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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중년의글쓰기 Jul 21. 2022

그래, 나는 X세대였어!

97세대의 직장생활 연대기.... 저도 할 말 있어요~

나는 X세대였나?


1970년에서 1979년 사이에 태어난 세대란다. 내가 1971년 돼지띠이니 맞다. 특히 71년은 역대 최대로 출생아가 많았던 해였다. 초등학교, 중학교에 입학하고 대학 입시를 치를 때, ‘학생에 비해 교실이 턱없이 부족해서 오전 오후반 편성을 했고 대입 경쟁률은 최고’를 기록했다.


김민희 작가는 저서 <다정한 개인주의자>에서 X세대를 아래와 같이 정의했다. 

먼저 ‘최샛별 교수의 <문화사회학으로 바라본 한국의 세대 연대기>를 기반으로 하되 문화적인 측면뿐 아니라 정치 경제적인 측면의 특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정치적으로 운동권 다음 세대로서 탈정치 탈이념적 성격이 강하고, 경제적으로 학연 지연 혈연을 중시하지 않으면서 IMF 외환 위기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86세대(1960~1969년생)와 밀레니얼 세대(1980~1989년생)의 중간세대>


이게 X세대의 정의다. 이 기준을 일단 나에게 대입시켜 보자.


 정치적으로 독재정권이 타도된 이후에 대학생이 되었다. 나의 누나 형들이 민주화운동을 할 때, 난 중 고등학생이었다. 고등학교 선생님 중 일부가 전교조 투쟁으로 정부와 학교와 갈등을 벌이고 있었다. 내 친구는 그런 선생님을 지지하기 위해 운동장에 나가 시위를 했다. 나는 그런 친구를 걱정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정도였다. 민주화 열사가 피를 흘리는 장면을 TV나 신문을 보고서야 세상에 큰일이 생겼다는 걸 알았다.


 대학에 들어가니 ‘독재정권 타도’를 외치는 대신 ‘OO사학재단 물러가라’를 외쳤다. 마침 선배가 데모를 하던 중에 죽었고, 우리는 거리를 점령하고 시위를 했다. 하지만 민주화가 이미  이루어진 뒤라 대중은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고 아무도 열사를 기억하지 않았다.


 재수할 때 뒤늦게 정신을 차려서 다행히 대학에 입학. 부모님께 큰 기쁨이 되었다. 대학 1,2년간 자유를 만끽했다. 처음으로 이성과 어울려서 놀아본 건 대학 연합 서클을 통해서였다.


 나와 동기들은 10원짜리 동전을 들고 다방 공중전화에서 선배들께 전화를 했다. 서클 행사 참석을 요청하는 전화를 돌리던 막내였다. 선배들을 보니 동기, 기수별 모임이 탄탄했다. 하지만 우리 동기들은 군대 제대하니 제각기 흩어져 있었고 후배들은 그 수가 점점 줄어들었다. 결국 30년 넘은 봉사서클의 맥이 끊겼다. 내가 선배노릇을 잘 못하나 싶었다.


 군대에서는 권위와 집단주의에 숨이 막혔다. 개인주의적 특성에 나의 연약함이 더해져서 적응이 더디었다. 매일 열차 레와 기합을 받는 이유를 알 것도 같았지만 공정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부대로 배치된 뒤부터 군대문화가 달라지는 것을 실감했다. 말년 병장이 되었지만 내 식판을 내가 설거지 하는 걸 당연히 여겼고 후배 상병에게 식판 검사를 퇴짜 맞고 다시 설거지를 했었다.


 대중문화가 꽃피우던 90년대, 군대에서 서태지와 아이들과 룰라 노래를 즐겨 들었다. 그들을 쫓아다닐 정도의 광팬이 되기는 나이가 많았다. 하지만 기꺼이 가요 카세트테이프를 사고 시간을 내어 대중문화를 소비했다  그 시절 가요 감성은 내속 깊이 자리하고 있다. 지금 노래방에 가도 가사를 따라 부를 수 있을 거 같다.


