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F 구제금융 위기 속에 신입사원으로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하지만 위기는 이제 시작이었다. 1999년에 들어서자 회사의 자금사정이 더욱 안 좋아졌다. 재무팀은 하루하루 결제대금 걱정을 해야 했고 직원 모두 비용절감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식당에 비치해 두던 ‘냅킨’도 없애고 각자 손수건을 가지고 다니기로 했다. 매일 ‘원가절감’ 활동에 매진했다.
연구소 사무기술직 직원들도 차를 파는 영업활동을 했다. 우리는 지역의 영업소로 할당이 되었다. 영업소 직원들과 함께 길거리에 나갔다. 주민들에게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차를 구매해달라고 호소했다. 회사는 아직 차를 사지 않은 직원 명단을 만들었다. 나도 여러 번 부서장 면담을 한 후, 결국 차를 반강제로 구매했다. 기분이 참 더럽고 치사했다. 인기가 없어서 잘 팔리지 않던 차종을 할부 계약했다. 그렇게 나는 생애 첫 자동차를 ‘자폭’했다. 아직 결혼 전이라 할부금을 그런대로 견뎌냈지만 결혼을 한 동기는 생활비도 빠듯한데 ‘자폭’을 할 수는 없었다.
2000년 후반, 회사는 자금난을 견디지 못하고 결국 부도가 났다.직원 모두 3개월째 월급을 받지 못하고 일을 하고 있었다. 모두가 힘겹고 일할 맛이 안 났다. 처자식을 둔 사람들은 생계를 위협받고 있었다.
노조는 파업을 시작했다. 회사는 문을 걸어 잠그고 노조와 외부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노조원들은 회사 정문에서 진을 치고 있었다. 사무직은 출근해서 회사를 사수해야 했다. 우리는 아침 일찍 회사에서 멀리 떨어진 제3의 장소에 모였다. 통근 버스를 나누어 탑승하고 동시에 회사 정문으로 출발했다. 버스가 정문 앞에 도착할 때쯤 무전을 보내서 경찰이 바리케이드를 치운다. 버스가 정문을 안전하게 통과하면 안에서 빨리 문을 걸어 잠 갔다. 첩보작전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우리는 갈라졌다. 생산직 노조원 아저씨들과 사무기술직 비노조원으로…
노조원들이 공장 담을 넘어서 연구소 서버실을 점령하려 한다는 소문이 돌았다. 연구소는 데이터가 생명이다. 데이터가 지워지면 끝이었다. 마치 공장 생산설비를 부수는 것과 같다! 우리는 밤마다 순번을 정해서 담장 아래서 불침번을 섰다. 몇 명씩 조를 짜서 드럼통에 장작불을 피우고 불안한 미래를 얘기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노조원들은 담장을 넘어오지 않고 인사팀 건물을 공격했다. 버스로 건물을 막고 양측 간의 몸싸움이 벌어졌다. 몇 주간 신문과 방송에 이런 처참한 광경이 보도되고 있었다. 우리는 그렇게 IMF 구제 금융의 여파가 우리 삶에 파고드는 것을 피부로 느꼈다.
매일 신문, 방송에서 <워크아웃>, <구조조정> 같은 생소한 단어들을 쏟아내고 있었다. 2000년 겨울, 회사와 노조는 ‘구조조정’ 안에 합의했다. 사무기술직 역시 회사를 살리기 위해 동의서를 제출했다. 이제 <인력 감축>이 현실이 되고 있었다. 매일 ‘자의 반 타의 반’ 회사를 떠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2001년 2월, 1750명이 <정리해고> 되었다. OJT 하면서 알게 된, 현장 아저씨들도 많이 해고되었다. 그들은 열심히 일했을 뿐인데, 무슨 잘못을 했기에 회사를 떠나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거대한 자본의 힘이 경쟁력 강화란 이름으로 사람들에게 희생을 강요했다.
나는 어수선한 회사 분위기 속에서 다른 회사를 알아보았다. 그리고 경력직으로 회사를 옮기는 데 성공했다. 이직하고 한참 후에 밀린 3개월치 월급을 받았다. 이렇게 나의 첫 직장 경력은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