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심 없는 시대
1. 양심에 관하여 깊이 생각하여 말한 사람은 맹자입니다. 맹자는 양심(良心)을 양지(良知)와 양능(良能)으로 구분하여 말합니다. 양지는 배우지 않아도 알 수 있다는 것이고, 양능은 배우지 않아도 할 수 있는 것을 말합니다. 양지는 상식적으로 아는 것을 말하고, 양능은 이러한 양심을 실천하는 능력을 말합니다. 서양에서도 양심은 ‘conscience’라고 했습니다. 모두가 아는 과학적 상식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동서양이 비슷한 정의를 하고 있습니다.
양심에 관하여 맹자 진심장에서 맹자는 이렇게 말합니다.
“사람이 배우지 않고도 잘할 수 있는 것을 타고난 능력(良能)이라고 한다. 생각하지 않아도 아는 것을 타고난 지능(良知)이라고 한다. 두세 살짜리 어린아이도 자기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며, 자라면서 자기 형을 공경할 줄 안다. 어버이를 사랑하는 것은 인(仁)이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은 의(義)이다. 이렇게 할 수 있는 것은 다름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인과 의를 달성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타고난 본성에는 양심이 있습니다. 양심에는 타고난 지혜와 능력이 있습니다. 어린아이는 타고난 지혜와 능력이 있다고 했는데 이는 사람마디 지니고 있는 상식을 말합니다. 상식은 누구나 알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이 상식은 태어날 때부터 지니고 있는 본성입니다. 자신의 양심을 지키고 누구나 어질고 옳은 언행을 할 수 있습니다.
맹자는 양심을 잃어버린 후 찾아서 기르지 않는 것을 안타까워합니다.
“자기의 양심을 잃어버리는 것은 도끼로 나무를 베어 버리는 것과 같다. 날마다 도끼로 나무를 찍어 없애는데, 어떻게 아름다워질 수가 있겠는가? 낮과 밤에 양심이 자라나고 아침에는 기운이 나서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남들과 서로 같아서 마음이 다른 사람이 드물다. 낮에 한 행동이 양심을 구속하거나 양심을 잃어버리게 하는 것이 있다. 양심을 구속하는 일이 거듭되면 밤에 기른 양심을 온전하게 보존할 수 없다. 이렇게 되면 사람은 짐승과 다른 것이 없다. 사람들은 짐승과 같은 자를 보고 그에게는 본래부터 선한 일을 할 수 있는 본바탕이 없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찌 그 사람이 가진 본래의 성정이 그렇겠는가?”라고 했습니다.
방심(放心)은 마음을 놓는 것을 말하고 조심(操心)은 마음을 잡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잃어버린 마음, 잃어버린 양심을 잡아야 하는데 방심해서 놓쳐버린다는 이야기입니다. 사람도 자신의 마음을 다잡지 않으면 선한 마음을 잃어버립니다. 자신의 선한 마음인 양심을 잃어버리면 착한 마음을 발휘할 수 없고 양심을 구속해도 본성을 발휘할 수 없습니다. 마음을 잡고 좋은 마음인 양심을 보존하고 실현해야 사람다운 사람입니다.
맹자가 말합니다.
“사람은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어서는 안 된다. 부끄러워하는 마음이 없는 것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양심이란 부끄러움을 아는 것입니다. 부끄러움은 자기를 돌이켜 보고 옳지 않은 행동과 바르지 않은 마음을 성찰할 때 생깁니다. 성찰은 건강한 자아를 갖게 하고 어른이 되게 하는 힘입니다. 부끄러울 치(恥)라는 글자는 스스로 내면을 돌아보고 마음의 소리를 듣는 것입니다. 자신의 언행과 마음을 성찰하면서 후회되고 부끄러운 것이 없는지 살펴보아야 합니다. 예의와 염치가 없고 부끄러움을 모르는 사람을 뻔뻔하다고 말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양심이 없고 건강한 자아를 상실한 사람입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들은 타인에게 고통을 줍니다. 타인에게 아픔을 주더라도 자신의 잘못을 모르거나 남 탓을 합니다.
