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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Jan 07. 2024

#11. 근대교육의 역사

교육 잡설(雜說)

#11. 근대교육

     

   사람의 성격, 역량 등은 타고나는 걸까요? 만들어지는 걸까요? 여러분은 물론 답을 잘 알고 있습니다. 정답은 반반, 이거나 상황에 따라 달라지겠지요. DNA를 모르던 시절에는 인류에게 이것은 매우 흥미 있는 주제였습니다. 단순한 흥미를 넘어서 어쩌면 생존, 가문의 영속을 위해 반드시 답을 찾아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당연히 이 주제는 인류가 사회, 국가를 만들어 살아가는데 근간이 되는 질문이었습니다.     


    당연히 신분과 권력의 세습을 원했던 권력자와 종교인은 개인의 역량과 신체적 특징은 본래 타고난 것이거나 신의 의지로 주어진 것이라고 주장했고 많은 이론가는 그들의 주장에 근거를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를 본성, 천성 등의 말로 부르곤 했습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든 신분제도가 그랬고 세습제도가 그랬으며 재산 상속제도가 또한 이런 생각을 구체화시켰습니다. 이것은 한 번 만들어지면 세상이 두 쪽 나지 않는 이상은 절대로 바뀌지 않습니다. 새로운 체제로 이행하지 않는 이상 더욱 공고화되기만 할 뿐입니다. 가진 자들은 더 많은 것을 원하고 도시 인구 증가는 경쟁을 부추겼습니다. 신분의 벽을 허물고 공유하기보다 장벽을 쌓고 그들끼리 결속만 강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상황이 오래 지속되면 일반인도 현재 상태에 대해 자각합니다. 보통 사회가 안정되어서 본능을 어느 정도 충족하면 곧 자아실현 욕구가 고개를 드는 모양입니다. 최소한 본인의 자아실현은 늦었어도 자식은 현재 상황을 극복하게 하고 싶은 부모의 작은 욕심이 자리 잡게 됩니다. 이를 위해 재산과 능력을 쌓고 그들만의 연대로 성을 구축합니다. 새로운 계층이 만들어지는 과정입니다. 


    프랑스혁명 당시, 유럽의 귀족은 전체 인구의 3~5% 정도 수준이었다고 합니다. 부르주아 계급이 만들어지고 공고해지는 동안 귀족의 변화는 부족했습니다. 너무도 당연하게 새로운 계층의 성장은 또 다른 질서를 요구했습니다.     


   과거에는 상당한 사람들이 이러한 상황을 일반적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들에게 자유인이라는 개념은 너무나 동떨어진 개념이었으며 막연했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종교와 권력의 폭력에 오랜 세월 노출되었기 때문에 동서양을 막론하고 자유인에 대한 개념이 자리 잡는 데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당연하게도 누가 가르쳐주지 않고 가르쳐 줄 수도 없는 개념이었기 때문에 기존의 고통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물론 단기간에 억압이 누적되면 농민 봉기 같은 상황이 펼쳐지기도 했습니다. 여하튼 현세의 모든 고통과 현실을 신(혹은 황제)의 뜻으로 받아들이며 이러한 고통과 번뇌를 주신 신에게 심지어 감사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사실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유대교, 이슬람교, 힌두교, 불교, 도교 등 대부분의 종교는 인류를 현실의 고통과 권력의 압제에서 벗어나 행복하게 살기를 기원합니다. 이번 생에서 힘들다면 내세(來世)나 사후(死後)라도 보장받으려고 노력합니다.    

 

사후세계에 대한 국가별 인식도


    그런데 왜 유럽에서만 유독 근대적 사상과 사건들이 집중적으로 발생했을까요? 로마, 비잔틴 제국, 십자군 전쟁, 흑사병, 100년 전쟁 등으로 대표되는 중세 시대는 대표적인 봉건제였습니다. 중세 후기에는 감소했던 인구가 다시 증가하고 현실 정치와 종교에 대한 의구심은 종교개혁과 르네상스 등으로 나타납니다. 중세와 근대를 나누는 시점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異論)이 있지만 여기서는 개념이 생기기 시작한 사건을 중심으로 살펴보겠습니다.     


