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케의 눈물과 생각의 균형
왜 중용이 어려운가?
균형을 잃어버리고 기울어진 저울 한가운데 서는 게 중용이 아니다.
저울이 왜 기울어졌는지 치열하게 살펴보고 기울어진 이유를 묻고 따져서
기울어진 것을 바로 잡는 것이 중용이다.
중용은 양시양비를 거부한다.
양시양비를 하면서 절충하는 것은
두 주장의 중간에서 기계적인 중립과 산술적인 균형이다.
이러한 산술적 균형은 중용이 아니다.
조국 교수 <디케의 눈물>과 메르의 <1%를 읽는 힘>을 읽으며 중용의 의미를 생각했다.
조국 교수는 중용에 관하여 “약자를 고려하는 균형”이라고 했다.
고통과 불평등을 직시하고 기계적 산술적 중간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고
양비론과 양시론을 펴고 타협을 하는 것이 아니라 지적한다.
조국 교수는 중용의 중을 ‘정확함’이라 말하며
현실의 부정의와 부당함을 직시하고 그것을 고쳐 최상 최적의 현실을 만들기 위해
부단히 고민하고 행동하는 심성과 자세를 뜻한다고 말한다.
또한 순자의 “겸진물이중현형(兼陳萬物而重縣衡)
만물을 다 같이 늘어놓고 곧고 바름을 재고 헤아리는 것”이라고 했다.
정의의 여신 디케가 들고 있는 저울추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현실과 상황 속에서
절망하는 많은 사람들의 눈물.
악성민원으로 죽음을 택하는 교사,
어두운 뒷골목에서 생계를 고민하며 극단적 선택을 생각하는 수많은 노동자와 소상공인
자식을 잃고 진실을 규명하려고 하루하루를 고통 속에서 신음하는 사람들.
조국교수는 디케의 눈물에 관하여
“폭압적인 법권력에 의해 신음하며 흘리는 ‘분노의 눈물’과,
그러한 압력에 맞서면서도 주변의 아픔을 살피며
‘연민의 눈물’을 동시에 흘리고 있는 우리 사회의 자화상을 뜻한다.”라고 했다.
헌법과 법률에 따라 다스리는 법치가 사라지고
힘과 억압만 가득한 무법천지가 되고 있다.
메르는 <1%를 읽는 힘>에서 보는 법을 연습하라며 이렇게 말한다.
“같은 사실도 시각에 따라 해석이 달라질 수 있다.
서로 다른 두 주장의 중간을 선택하는 ‘산술적 균형’이 아니라
내 생각을 정하는 ‘생각의 균형’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군자는 중용을 지키고 소인은 중용에 반하는 행동을 한다.
仲尼ㅣ曰 君子는中庸이오 小人은反中庸이니라
중니ㅣ왈 군자는 중용이 오 소인은반중용이니라
군자의 중용은 군자로써 때에 맞음이오 소인의 중용은 소인으로써 거리낌 없는 것이다.
君子之中庸也는 君子而時中이오 小人之中庸也는 小人而無忌憚也니라
군자지중용야는 군자이시중이오 소인지 중용야는 소인이무기탄야니라.
‘중용(中庸’)의 ‘중(中)’은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않는 것이고 시의적절한 것을 말한다.
용(庸)은 늘 사용하여 한결같아서 끊어지지 않는 덕을 말한다.
마음의 평온함을 유지하여 감정에 휘둘리지 않고 지나친 생각도 하지 않고
생각의 균형으로 가장 적절하고 적확한 것이 중(中)이다.
또한 선입견과 편견, 고정관념, 확증편향, 인지부조화 없이
한결같은 마음으로 중을 지키고 오래도록 변함없이 중을 실행하는 것이 용(庸)이다.
산술적 균형, 양시양비를 넘어
곧고 바름을 재고 헤아려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
진정한 중용의 의미다.
인기는 인격을 바탕으로 할 때 저절로 빛이 나며
반짝반짝 빛나되 번쩍거리지 않고
힘이 있으나 힘을 자랑하지 않으며
당당하지만 오만하지 않는 것이 중용의 아름다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