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심해 1절, 놀아줘 2절, 다른 신나는 놀이는 3절
"엄마, 심심해. 놀아줘!"
아이를 키우는 사람에게 이처럼 무서운 말이 없다. 갑자기 등골이 오싹해지면서 아이들이 무서운 존재로 다가온다. 나는 아이들과 축구도 하고 농구도 했다. 축구할 때는 메시가 되어 운동장을 질주했고 농구할 때는 마이클 조던이 되어 수없이 슈팅했다. 얼굴은 시뻘게지고 땀은 비 오듯 쏟아졌다. 열정과 마음은 운동선수 뺨쳤지만, 거친 숨소리와 함께 체력은 급격히 고갈됐다. 골을 넣어보겠다고 소리를 지르며 활보했더니 다리만큼 목도 아팠다. 마음이 앞선 아이들은 축구를 갑자기 핸드볼로 바꿔버리는 기이한 풍경도 연출했다.
함께 운동했음에도 아이들은 쌩쌩하다. ‘누군가 나 몰래 천 년 묵은 산삼을 먹였을까?’ 합리적인 의심마저 든다. 그것도 아니라면 아이들 몸속 어딘가 ‘초고속 충전 버튼’을 숨기고 있음이 분명하다. 딱하고 누르면 자가 충전 시스템이 활성화되고 백번이고 누를 수 있는 요술 버튼이다. 아이들은 곧바로 충전됐고 ”심심해 1절, 놀아줘 2절, 다른 신나는 놀이는? 3절”로 돌림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어떻게 이렇게 쉬지 않고 놀 수 있는지 신기할 따름이다.
나의 다크서클은 점점 뚜렷해진다. 하품을 연거푸 하다가 눈가는 이미 눈물로 촉촉해진 지 오래다. 눈을 꾹꾹 누르며 지금이 현실이 아니길 부정해 본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 했던가? 이 현실을 순순히 받아들여야 한다. 그래야 정신 건강에 좋다. 하이에나가 먹이 사냥을 나서듯 새로운 놀 것을 찾아야 한다.
”휴지를 불어서 오래 버티기 해볼까?“
실행 가능한지 몇 번 후후 불어 보니 머리는 멍해지고 어지러웠다. 체력은 급격히 고갈 신호를 알렸다. 얼른 방향을 틀어 다른 놀이를 생각해야 한다.
"휴지를 물감으로 찍어서 물감 놀이하고 싶어. 올록볼록한 면이 나오게 말이야."
"나는 면봉으로 물감 찍기 놀이할 거야.“
”그래. 이번에는 미술 놀이! 자유롭게 마음껏 찍고 발표해 보자.“
다행히 아이들이 앉아서 할 수 있는 미술 놀이를 택했다. 나는 스케치북, 물통, 수채화 물감, 아크릴 물감, 붓. 면봉, 휴지 등을 챙겼다. 잠시 엉덩이를 붙일 수 있다는 기대감에 아이들 못지않게 설렜다.
작은 아이는 면봉과 화장지로 찍어보고 붓으로 색칠했다. 어느 순간 붓으로는 성에 안 찼는지 손바닥과 손가락까지 합류했다. 영혼을 담아 문지를 때마다 내 얼굴은 세탁과 청소에 자유롭지 못하고 일그러졌다. ‘저 옷이 어쩌지? 아주 테이블과 주변이 물감 범벅이로구나.’ 아이 옷의 얼룩을 보지 말아야 하는데 자꾸 눈이 갔다. 테이블에 초토화된 모습에 불안하고 초조했다. 하필이면 새로 산 새하얀 테이블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게 팔토시와 앞치마를 해줘야 했고 테이블에 신문지라도 깔았어야 했다. 빨리 자리에 앉고 싶었던 나의 조급함이 부른 대참사다.
아이는 초록으로 스케치북을 색칠했다. 손가락은 쇼팽의 빗방울 전주곡을 치듯 신들리게 움직였다. 마치 스케치북이 피아노 건반 같았다. 비가 우수수 내리며 여기저기 자유로운 영혼처럼 연주였다. 주물렀다 펴더니 어느 순간 초록 손이 되었다. “완전 개구리 손이야.” 모두가 한바탕 웃었다. 작은 아이는 마음이 또 바뀌었는지 손을 물티슈로 닦더니 갈색 물감을 집어 들었다. 물감을 문지르며 춤추듯 덧칠했다. 초록 손이 갈색 손으로 바뀌는 것도 한순간이었다. 아무리 보아도 이게 무슨 그림일까? 싶었다.
