로 점차 시간을 늘렸다. 힘든 날은 강약을 조절했다. 걷는 대신 오르막을 더 넣어 시간을 늘렸다. 일주일이 넘어가자 10km를 조금 넘는 거리를 걷고 뛰었다.
새벽인데도 남편은 신기할 정도로 알람이 울리면 벌떡 일어났다. 마치 로봇처럼, 1초의 망설임도 없다. 나는 이미 알람을 자장가 삼은 지 오래다. 내 핸드폰의 알람은 쉼 없이 울려대지만, 남편의 협박과 타이름,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달콤하지만, 나중에 후회한다.”라는 명언에도 꿈쩍하지 못한다. 실눈을 뜨며 남편의 위치를 간혹 확인하고, 남편의 화남의 정도를 감지한다. 분위기상 지금 일어나지 않으면 한판 싸울 것이라는 위험이 감지된다. 일어나기 버튼을 서둘러 작동시킨다. 하품을 수없이 해대며, 3분 만에 남편보다 더 빠르게 모든 준비를 마친다. 그리곤 남편을 기다리는 여유를 부린다. 항상 내가 늦게 일어나지만, 준비가 빨라야 기분 상한 남편이 화를 못 내게 할 수 있다.
남편이 없는 날은 무너져내렸다. 내 눈꺼풀의 무게는 세상을 이고 지고 있는 듯했다. 그러다 야생마보다 더 멀리 달아나 버린 남편과의 차이에 사뭇 심각해졌다. 남편과 발맞추기 위해선 나는 좀 더 긴 시간을 훈련해야 했다. 다음날, 힘겹게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못 일어날 줄 알았던 의지박약인 나, 새벽에 일어났다는 것만으로도 작은 희열을 맛보았다. 함께 달릴 때와는 다르게 나의 호흡과 내딛는 걸음, 속도에 집중했다. 때론 평지에서 10km를 달리며 로드 달리기에서도 체력을 끌어올렸다.
새벽 날씨가 선선해져도 러닝 조끼를 메고, 양쪽에 물주머니를 담고 뛰면 바지까지 축축해졌다. 특히나 습한 공기를 머금으며 더운 기운을 뿜을 때는 이른 아침도 소용없었다.
가슴에 손을 얹고 열심히 하지 않은 날도 있었다. 살살 실내 자전거를 1시간 탔다. 땀이 평소의 절반이다. 역시 몸은 알았다. 내 몸이 열심히 했는지, 안 했는지 정직하게. 만족스럽지 않아, 오후에 계림공원으로 향했다. 달리다가 피아노 강좌를 함께 듣는 수강생이 “열심히 하네요.” 하길래, 진짜 열심히 해야 할 것 같았다. 누군가가 나를 뒤통수에서도 지켜볼 수 있다는 생각에 힘든 발걸음을 더 열심히 들어 올렸다.
숫자가 카운트될수록, 쫄깃하다. 그 온전한 맛을 성실히 느끼려 한다. 평지에서 달린 후 산을 오르내리기도 한다. 그 거리를 조금 늘려보며 변화를 줘본다. 좀 더 힘을 빼며 나아가려고 애쓴다. 이제 아이들 방학도 끝나가는 시점, 변명 따윈 할 수 없다. 일주일 후면 좀 더 높은 산에서도 달려야 한다. 뛸 수 있는 때, 실천처럼 뛰자.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달린다. 나는 앞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을 만들어가는 중이다. 그렇게 서서히 산에서도 달리는 사람이 되어간다.
#달리기에진심입니다만
#기상은남편이화내기일보직전에일어나는것
#집착하지않은척무심한척쿨한척작전성공
#접수하고대회스위치온
#30이라는경이로운숫자에매혹되어버린트레일런
#달려본다앞뒤재지않고우선시작
#열심히한다는말에괜히열심히다리를올려
#변명따윈걷어치워
#16회행복트레일런30Km도전
사진 : 언스플러쉬
애큐온 행복트레일런 홈페이지
계림공원 불빛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