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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대왕, 정조대왕, 연암의 공통점은?]

by 백승호

지금 여기, 자주적 학문과 사상의 길

조선의 임금 가운데 자주적이고 주체성이 강한 인물로 세종과 정조를 들 수 있다. 이 두 임금을 후세가 대왕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들이 중국 중심의 역사와 문화에서 벗어나 배달겨레만의 독자적 문화와 역사를 세우고자 했기 때문이다. 세종대왕은 1443년(세종 25년)에 우리말을 적을 수 있는 문자인 한글을 창제하였다. 「훈민정음」 서문에서 “우리나라의 말이 중국말과 달라 중국 글자로는 적을 수 없다”라고 밝히며, 백성이 뜻을 펴지 못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하여 스물여덟 글자를 만들었다고 했다. 일부는 중국 글자와 다르다는 인식이 그리 중요한가 반문한다. 그러나 바로 이러한 자각이 있어야만 독자적인 문자를 만들겠다는 결단이 가능했고, 백성이 뜻을 펼 수 있는 길을 열 수 있었던 것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창제한 334년 이후에 정조대왕이 즉위를 한다. 정조(1752~1800)는 1777년에 왕이 된다. 정조는 규장각(奎章閣)을 만들어 인재를 길렀고, 그들을 등용하여 <조선학>을 펼쳤다. 정조시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조선학을 펼친 사람은 안정복(安鼎福 1712~1791), 박지원(朴趾源 1739~1836), 박제가(朴齊家1750~1805) 유득공(柳得恭1748~1807), 이덕무(李德懋1741~1793) 이서구(李書九1754~1825), 정약용(丁若鏞 1762~1836) 등이었다. 안정복은 <동사강목>이라는 한국의 역사책을 지었고, 박지원은 <열하일기>를 지었다. 열하일기는 조선 최고의 문장이었고,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인식을 하게 한 최고의 서적이다.


특히 박지원은 「연암집」의 〈좌소산인에게 주는 글(與左蘇山人)〉*에서 다음과 같이 자주적 학문 태도를 천명했다.

지금 눈앞의 일에 참된 취지가 있는데 (卽事有眞趣)

하필이면 먼 옛것에서 취해야 하나 (何必遠古抯)

한나라 당나라는 지금의 세상이 아니고 (漢唐非今世)

우리 풍속과 노래는 중국과 다르다 (風謠異諸夏)

반고(班固)나 사마천(司馬遷)이 다시 태어난다 해도 (班馬若再起)

반고나 사마천을 결단코 배우지 않을 것이네 (決不學班馬)

새 글자는 창조하기 어렵더라도 (新字雖難刱)

내 생각은 마땅히 다 써야 할 텐데 (我臆宜盡寫)

어찌 무엇하여 옛 법에 구속되어 (奈何拘古法)

허겁지겁 붙잡고 매달리겠는가 (刦刦類係把)

‘지금 여기’를 비천하다고 이르지 마오 (莫謂今時近)

천년 뒤에 비한다면 마땅히 고귀할 것이네 (應高千載下)

정조는 「열하일기」의 문체가 순정하지 않다고 지적하면서도, 그 사상과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정신, 자주적 태도는 인정했다. 문체반정은 연암의 사상을 부정하려 한 것이 아니라, 개혁 반대 세력을 의식한 정치적 조치였던 것이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박제가는 「북학의」로 실학의 본질을 정리했고, 유득공은 「발해고」에서 발해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임을 주장하며 우리 역사에 대한 시야를 넓혔다. 정약용 또한 주자학을 맹목적으로 따르지 않고 비판적 시각으로 사서를 재해석하였다. 이들은 모두 자주적, 주체적 학문으로 민족의 자긍심을 북돋우려 했다.

그러나 우리의 학문과 정신은 한문이라는 외래 문자와 사마천의 「사기」 등 중국 중심 역사관에 갇혀 침탈당했다. 김수업 선생은 사마천의 「사기」를 ‘사기(詐欺, 기만)’라고 비판하며, 한족 중심의 역사가 어떻게 우리 역사를 왜곡했는지 지적했다. 갑골문자의 기원과 그 변천은 진시황의 ‘분서갱유’로 말살되었고, 한나라 무제는 고조선을 멸망시킨 뒤 우리 역사를 한족 중심 서사로 편입시켰다. 이후 사마천은 동북아 역사를 한족의 것으로 서술하여 동북공정의 뿌리를 만들었다.


우리는 고조선·고구려·발해로 이어지는 북녘의 역사와 신라·고려·조선으로 이어지는 남녘의 역사를 아울러 배달겨레의 정통사를 세워야 했다. 그러나 스스로를 낮추고 중국 중심 역사관에 빠진 탓에 일본의 침략에도, 오늘날 중국의 동북공정에도 무기력할 수밖에 없었다. 김수업 선생은 이를 자기 스스로를 업신여기는 몹쓸 병이라 비판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여기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자주적이고 주체적인 사상을 바탕으로 우리의 학문을 가꾸어야 한다. 세종과 정조의 정신, 연암과 다산의 정신을 이어받아 우리만의 독자적 문화와 역사를 재정립하고 세계 속의 민족적 자존을 세워 나가야 한다. 지금 여기에서 주체적 학문과 사상을 확립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또다시 과거의 굴레에 갇히고 말 것이다. 조나라 사람의 걸음걸이를 흉내 내려다 오히려 제 본래의 걸음마저 잃고 엉금엉금 기어갔다는 저 연나라 소년의 ‘한단학보邯鄲學步’가 되어서는 안 된다. 우리 학문이 단순한 모방이나 흉내가 아니라, 스스로의 정신과 자주적이며 주체적인 “지금 여기”의 학문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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