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재의 본질에 관한 물음- 비슷한 것은 가짜다.
1. 박정민 배우는 성해나 작가의 소설집 『혼모노』에 대해 이렇게 추천했습니다.
“이 소설집은 ‘몰입’의 파티다. 영화로 만들고 싶은 작품들로 가득하다.
그만큼 매력적인 인물과 상황, 마음들이다.
한 사람으로 한 세상을 품는 글이다.
(...)
책이 나오면 꼭 이 문장을 적어 주변 감독님들에게 선물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이 소설집은 ‘몰입’의 파티다. 넷플릭스 왜 보냐, 성해나 책 보면 되는데.”
간결하면서도 강렬한 추천사입니다.
2. 지난 4월 18일, 창비서교빌딩 50주년 홀에서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 출간 기념 북토크가 박정민의 사회로 열렸습니다. 당시에는 윤석열 탄핵 정국으로 마음이 어지러워 책에 집중할 여유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정국이 다소 안정되며 일상의 리듬을 되찾고, 자연스레 책을 다시 집어 들게 되었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다시 읽고 해설하는 과정에서, ‘경계’와 ‘진짜와 가짜’라는 주제어에 사로잡혔고, 성해나 작가의 『혼모노』 역시 같은 화두를 건네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암의 문제의식과 성해나의 질문은 결국 우리 시대의 고민과도 맞닿아 있습니다.
3. 『혼모노』에 등장하는 가짜 무당 문수의 말은 묵직한 여운을 남깁니다.
“진짜는 아니지만, 그래도 진짜인 척은 해야 하지 않겠냐.”
이 말 앞에서 한참 눈길이 머뭅니다.
“가짜로라도 살아가는 삶은 정말 가치 없나?”
“진짜가 아니면 인간의 존엄도 함께 사라지는가?”
질문은 더 깊어집니다.
“진짜란 무엇이고, 그것은 정말 가짜의 반대편에 따로 존재하는가?”
진짜와 가짜에 대한 본질적 물음은 예나 지금이나 인간 존재를 둘러싼 가장 근원적인 고민입니다.
진짜는 아니지만 진짜인 척 살아가는 사람들,
진짜 뉴스인 듯하지만 가짜 뉴스가 범람하는 세상,
가짜 뉴스에 진실 한 스푼을 섞어 사람들을 홀리는 시대.
최근 논란이 된 강선우 성평등가족부 장관 후보자 관련 보도도 같은 질문을 던지게 합니다.
4. 이런 고민 속에 정민 교수의 『비슷한 것은 가짜다』를 다시 펼쳤습니다.
연암 박지원의 제자였던 16세 소년 이서구가 자신이 쓴 글을 모아 《녹천관집》이라 이름 짓고, 스승에게 서문을 부탁한 일화가 있습니다. 이에 연암이 쓴 〈녹천관집서〉는 ‘진짜와 가짜’, ‘닮음과 다름’에 대해 깊은 사유를 담고 있습니다.
거울, 물, 그림자, 그림 등 외형적 닮음을 예로 들며 연암은 이렇게 말합니다.
“비슷한 것은 진짜가 아니다. 그러니 비슷해지려 하지 마라.”
정민 교수는 이를 이렇게 해석합니다.
“모동심이(貌同心異)는 겉모습은 같지만 내용은 다른 경우이고, 심동모이(心同貌異)는 내용은 같지만 겉모습은 다른 경우다. 전자가 하급의 모방이라면 후자는 상급의 모방이다. 진정한 닮음은 껍데기에 있지 않다. 겉모습은 달라도 그 뜻과 정신이 같다면 그것이 진짜 닮음이다.”
문화가 가벼워질수록 겉모습만 흉내 내는 ‘모동심이’가 판을 치는 세상입니다.
5. 『혼모노』에서 성해나 작가가 던지는 메시지도 비슷합니다.
가짜 무당이지만 진정성 있는 삶을 살아가려는 문수의 이야기는,
“나는 누구인가? 나는 진짜인가?”라는 존재의 본질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작품 속에서 무당 문수와 신애기 사이의 첨예한 갈등은 ‘진짜와 가짜’라는 문제의식을 전면에 드러냅니다.
마지막 장면에서 두 사람이 칠성작두에 함께 오르는 장면은
각자가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려는 절박한 굿판입니다.
그 승부의 기준은 ‘누가 더 오래 버티는가’입니다.
이때 신애기는 문수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할멈이 넌 너무 늙었다네. 늙은 게 아니라 야심만 가득해 흉하다고.”
작가는 이 작품에서 진짜와 가짜의 이분법을 단정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경계 위에 선 인간의 불안과 의지를 응시합니다.
“진짜가 아니어도 괜찮다”는 긍정이 아니라,
“진짜가 아닌 것으로 오해받으며 살아가는 사람”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시도처럼 느껴집니다.
박정민 배우의 말처럼, “한 사람으로 한 세상을 품는” 그릇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요?
진짜와 가짜의 경계 위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많은 세상.
우리에게 필요한 건, '야심만 가득하여 흉한' 것이 아니라 맑은 마음으로 길한 것을 지향하고
외형이 아닌 내면의 진정성을 지향하는 진짜 삶을 살아가는 용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