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김수환 추기경의 말하기 2) 선지자의 용기
김수환 추기경을 존경하는 이유는 많습니다. 약자의 편에서 진심으로 배려하고 공감하며 따뜻한 말씀을 해 주셔서 존경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따뜻한 눈빛과 온화한 성품으로 마음의 평온을 주는 좋은 말씀 덕분에 존경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충분히 종교인으로서 어른으로서 존경받을 만합니다. 하지만 현실과 거리가 먼 감동적 이야기는 일시적으로 사람들에게 평온함을 줄 수 있지만 그 시간이 지나면 여전히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이러한 현실을 바꾸기 위해 선지자의 용기로 사회 현실의 부조리를 바로잡기 위해 종교인으로서 양심을 다합니다.
1971년 4월에 박정희 대통령이 7대 대통령 취임을 하고 장기집권을 꿈꾸며 민주주의와 인권을 짓밟았습니다. 박정희 정권이 삼권분립을 무시하고 모든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국가보위에 관한 비상대권을 지려고 국회를 겁박하고 국민들은 공포정치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성탄절이 다가와 메시지를 발표하는데 “괴로워하는 이들, 실의에 빠져 있는 모든 이들과 이 성탄 밤에 마주 앉아 이야기를 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의 고통과 슬픔, 회의(懷疑)를 나누고 싶습니다.”라고 합니다.
성탄절에 축복과 평화의 메시지를 내야 하지만 암울한 현실 속에서 고통받는 현실을 직시하고 용기를 내어 정부와 박정희 대통령을 비판하는 메시지를 냅니다 그리고 명동대성당 자정 미사에서 “정부와 여당에 묻겠습니다. 비상대권을 대통령에게 주는 것이 나라를 위해서 유익한 일입니까? 그렇지 않아도 대통령한테 막강한 권력이 가 있는데, 이런 법을 또 만들면 오히려 국민과의 일치를 깨고, 그렇게 되면 국가안보에 위협을 주고, 평화에 해를 줄 것입니다.”라는 말을 합니다. 이를 지켜보던 박정희는 방송중지 명령을 내리고 생중계를 했던 PD와 관련자들이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고초를 겪습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그 뒤에도 박정희 정권의 장기 독재체제에 대한 비판을 합니다. 1976년 3월 1일 3·1절 기념미사에서 재야인사, 천주교 신부, 개신교 목사는 유신반대와 정권 퇴진을 요구하는 <민주구국선언문>을 발표합니다. 이 일이 있고 난 다음에 천주교 내부에서는 사회참여에 대한 부정적 입장을 가진 사람도 있었고, 진보적인 신부들의 모임인 ‘천주교 정의구현 전국사제단’의 적극적 사회 참여를 하는 신부도 있습니다. 이러한 내부 갈등에 대하여 김수환 추기경은 천주교의 분열을 염려하면서도 신부들의 올곧은 양심은 높이 산다고 말을 합니다.
1979년 10월 26일 박정희는 죽고 12월 12일 전두환과 노태우 등이 주도하는 신군부 세력이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권을 장악합니다. 신군부는 80년 5월 17일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고, 모든 정치 활동을 금지합니다. 국회와 대학을 폐쇄하고, 민주화 운동 세력과 신군부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체포합니다. 5월 18일 광주에서는 광주에서 비상계엄 확대와 휴교령 반대 시위 발생하자 신군부는 공수 부대원 투입, 무자비한 진압을 합니다. 시민들의 시위 합류하고 시민군 조직하지만 계엄군은 언론을 통제하고 광주시민을 폭도로 몰아 총을 발포하여 많은 사람의 목숨을 빼앗고 무력 진압을 합니다.
1983년 김수환 추기경은 전두환 대통령을 청와대에서 만나 학생들의 시위에 희생자가 나지 않도록 당부하러 가지만 별 성과가 없이 돌아옵니다. 그 이후 김수환 추기경은 광주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198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가 한국을 방문했을 때도 5·18의 상징인 금남로와 전남도청을 방문하여 민주항쟁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가족을 위로합니다. 암울한 시대 현실 속에서도 늘 사람들을 위로하며 용기와 희망의 메시지를 발표합니다.
1986년 3월 27일 부활절 메시지를 발표합니다.
“우리는 주변의 불의를 보고도 이를 신속히 해결할 아무런 대책을 마련치 못한 채 무기력과 좌절에 시달리고 있다. 모든 불의를 이겨낸 예수 부활의 참뜻을 오늘에 되새겨 우리 모두가 승리의 선포자요, 증거자가 되자.”
이러한 종교계의 입장과 각계각층의 민주화 요구에도 불구하고 전두환 정권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시민들을 탄압합니다. 1987년 1월 14일,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수배 중인 선배의 소재를 추궁받던 서울대학교 박종철 학생이 고문을 받다가 숨집니다. 경찰은 “책상을 탁 치자 억 하고 죽었다.”라는 터무니없는 발표를 하여 사건 자체를 숨기려 합니다. 김수환 추기경은 1월 26일 명동성당에서 박종철 군 추모미사를 집전하고 전두환 정권의 신랄하게 비판합니다. 이때부터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중심지가 됩니다. 87년 5월 18일에 홍제동 성당 김승훈 신부는 정의구현 사제단의 이름으로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은 조작’에 대한 성명서를 발표합니다. 이러한 발표가 있은 후 전국 각지에서는 전두환 정권 규탄 시위가 일어납니다.
그러던 중 6월 9일,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 은폐 규탄’ 시위에 참여하였던 연세대학교 이한열 학생이 시위 도중 경찰이 쏜 최루탄에 맞아 의식 불명에 빠집니다. 그 이후 전두환 군부 독재에 대한 비판과 민주화에 대한 요구는 더욱 커졌고 수십만 명의 시민들은 6월 10일 전국 주요 도시에 모여 호헌 철폐와 독재 타도를 외치며 시위를 합니다. 시위 도중에 명동성당에 피신한 사람들을 강제 연행하려고 하자 김수환 추기경은 “나와 신부들과 수녀들을 모두 밟고 지나가야 학생들을 데려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목숨을 걸고 학생을 지켜줄 것이라고 말합니다.
“경찰이 성당에 들어오면 제밀 먼저 나를 만나게 될 것입니다. 그다음 시한부 농성 중인 신부들을 보게 될 것입니다. 또 그 신부들 뒤에는 수녀들이 있습니다. 당신들이 찾는 학생들은 수녀들 뒤에 있습니다. 학생들을 체포하려거든 나를 밟고, 그다음 신부와 수녀들을 밟고 지나가십시오.”라고 합니다. 명동성당을 에워싸고 있던 경찰병력은 6월 14일 밤에 철수합니다.
그 이후 전두환은 국민의 민주화 요구에 굴복하여 여당 대통령 후보인 노태우를 통해 대통령 직선제 개헌, 기본권 보장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 민주화 선언을 발표합니다. 이에 따라 5년 단임의 대통령 직선제를 핵심으로 하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졌고, 국민이 직접 대통령을 선출합니다.
87년 민주화 항쟁의 가운데서 민주주의를 지키고 인간의 존엄성과 정의를 지키는 큰 역할을 한 용기는 어두운 시대를 지키는 종교인의 진정한 양심이었습니다. 저는 김수환 추기경의 이러한 선지자적 용기를 진심으로 존경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