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11월, 나는 25년 과장 진급 연차를 앞두고 승부수를 띄우기로 마음먹었다.
7년간 해오던 온라인 MD 직무를 내려놓고, 사이트 고객을 대상으로 프로모션을 기획하는 온사이트 마케터로 보직을 옮기기로 결심한 것이다.
사회생활을 시작한 이후 줄곧 잡화 브랜드의 온라인 MD로, 브랜드사의 매출을 책임져 왔다.
잘 팔리는 상품을 더 잘 팔기 위해, 안 나가는 상품을 소진하기 위해 애썼다. 우리 브랜드에는 없지만 타사에서 잘 나가는 상품 속성을 분석해 온라인 전용 상품을 기획하기도 했다. 브랜드사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대기업 유통사의 잡화 브랜드 MD로 이직하게 됐다.
이직 후에는 업무의 한계가 분명했다. 부서별 역할 구분이 명확해, 상품 기획은 다른 팀의 일이었고 나는 ‘만들어진 상품을 어떻게 팔지’만 고민해야 했다. 매출이 잘 나올 수 있는 플랫폼에 집중해 볼륨 자체를 키우거나, 온라인 전용 상품을 기획 및 출시해서 신규 매출을 만들었다. 그러나, 이직 후에는 사내 유통 채널 내에서만 KPI를 달성해야 했기에 제약이 따랐다. 1년을 해보니, 현재 직무에서는 승진까지 가기 어렵겠다는 판단이 들었다. 맡고 있는 브랜드들의 컨디션이 너무 좋지 않아, 상황이 나아질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만들어진 상품을 잘 팔아야하는 데 상품은 물론, 브랜드력이 계속 다운 트렌드여서 내가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그즈음, 팀장님이 다른 팀으로 보직 이동하게 되며 새로운 제안을 주셨다.
“같이 프로모션 기획해 보지 않을래?”
MD와 프로모션 기획은 언뜻 달라 보였지만, 나에겐 낯설지 않은 일이었다.
전 직장에서 온라인 전용 상품을 기획하며 상품별 네이밍, 월별 캠페인을 직접 구상해 매출을 끌어올렸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브랜드 모델이 출연한 작품, 특징을 고려해서 작명한 상품명은 디시인사이드 팬덤 내에서 자연스럽게 바이럴되어 품절 사태까지 이어졌고, 이 경험은 내 이직의 주요 포인트가 되기도 했다. 과거엔 상품을 중심으로 한 프로모션, 이번에는 혜택과 큐레이션 중심의 프로모션이라는 차이가 있을 뿐, 핵심은 같다고 판단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보직은 내가 주도적으로 기획하고 운영하는 자리였다. 기존보다 자율성이 높았고, 나의 기획이 플랫폼 전체 매출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었다. 성과를 내면 진급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문제는… 규모였다.
브랜드 매출이 아닌, 해당 주차 플랫폼 전체 매출을 책임지게 되었다. 이전까지 내가 담당하던 매출이 월 4억 수준이었다면, 보직 이동 후에는 월 400억. 책임질 숫자가 커지자, 그 무게는 그대로 나를 짓눌렀다. 아니, 짓이겼다.
‘진급하려면 잘해야 해. 실패하면 안 돼.’
이 생각이 발목을 잡았다.
잘하려 하니 스텝이 꼬이고, 나아졌다고 믿었던 나는 다시 감정의 바닥으로 떨어졌다.
예전보다 더 깊고 낯선 구렁텅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