”제목은 운동장이야.“
”흙먼지 날리며 열심히 축구하는 모습이야? 왜 사람은 안 그렸어?“
”아니, 모래놀이하는 모습이야. 모래성 쌓다가 허물고 모래 그림 그리는 거야. 모래 촉감이 너무 좋았어. 물감도 너무 부드럽고.“
그렇게 열심히 뛰어다니며 놀아줬는데 기억하는 것은 모래놀이라니 조금 허탈했다.
큰 아이는 난타하듯이 붓과 붓을 부딪치며 물감 방울을 튀겼다. 지나간 자리마다 밤하늘의 별처럼 작은 점들이 흩뿌려졌다. 화장지로 올록볼록하게 나타내 보고 면봉은 찍거나 선을 그어주었다. 노란 물감으로 별과 꽃을 초록 물감으로 은하수를 표현했다. 손톱처럼 작은 과일들을 여기저기 그려 넣었다. 마치 광활한 스케치북은 우주 속 과일가게를 연상케 했다.
세월의 흔적으로 몇몇 아크릴 물감은 굳어있었다.
”물감 진짜 딱딱해. 갈색이라서 꼭 나무껍질 같아. 이거 사용해도 돼?“
”좋은 생각인데. 물감 껍질 벗겨줄까? 그 위에 그림 그려도 되고.“
”그렇게 그림 그려도 되는 거야? 어떻게 고정하지?“
”그림 그리는데 정해진 건 없어. 글루건으로 고정하자. 그림에 여러 가지를 붙이는 걸 콜라주 기법이라고 해.“
”콜라…. 주? 먹는 콜라? 콜라주?“
껍질 속에 갇혔던 물감은 나로 인해 탈출에 성공하고 세상의 빛을 보았다. 붕어빵틀에 붕어빵이 드러나듯 물감틀 형태로 자태를 뽐냈다. 큰 아이는 아크릴 껍질을 떼었다 붙였다 신기해하며 굳은 물감의 새싹을 그려 넣었다. 아이가 원하는 위치를 가리키면 나는 글루건으로 고정했다. 그림을 그리는데 보조 역활을 묵묵히 수행했다.
”제목은 꽃 나라 열매 나라야. 여기저기 흩뿌려진 노랑 점들은 별도 되지만 꽃도 되지. 꽃들은 지고 나면 여러 과일로 주렁주렁 열릴 거야. 맛있겠지?“
”제일 먹고 싶은 과일은 뭐야?“
”여기 홍시, 수박, 망고스틴. 체리 중에 힌트가 있어. 두그 두그 두그 체리가 제일 먹고 싶어.“
미술 놀이가 끝나고 나니 테이블은 말 그대로 물감 축제였다. “모두 제자리 모두 제자리 모두 모두 제자리“ 노래를 부르며 미술 재료를 모으고 정리했다. 작은 아이가 지나간 자리는 물감이 마지막까지도 열일을 다했다. 물감이 묻은 물티슈로 흰 테이블을 열심히도 문질렀다. 아이가 지나갔던 부분을 따라가며 힘주어 닦았다. 다행히 하얀 테이블은 물감 얼룩이 사라지고 말끔히 제 모습으로 돌아왔다.
옷 하나는 운명을 달리했다. 깨끗이 지워지지 않을 것 같던 슬픈 예감은 역시나 적중했다. 나의 속도 모르고 토끼 캐릭터에 예쁜 녹색 풀밭이 그려졌다며 아이는 신나 했다. 역시 아이들의 긍정적인 마음가짐은 따라갈 수가 없다. 다음에는 앞치마와 팔토시로 무장시켜 옷이 생명력을 잃고 버려지는 비극을 막아야겠다.
아이들과 작은 미술관을 만들어보니 계획대로가 아닌 우연이 만들어낸 과정이 재밌었다. 손가락으로 조물조물하는 손놀림, 붓으로 난타하듯 흩뿌리는 모습, 장난꾸러기 같으면서도 진지함이 묻어났다. 완성된 작품을 들고 약간은 쑥스러워하면서도 씩씩하게 발표하는 모습을 보니 ‘이렇게나 많이 컸구나’ 싶었다. 물론 말을 너무 잘해 혈압이 급상승할 때도 있지만 건강하게 자라줌에 감사한 따름이다. 열심히 하루를 보냈던 아이들은 코까지 골며 잘도 잔다. 이제야 ”엄마, 엄마, 엄마.“ 수백 번 넘게 부르는 굴레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오늘 하루도 수고했어.“
사진: Unsplash의Joel Fili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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