    유럽은 종교와 현실 정치에 대한 불신의 반동으로 종교와 인간에 대한 탐구가 펼쳐집니다. 물론 종교개혁과 르네상스가 큰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결국 인간에 대한 성찰만이 현실의 고통을 개선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특히 종교개혁은 전 유럽에 엄청난 영향을 미칩니다. 16~17세기 유럽 기독교권 국가들에서 일어난 개혁운동으로 프로테스탄트(Protestant)라는 개신교가 탄생합니다. 이후 자본주의 경제와 청빈과 근면으로 대표되는 윤리 사상에도 영향을 미친 프로테스탄트는 진정한 의미에서 근대사상의 출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당시 종교의 부패에 대한 반발로 시작된 루터(Martin Luther, 1483~1546)의 ‘95개 조 제제(提題)’(1517)를 발단으로 시작되어 성직자의 권위를 부정하고 성서 중심을 주장한 것이었습니다. 루터에 의한 독일의 개혁과 츠빙글리(Ulrich Huldrych Zwingli, 1484~1531), 칼뱅(Jean Calvin, 1509~1564)에 의한 스위스 개혁이 핵심이었고 시작이었습니다. 종교개혁 운동은 프로테스탄트의 기독교를 탄생시키고 근대 유럽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갖습니다. 이후 프랑스도 위그노 전쟁으로 36년간의 내전 상태가 되며 독일의 30년 전쟁으로 이어지며 유럽 전역이 전쟁에 휩싸입니다. 이렇게 대륙의 종교개혁은 초기에는 면별부(免罰符) 같은 교회의 부패를 성토하며 시작되었지만 내전(內戰) 성향과 권력 다툼적 성격이 강했습니다.      


95개 조 반박문

    그런데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과는 다른 양상을 보였습니다. 영국은 국왕 헨리 8세(Henry Ⅷ, 1491~1547)의 이혼 문제를 계기로 로마 가톨릭교회에서 이탈한 이후 영국 국교회를 성립했고 종교개혁의 결과로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의 중간적 교회가 됨으로써 후에 칼뱅주의 영향을 받은 청교도에 의한 혁명(1642~1649)을 경험하게 됩니다. 영국은 결정적인 순간에 엘리자베스 1세(1533~1603)가 직위하고 내분을 소위 중용정책으로 다스렸으며 대외로 뻗어 나갑니다. 다양한 부국 정책이 시행되었고 귀족들과 백성들의 삶이 안정화되었습니다. 특이한 점은 부의 축적과 새로운 세력인 젠트리(gentry)의 급속한 성장이었습니다.      


젠트리의 일상


    튜터 왕조의 마지막 왕이었던 엘리자베스 사후 제임스 1세(1566~1625)가 지명되었습니다. 그는 왕권신수설(王權神授說)을 스스로 주장할 정도로 확실한 옹호자였습니다. 당연히 젠트리(gentry) 등의 의회파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내전이 벌어지게 되고 제임스 1세는 망명했다 붙잡혀 크롬웰에 의해 사형됩니다.      


    의원이었던 크롬웰은 기병대(후에 철기병으로 불린)를 조직해서 왕당파와의 전투를 모조리 승리하고 후에는 아일랜드와 스코틀랜드까지 원정해서 잔인한 무단통치를 실시합니다. 그는 호국경(로마 호민관에서 차용,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총독)으로 있었던 5년 동안 올리버 크롬웰은 온 영국인에게 청빈 근검, 쾌락 금지 등 청교도의 금욕적 생활방식을 강요했습니다. 


