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와 이타보다 이로움과 해로움으로 이해해야
1. 인간은 이기적인가 이타적인가 논쟁을 하면 끝이 없습니다.
틀린 질문은 잘못된 답을 내놓기 때문입니다.
또한 단어 선정을 잘해야 서로 오해가 없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이로움을 추구하는가 해로움을 추구하는가” 물어야 바른 질문입니다.
인간은 이기적이고 이타적입니다.
인간은 이로운 유전자와 해로운 유전자가 있는데 이로운 유전자로 진화했다 설명하면
인간을 좀 더 잘 이해하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2. 인간의 이기적 속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찰스 다윈의 자연선택을 오용하거나 스펜서의 적자생존론 강조합니다.
1859년 찰스 다윈이 <종의 기원>을 통해 발표한 ‘생물진화론’에 입각하여
허버트 스펜서가 사회진화론을 확립합니다.
그 후 19세기말부터 유행하여 우생학이 되어 인종차별주의나 파시즘, 나치즘을 옹호하는 근거가 되었고
20세기 초 제국주의 논리를 정당화했고,
20세기말에는 신자유주의와 약육강식 자본주의 시장경제 논리의 근거를 삼기도 했습니다.
홉스의 만인대 만인의 투쟁에서 보는 성악설과 이기주의를 맹목적으로 이해합니다.
하지만 1651년의 절대왕정 상황에서 지적한 홉스의 견해는 오늘날에는 맞지 않습니다.
아담 스미스의 합리적 선택과 이윤추구를 정당화하는 경제 원칙을 중시합니다.
1776년 펴낸 국부론에서 그는 시장 경제가 개인의 이기심을 통해 사회적 번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주장하지만, 그 이전인 1759년에 펴낸 <도덕감정론>에서는 인간의 이기심은 공감과 도덕적 판단에 의해 조절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공감과 인의의 덕, 그리고 정의를 바탕으로 국부를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3. 또한 이기적 속성을 강조하는 사람들은 1976년에 간행한 리처드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를 근거로 들어 인간은 이기주의라는 결론을 강조합니다.
도킨스는 인간은 유전자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는 자연계의 생활 조건에 적합한 생물체만 자연선택을 받아 생존한다고 여깁니다.
집단선택설은 개체가 종 전체를 위해 희생한다고 여기고
개체선택설은 종 전체보다 자기 종의 이익만 위한다고 여깁니다.
도킨스는 유전자 선택설을 말합니다.
유전자는 자기 복제를 통해 유전자를 존속시킨다는 입장입니다.
하지만 인간은 유전자를 따르기도 하지만 ‘밈’에 따라 유전자의 이기성을 극복한다고 합니다.
최정규의 <이타적 인간의 출현>은 인간의 이타성을 긍정합니다.
한 개인은 개체의 입장에서 이기적 전략이 자신에게 유리할 수 있지만
공동체 전체는 종의 입장에서 이타적일 때 더 유리합니다.
딜레마게임과 최후통첩 게임이론도 단기적이고 개체를 중시할 때 이기적 선택을 하지만
장기적이고 공동체를 위할 때는 이타적 선택을 하고 내쉬균형(상호이익)을 선택한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사람은 이기적인 면과 이타적인 면을 동시에 갖고 살아갑니다.
하지만 사람들 중에는 이기적인 면만 강조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4. 뉴라이트의 핵심 인물인 안병직과 이영훈은 인간을 이기적 존재로 규정합니다.
이들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뉴라이트 세력은 이기적인 인간의 특성을 부각하려 합니다.
자신들의 배신과 부왜역적 행위를 정당화하고, 일본의 나쁜 짓을 옳다고 여깁니다.
우리 민족에게 해롭고 일본에 이로운 것을 옳다고 여기는 뉴라이트는 말종입니다.
수많은 사람에게 해롭게 한 이승만을 옳다고 여기는 놈들이 뉴라이트입니다.
이승만이 6·25 때 서울을 사수하겠다는 녹음테이프를 생방송처럼 틀게 하고
자신은 대전으로 가장 먼저 도망치고 한강 다리를 끊어 수많은 사람의 생명을 죽게 했는데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라고 하는 얼빠진 놈들입니다.
뉴라이트는 이기주의를 부각하는 이유는 자신들의 이기주의 속성을 합리화합니다.
시장경제의 자유를 합리화하고 규제완화, 민명화를 추진하여 이윤극대화를 꾀합니다.
