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완의 일상에 건네는 따뜻한 위로와 부드러운 힘의 복원
나이가 드니 잔잔한 드라마에 눈길이 갑니다. 사실 ‘이 드라마가 인생드라마’라고 말했다가 돌아서면 또 다른 인생드라마가 다가옵니다. 우리나라 작가들이 대단한 것인지, 아니면 내가 잘 빠져 드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오랜만에 참 좋은 드라마를 보았습니다. 바로 이강 작가가 4년 만에 선보인 신작, 『미지의 서울』입니다. 드라마는 “어제는 끝났고, 내일은 멀었고, 오늘은 아직 모른다”는 말로 시작합니다. 이 짧고도 인상 깊은 문장은, 예측할 수 없는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대한 진실을 조용히 건넵니다. 『미지의 서울』은 겉으로는 멀쩡해 보이지만 속으로는 이미 지치고 흔들리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단순한 도시의 풍경이나 사건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 우리가 살아가는 ‘미지의 서울’을 통해 ‘우리의 삶’을 그려낸 작품입니다.
1. ‘겉과 속’ 사이, 경계에서 살아가는 경계인들의 일상
작가 이강은 이 작품에 대해 “겉보기엔 무탈하지만, 이미 자신 안에서부터 흔들리고 지쳐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말합니다. 현대 사회에서 누구나 겉으로는 평온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속은 늘 복잡하고 고단합니다. 드라마는 바로 이 ‘겉과 속’의 사이에 살아가는 우리 삶을 다루고 있습니다.
드라마 속 인물들은 모두가 자신만의 미지를 품고 있습니다. 외형상 비슷해 보일 수 있지만, 고통의 결은 저마다 다르고, 아픔의 방향도 서로 다릅니다. “나와 똑같이 생긴 쌍둥이가 나를 대신해 줬으면 좋겠다”는 상상에서 출발한 이야기는, 결국 ‘타인의 삶이 과연 더 나을까?’라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시청자 역시 이 질문에 고개를 끄덕이게 됩니다. 각자의 인생은 그 자체로 전쟁이고, 상처와 싸우는 형식은 다르지만, 모두가 싸우고 있다는 사실은 같다는 깨달음이 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미지의 서울』은 이처럼 누구나 감추고 있는 ‘속마음’을 부드럽게 드러내며, 시청자에게 더 깊은 공감과 위로를 건넵니다.
2. 미지의 오늘, 예측 불가능한 의외의 삶을 받아들이는 태도
“오늘은 아직 모른다.” 이 말은 단지 하루의 불확실함을 넘어, 삶 전체에 대한 태도를 말해줍니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계획대로만 살아지지 않습니다. 뜻밖의 일, 의외성에서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합니다. 예상치 못한 감정, 그리고 갑작스러운 변화들이 일상을 채워나갑니다.
이강 작가는 이 불확실함, ‘미지’의 세계를 회피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안에서 사람들 간의 연대와 마음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포착합니다. 드라마는 ‘완성된 오늘’이 아니라, 아직 쓰이지 않은 오늘, 계속 써 내려가야 하는 오늘의 가능성에 주목합니다. 그렇기에 『미지의 서울』은 불안한 현실에 작은 희망을 건넵니다.
우리는 완벽하지 않아도, 정답을 몰라도 괜찮습니다. 그저 매일을 살아내는 것, 그 자체가 의미이자 가치라는 사실을 이 드라마는 조용히 알려줍니다.
3. 부드러움의 힘, 가장 단단한 것을 꿰뚫다
드라마 속에는 노자의 말이 떠오르는 장면들이 많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것은 세상에서 가장 단단한 것을 이깁니다. 형체 없는 것이 틈 없는 곳에도 들어갈 수 있습니다.”
<노자 43장>
天下之至柔, 馳騁天下之至堅。無有入無間, 吾是以知無爲之有益。不言之教, 無爲之益, 天下希及之。
천하지지유, 치빙천하지지견. 무유입무간, 오시이지무위지유익. 불언지교, 무위지익, 천하지급지.
하늘아래 가장 부드러운 것이, 하늘아래 가장 단단단 것을 앞달리고 또 제어한다.