양심이 없는 사람을 비양심이라 하고, 이러한 사람은 상식이 없기 때문에 무식하다고 하고, 아예 상식을 잃어버렸기 때문에 몰상식하다고 합니다.
2. 심리학자 김태형은 양심은 도덕 감정과 도덕의식이라고 말합니다. <새로 쓴 심리학>에 나오는 양심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양심이란 사람이 도덕적 원칙과 규범에 맞게 행동하도록 조절 통제하는 도덕 감정과 도덕의식의 총체이다. 양심은 자기 행동의 결과나 과정 동기에 대한 자각에 기초해 자신을 스스로 평가하도록 이끈다. 즉 도덕규범을 준수했는지 마음속에 못된 것은 없는지 스스로 평가하고 검열하는 것이다. 양심의 욕구가 실현되면 사람들은 자부심과 만족감 뿌듯함 등을 느끼지만 그것이 좌절될 경우에는 수치심 죄책감 후회의 감정 등을 체험한다.
양심을 구성하는 것은 우선 도덕 감정이다. 도덕 감정은 또한 공감 능력과 관련된다. 공감이란 다른 사람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며 공감 능력이란 타인의 기쁜 감정이나 고통스러운 감정을 이해하고 자신도 그것을 느낄 수 있는 능력이다. 공감 능력은 무엇보다도 자신의 감정이 잘 발달하고 그것을 섬세하게 느끼는 능력이 정상적으로 발달해야 한다. 공감 능력은 대인관계를 통해 얻는 민감한 사회적 감수성과 상호작용 능력이 추가되면 우수한 공감력을 갖출 수 있다. 도덕 감정은 착한 생각이나 행동하면 긍정적인 감정으로 보답하고 나쁜 생각이나 행동하면 고통스러운 감정으로 응징하는 역할을 한다. 유전적으로 전해지는 공감 능력의 존재를 부정한다고 하더라도 도덕 감정으로서의 양심은 정상인이라면 모두가 가지고 있으므로 그 누구도 죄를 짓고는 마음 편하게 잠을 자기는 힘들다. 만약 천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바로 이를 두고 하는 말이다.
양심을 구성하는 것 또한 도덕의식이다. 도덕의식이란 올바른 신념과 추상적 판단 능력 등에 기초해 내면화된 도덕적 원리를 말한다. 도덕 감정 하나만으로도 양심은 상당히 훌륭한 인과응보적 기능을 수행하지만 복잡한 사회가 정상적으로 유지되고 발전하기 위해서는 도덕의식이 필요하다. 이는 보편성과 특수성을 가진다. 보편적인 도덕의식이란 시대를 초월해 인류의 거의 모든 문화적 공통으로 나타나는 도덕 원리나 규범들을 말한다. 이런 보편적인 도덕의식에는 뿌리 깊은 도덕 감정에 기초해 형성된 것들이 많다. 어떤 규범을 어길 때면 예외 없이 심한 마음의 고통이 유발되는 뿌리 깊은 도덕 감정에 기초해 형성된 것들이 포함된다. 살인범을 괴롭히는 것은 체포될지도 모른다는 불안함이 아니라 살인 행위에 대한 극심한 고통이라고 한다. 보편적 도덕의식에는 또한 기나긴 인류 역사를 통해서 확고히 정착되어 이제는 그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도덕적 원리와 규범들이 포함된다.