부유층과 고소득층 감세를 추구하여 자신들의 이익을 더 늘리기 위해 노력합니다.
5. 자본주의와 신자유주의를 합리화하고 인간은 경제적 동물(호모 이코노미쿠스)이라고 강조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경제적 동물만 강조하는 생각에는 한계가 때문에 '이기성'과 '이기주의'를 구분해야 합니다.
인간은 이기적으로만 행동하지 않고 이타적으로 행동하기도 하는데 이러한 이타적 행위마저 이기적인 동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하고 합니다.
한비자가 말한 ‘인성호리(人性好利)’론은 인간의 본성에 가깝기 때문에 인정합니다.
이러한 본성을 '이기성'이기 때문에 부인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개인의 이기성이 서로 대립할 때 나에게만 유리한 것을 택하는 것을 ‘이기주의’라 합니다.
이기주의는 오로지 자신의 이익만 위하하는 것으로 공동체에 해로운 것입니다.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유는 지나친 이기주의 때문입니다.
인간은 자신에게 이로운 것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것은 이기성을 나쁘다고 할 수 없습니다.
성숙한 인간은 자신의 이익 추구가 옳은지 옳지 않은지 생각하기 때문에 이기주의로 살아가지 않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를 살아가며 나의 이익을 추구하지 않으면 나만 손해라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습니다.
눈앞에 작은 이익에 눈이 멀어 이기주의로 행동하거나 올바른 선택을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큰 손해를 봅니다.
남을 해롭게 하는 말과 행동을 하지 말고, 우리 모두에게 이로운 언행을 해야 하는게 상식입니다.
6. 결론을 말하면 이기적 유전자와 이타적 유전자로 대립시켜 이해하지 말고
이로운 유전자와 해로운 유전자의 대립으로 설정하고 이해를 하는 것이 적절합니다.
생각을 이분법으로 단정하면 명쾌함이 있지만 명쾌하다고 옳은 것은 아닙니다.
무질서와 질서 사이에 존재하는 복잡계가 있듯
우리의 인식과 지식, 감정 등은 명확하게 구분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이러한 전제하에 사람을 이해하려고 하면 조금 쉽게 이해가 됩니다.
선(善)과 악(惡) 사이에는 불선(不善)과 위선(僞善)이 있고 위악(僞惡)이 있습니다.
이기의 반대는 이타가 아니라 해악(害惡)입니다.
인간의 유전자는 해로운 유전자에서 이로운 유전자로 진화했습니다.
자기만을 위하는 해로운 유전자는 공동체에서 왕따를 당하기 때문에 퇴화하고
우리 모두를 위하는 이로운 유전자는 진화했습니다.
즉 인간은 생물학적 존재를 넘어 사회적 존재로 진화한 것입니다.
물론 이로운과 해로운 사이에도 다양한 말이 존재합니다.
이로운 이(利)와 해로운 해(害) 사이에도 위기(爲己), 이기(利己) 자리이타(自利利他) 이타(利他)가 있습니다.
7. 이로움은 생물학적 이로움, 나의 이로움, 타인의 이로움이 있고 물질적 이로움과 정신적 이로움도 있습니다. 정신적 이로움은 양심에 따라 도덕감정과 도덕인식을 가지고 생각과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양심은 자존감에서 비롯됩니다. 손해를 보더라도 옳고 바른 것을 지키고, 그 결과를 보람과 긍지로 여기며 삶의 가치와 의미를 부여하는 것입니다.
해로움은 독선, 독단, 독재입니다. 나에게만 이로움을 추구하는 이기주의도 해로운 것입니다.
본능만 따르고 쾌락만 추구하는 것도 해로움입니다.
저의 부친이 했던 가장 심한 욕은 ‘인종지해말자’였습니다.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최고 악인, 말종(末種)을 가리킵니다.
8. 인간은 유전자를 담는 그릇에 불과하지만 공동체에 이로운 선택을 하면서 진화했습니다.
자연선택만 강조하는 이기주의를 극복하고 나와 공동체에 이로운 선택을 해야 사회가 진화합니다.
안세영 선수처럼 자기 손해를 감수하고 잘못된 관습과 관례를 지적하고
그릇된 것을 ‘의리’로 포장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지적해야 사회가 진보합니다.
나 때는 그래도 괜찮았다는 꼰대적 사고는 이기주의입니다.
자기 것도 챙길 줄 알아야 하지만 남을 챙길 줄도 알아야 조금 더 살만한 삶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