사이가 없는 곳에까지라도 아니 들어감이 없다. 나는 이로써 무의의 유익함을 한다. 말하지 아니 하는 가르침,
함이 없음의 이로움. 하늘 아래 누가 이에 미칠 수 있으리오.
김용옥 <노자가 옳았다> 349쪽
우리는 흔히 강한 것이 약한 것을 지배한다고 생각하지만, 현실은 종종 그 반대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연암 박지원의 <상기>에는 코끼리는 쥐를 무서워한다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마치 사자는 모기를 두려워하고, 물소는 거머리에 당황합니다. 세상은 모든 것이 상대적이고 부드러운 것이 강한 것에 이깁니다. 법정 스님의 수필 <설해목>처럼 강한 비바람이 아니라 눈이 나무를 해치기도 합니다. 부드러운 물결이 조약돌을 만들듯 드라마는 이와 같이, ‘강함’보다는 ‘부드러움’의 힘에 주목합니다.
실제로 작품 속 인물들은 윽박지르기보다, 상처를 감싸 안고 조용히 위로합니다. 억지로 드세지 않아도, 억센 척하지 않아도 사람은 충분히 단단해질 수 있습니다. 이런 부드러움은 어느새 사람과 사람 사이에 따뜻한 온기를 만들어냅니다.
『미지의 서울』은 바로 그 따뜻함을 이야기합니다. 강요된 강함이 아니라, 다정한 시선과 연민으로 서로를 지켜보는 태도, 그것이야말로 오늘의 서울을 살아내는 진짜 힘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4. ‘미지의 서울’에서 ‘나의 서울’로: 삶을 주도하는 존재로 거듭나기
드라마의 마지막, 타이틀이 ‘미지의 서울 OUR UNWRITTEN SEOUL’에서 ‘나의 서울 OUR WRITTEN SEOUL’로 바뀌는 장면은 이 작품의 진정한 완성입니다. 처음에는 알 수 없고 미완의 공간이었던 서울이, 마침내 나 자신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내 공간’으로 변화하는 순간입니다.
이 장면은 한 문장으로 정리됩니다.
“인생은 끝이 있는 책이 아니라, 내가 직접 채워야 할 노트라는 걸.”
『미지의 서울』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빈 페이지를 마주해도 그것은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는 것. 누군가 대신 써준 삶이 아니라, 나 스스로 한 줄씩 써 내려가는 것이 바로 ‘진짜 삶’이라는 것.
이 메시지는 위로이자 선언입니다. 비록 내일을 알 수 없어도, 우리는 오늘을 진심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 하루하루가 쌓여 결국 ‘내 이야기’, ‘나의 서울’을 만들어가는 것입니다.
5. 우리가 살아가는 이유, 그리고 드라마가 전하는 위로
『미지의 서울』은 단지 개인의 이야기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 사회 전체가 안고 있는 문제들을 함께 비추고 있습니다. 소외와 불신, 무관심이 만연한 도시 속에서 누군가의 손길, 눈빛, 말 한마디가 얼마나 따뜻한 위로가 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 드라마는 말합니다.
“누구나 자기 삶이 가장 힘들다고 느끼지만, 결국 우리는 모두 저마다의 싸움을 살아가는 중입니다.”
그렇기에 서로의 아픔을 이해하고 존중하며, 함께 걷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연대와 공감, 온기와 다정함이야말로 우리가 치열한 오늘을 이겨내는 진짜 힘이 됩니다.
『미지의 서울』은 우리에게 이렇게 묻는 듯합니다.
“당신의 서울은, 오늘 어떤 이야기를 쓰셨나요?”
어쩌면 우리는 여전히 ‘모르는’ 서울에 살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미지의 도시를 한 걸음씩 걸어가며, 뜻밖의 순간에서 웃음을 찾고, 예기치 않은 만남에서 위로를 얻고, 예상하지 못한 선택에서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삶은 늘 의외성으로 가득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의외성 속에서 우리는 가장 인간답고, 가장 행복하며, 가장 따뜻한 위로를 마주하게 됩니다. 오늘 하루 의외성을 즐기면서 더위를 견뎌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