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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Apr 07. 2024

건강검진이 불러온 것들

1. 재희의 일기     


미루고 미루었던 건강검진을 어렵게 예약할 수 있었다. 연초에 분명 ‘빨리 해 버려야지’ 하고 결심했지만, 어렴풋이 내 몸이 알고 있었던 것일까. 아니, 사실 전조 증상들이 너무 많았고 지속적이었고 정확히 뭐라 말할 수 없었지만, 끊임없이 고집스럽게 떨어지는 덜 잠긴 수도꼭지의 물방울처럼 내 몸에서 ‘건강’ 세포가 죽어간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래서 회사 일이 바쁘다, 개인적으로 해야 할 일이 있다, 뭐 그런저런 그 누구도 깊이 관심도 없을 핑계를 대며 검진일을 뒤로, 뒤로 미루고 있었다. 11월에 하지 않으면 무슨 무슨 불이익이 있을 거라는 혜숙의 경고가 없었다면, 끝내 전화기를 들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나이가 들고 적어도 1년에 한 번 혹은 2년에 한 번, 뭐라도 검사를 번갈아 가며 받는 것이 권장된다. 국가는 ‘아프면 안 돼’, 혹은 ‘아프면 빨리라도 발견해야지’를 충실하게 실행하기 위해 1년 동안 정기적으로 건강검진을 받으라고 문자로 압박을 꾸준히 해준다. 고맙다. 그런데, 그런데 문자로도 압박을 느끼고 받기도 전에 두렵다. ‘그래, 어차피 피할 수 없다면, 빨리 해 버리자.’ 딱 그런 마음으로 수화기를 들었다.      


“저, 건강검진 예약하려고요.”

“이번 주는 다 마감되었고요, 다다음 주 21일 하루 비었네요. 예약하시겠어요?”

“네, 그렇게 해주세요.”     


검진센터 안내원은 건강검진 당일 지켜야 할 수칙들에 대해 매뉴얼을 빠르게 읽는 것 같았다.

8시간 이상 금식, 예진 문항 온라인 작성, 생리 여부에 따른 검진 항목 변경 등등에 관한 것이었다.      

평소엔 별생각 없다가도 8시간 금식해야 한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갑자기 뭔가 뭐든, 음식을 입안으로 마구마구 집어넣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뭔가, 그렇다. 마지막 만찬 같은. 아직 한 주가 남았지만, 웃기지만, 왠지 지금부터 막 잘 먹어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더 웃긴 것은 지금 당장 먹고 싶은 것은 왕뚜껑 사발면이라는 사실! 예전에는 왕뚜껑 사발면 맛은 약간 짜기만 하고 면은 꼬들거리기만 한다고 생각했는데, 언젠가부터 인가 새로 업그레이드를 시켰는지, 아주 매력적인 맛으로 다가왔다. 한 번에 그 맛을 음미하기에 적당한 양을 제공하기도 하고, 단짠의 맛을 적절하게 맞춘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도, 노브랜드에서 할인판매를 할 때면 6개들이를 아주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기도 하다.      


‘건강검진 날짜까지 10일 남짓 남았고, 그럼 하루 한 개씩 6일 동안 먹어야겠다.’     


벌써 침이 고인다. 지갑과 에코백을 챙겨 들고 노브랜드로 향했다. 왕뚜껑 사발면 있던 자리로 직진! 아니, 그런데, 없다! 노브랜드 안을 샅샅이 뒤지고 내가 눈이 너무 나빠져서 안 보이나? 이런 생각을 하면서 몇 바퀴나 도는 내가 좀 이상하게 보일 것 같기도 했다. 직원에게 다가가 여기 있던 왕뚜껑은 어디로 갔냐고 물었다. 직원은 할인판매 기간이 끝났고, 언제 다시 들어올지는 모르고, 지금은 없다고, 지금은 없다고 말했다. 풀이 죽어 그냥 집으로 와버렸다. 건강검진까지 안 먹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건강검진이 끝나자마자 꼭 먹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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