도덕의식은 보편성이 있지만 그것은 또 한 시대나 사회제도 등에 따른 특수성도 가진다. 우선 도덕의식은 시대에 따라 그 내용이 달라진다. 노예제도 시대의 도덕 봉건제 시대의 도덕 자본주의 시대의 도덕은 각기 다르다. 즉 노예제 시대에 사람을 노예로 소유하거나 봉건제 시대에 사람을 신분적으로 차별하더라도 도덕적으로 문제가 되지 않지만 자본주의 사회에서 그것은 심각한 비도덕적 행위로 된다. 도덕의식은 또한 사회제도에 따라 달라진다. 물론 동일한 사회제도라 하더라도 사회계급적 처지에 따라 또 구성원들은 다른 도덕의식을 가질 수 있다. 사회적 계급적 처지에 따라 사회 구성원들이 서로 다른 도덕의식을 가질 수는 있으나 대개는 지배 계급의 도덕이 해당 사회를 지배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 사회처럼 지배계급인 자본가들이 개인 이기주의를 노골적으로 권장하는 사회에서는 도덕도 개인 이기주의적인 성격을 띤다. 따라서 사회제도가 다르면 도덕의식이 달라질 수 있다. 도덕의식은 개인적으로도 차이가 난다. 개인마다 사상이나 신념 가치관 등이 다르기 때문이다.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과 보수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의 약자에 대한 도덕 기준 또한 분명히 다를 것이다.
양심은 도덕 감정과 도덕의식의 통일로 구성되어 있다. 도덕의식은 도덕 감정에 기초해 발생하고 발달하며 도덕 감정은 도덕의식에 의해 현실성을 가지게 되고 구체화하며 견고해진다. 양심적 욕구를 실현하면 사람들은 자부심을 갖게 된다. 반면에 양심적 욕구가 좌절되면 사람들은 죄의식과 죄책감을 가진다. 하지만 죄의식을 치료하는 약은 반성뿐인데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 미국인과 일본인은 뿌리 깊은 무의식적 죄의식과 불안도 이와 관련 있다. 미국인은 인디언 학살과 흑인노예 착취, 무수히 자행한 제국주의 침략 행위를 반성하지 않았다. 일본도 임진왜란, 20세기 아시아 지역에 대한 침략과 야만적 행위를 반성하지 않았다.
3. 양심이 없는 사람은 도덕감정과 도덕의식이 없기 때문에 무식하고 몰상식하며 무례하고 예의염치가 없어서 뻔뻔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반성하지 않고 건강한 자아를 가지 있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 사회의 권력을 진 자들은 정말 양심 없는 뻔뻔한 놈들입니다. 양심 없는 자들이 심판을 하면 나라가 엉망진창이 됩니다. 법원의 판결을 존중하는 이유는 양심에 맞고 헌법과 법률에 따른 판결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판결을 보면 너무 상식에 맞지 않거나 판사의 주관적 신념에 따라 좌우되는 것이 많습니다.
김상수 작가는 “양심이란 극히 추상의 주관의 개개인의 척도가 사회 법의 척도일 수는 없다. ‘양심에 따라’라는 추상의 표현은 문제의 소지가 많은 것이다. 헌법 13조는 바뀌어야 한다.”라고 말합니다. “헌법 제103조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의하여 그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한다.’에서 ‘법관의 양심’이 큰 문제다. 명확하게 잘못된 판결을 하고도 ‘양심에 따랐다’라고 강변하면, 판결 문제를 지적하기가 어렵다. ‘양심 자체가 불량’이면 속수무책이다.”라고 지적합니다. 정확한 인식을 바탕으로 구체적이고 사실적 판단해야 하는데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단어를 사용하여 주관적 판단을 하는 경우에 많은 오류를 범합니다. 법관은 헌법과 법률에 따라 심판해야 하는데 양심에 따른다는 것은 판사의 재량권을 지나치게 부여하여 상식에 맞지 않는 판결을 한다는 것입니다.
학자, 지식인, 언론인, 법조인, 정치인 더욱더 양심을 지키고 사회적 책임을 져야 합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양심을 버리고 예의와 염치를 버리면 사회는 더욱더 혼란스럽습니다. 양심을 지키서 해야 할 것을 하는 것이 용기이고 양심에 반하는 것을 하지 않는 것도 용기입니다. 그래서 행동하는 양심에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진정으로 용기가 있는 사람은 예의와 염치를 지키고 양심에 따라 행동하는 사람입니다. 이제 불의를 물리치기 위한 행동하는 양심이 필요한 시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