 정보통신기술 발달로 인해 새로운 세상이 열렸다. 기업에서 86세대가 새로운 기술을 연마하던 그때, 나는 어얼리 어답터로서 하이텔, 천리안 온라인 채팅에 빠졌다. 모뎀 연결로 인해 전화가 안된다고 어머니께 자주 혼났다. 나와 친구는 주로 밤늦게 PC통신을 했고 이때 알게 된 이성을 대학로에서 만났다. 그리고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이미지는 하늘과 땅 차이란 것을 몸소 깨달았다.


 대학 4년 여름방학 동안 인턴으로 합격했던 회사는 부도가 나서 입사가 취소되었다. 그래도 공대 출신이라 그나마 IMF 외환위기 속에서 겨우 정규직에 턱걸이했다. 내가 들어서자마자 문이 닫혔다. 대기업은 더 이상 대규모 채용을 하지 않았고 나는 XX그룹의 마지막 공채 신입이었다.


 주머니 속에 돈이 조금 생기자 부지런히 바깥세상을 탐색했다. 재테크가 뭔지 몰랐고, 그저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고 싶었다. 네띠앙, 다음 포털의 직장동호회에서 놀고 배우고 여행하고 짝사랑하고 그렇게 지냈다.


 회사에 옮기고 나니 어떻게 알았는지 대학 총동문회에서 연락이 왔다. 동문회비를 냈더니 두꺼운 책 한 권이 왔다. 높으신 분들의 각종 행사 소식만 가득했고 여러 분야에 진출해 있는 동문선배의 이름과 소속이 학번순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개뿔이었다. 다시는 동문회비를 내지 않았다. 나와 내 친구들은 사회에서 모두 각자도생 중이었다. 살아남기 바빴다. 연고나 동문을 따지는 사람들에 거부감이 많았다. “그래서 뭐?”


 제조업계에 구조조정이 일상화되었고 86세대는 베이비 부버가 퇴장한 자리를 속속 차지했다. 조직이 통폐합되면서 직급 피라미드 모양이 아래는 넓고 위쪽은 아주 뾰족해졌다. 나는 직장에 점점 올인했고 회사를 향한 로열티를 뿜 뿜 했었다. 그런데 갑자기 40대 후반에 회사를 나왔다.


확실히 정치 경제적으로 우리 학번, 친구들이 뚜렷하게 우리 사회에 집단적 영향력을 미친 흔적이 없어보인다. 반면, 대중문화분야에서는 70년대생이 리딩을 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세대는부모님과 동시대를 살고있지만 세대의 간격은 실로 엄청나다.


 마지막으로 부모님 얘기를 빼놓을 수 없을 거 같다. 왜냐면 우리 부모님 세대는 일제강점기, 6 25 전쟁을 직접 겪은 세대였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으셨다. 그래서 자식에게 가난을 대물림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사셨다. 


 우리는 그런 부모님의 등을 보고 자랐다. 사랑을 많이 받았고, 본인은 나쁜 거 드시고 자식에게는 좋은 것만 주셨다. 아버지와 리어카에 연탄을 싣고 배달 갔던 기억이 난다. 아버지가 모래를 싣고 와서 블록에 시멘트를 발라 직접 다가구 주택을 지으시던 모습도 기억난다. 부모님을 생각하면 허투루 살 수 없었다. 내가 아무리 힘들어도 부모님의 고생과는 차원이 다르다고 생각한다.


언론은 나를 97세대라고 정의한다. 내가 아닌 다른 이를 통해서 내가 정의되고 있다. 김민희 작가는  <다정한 개인주의자>에서 다음과 같이 얘기한다.

 “나도 할 말 있다!”라고 “저요. 저요” 손드는 X세대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먼저 우리 X세대가 자신을 알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X세대의 경쟁력과 가치, 사회적 역할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있다.


그래서 “나도 X 세대야” 하고 용기 내어 손들어 본다. 아무래도 이글이 내 얘기의 처음 글이 될 것 같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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