    또한 영국인의 정신적 개혁이 필요하다며 “경건한 위원(godly governors)”이라는 직함을 만들어서 온 영국인들을 감시하는가 하면, 노래도 찬송가만 부르게 했고, 심지어 “음식을 맛있게 요리하는 것은 쾌락이다”라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영국 음식이 맛이 없는 이유 중의 하나가 올리버 크롬웰 때문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네이스비 전투현장의 크롬웰


    크롬웰 사후 제임스 2세가 지명되며 왕권이 강화되고 크롬웰은 부관참시(剖棺斬屍) 됩니다. 제임스 1세와 의회가 맺은 협약이 권리청원(Petition of Right , 權利請願)이며 개신교 신자가 다수였던 의회파에 의해 제임스 2세를 폐위되고 메리 2세가 임명된 사건을 명예혁명(Glorious Revolution, 名譽革命)이라고 합니다. 명예혁명은 잉글랜드에서 최초로 시민사회가 성립되는 데 크게 기여했고, 궁극적으로는 산업혁명에 영향을 주었습니다. 한마디로 영국이 근대 시민사회로 이행하는 밑바탕을 닦은 혁명이었습니다.      


    실제로는 혁명이라기보다 국왕에 맞서 귀족과 젠트리의 이권을 보장한 측면이 강했습니다. 그럼에도 이 혁명의 결과 권리장전(Bill of Rights, 權利章典)이 통과되며 국가와 개인의 관계를 개인의 권리를 중심으로 재정리하였다는 의의가 있습니다. 이는 영국에 전 세계 최초로 시민사회가 형성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후 권리장전의 조세와 대표권에 관한 내용을 바탕으로 미국 독립 혁명이 시작되었으며, 차티스트(Chartism, 1838∼1848) 운동과 여성 참정권 운동으로 대표되는 참정권 확대 운동 또한 명예혁명과 권리장전의 정신 아래 진행됐습니다.      

권리장전을 승인하는 메리와 윌리엄 공동 왕


    또한 명예혁명 이후 여러 차례 개혁으로 정치가 안정되고, 법과 규칙으로 규정된 개인의 권리에 따라 개인의 경제적 활동의 자유가 보장되면서, 함께 진행되고 있던 과학 혁명과 시너지를 일으키며 산업혁명이 일어나는 데 기여하게 됩니다. 그리고 이런 정치적 안정과 경제 분야의 혁명적 변화는 영국이 최초로 근대 시민사회를 설립하고 근대 사회의 문을 열게 되는데 역할을 수행합니다.     


   이러한 영국의 변화는 근대화의 표본이 되었습니다. 다시 교육으로 돌아와 살펴보면, 루터는 근대 교육의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의무교육을 주장합니다. 루터는 어린이들의 인권과 교육 내용, 공교육 개념 등을 이야기했습니다. 루터는 훗날 교육을 논할 때 “어린아이를 가르치려면 먼저 어린아이가 되어야 하고 사랑으로 가르쳐야 한다”라고 역설했습니다. 그리고 모든 소년 소녀들에게 성경교육뿐만 아니라 그리스 로마 고전과 지리학 문학 등의 서적을 무료로 열람할 수 있는 도서관을 지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재능 있는 아이들을 뽑아다가 무료로 중등교육까지 시켜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공교육 개념을 처음으로 제안한 인물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모든 사람이 평등하게 일정 시기 동안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입니다. 루터가 대단한 건 교육차별을 반대했다는 사실입니다. 동시대 인문주의자들은 교육을 중요하게 생각했지만 여성 교육에 대해선 매우 회의적이었는데, 여성의 지성에 한계가 있고 배워봤자 써먹을 곳이 없다는 이유로 여성 교육은 노력의 낭비로 여겼습니다. 이런 루터의 사상이 유럽의 다른 나라에서도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데 이후 몇백 년이 지나서야 가능했습니다.      


    겨우 18세기에 이르러 근대국가의 발달을 계기로 국가의 발달과 그 존속·번영은 국민교육을 강화함에 있다는 사상이 높아졌고 드디어 국민교육을 널리 실시하게 되었습니다. 1763년 독일의 프리드리히 대왕은 일반지방학교령을 공포하고, 5~14세까지 의무교육을 실시할 것을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의무교육을 실시하지 못하였고, 1852년에 이르러 미국이 세계에서 가장 먼저 실시하였으며, 영국은 1860년, 프랑스는 1872년, 일본은 1885년부터 실시하였습니다. 교육 연한은 처음에 4~5년이었으나, 그 후 6년 또는 그 이상으로 연장되었습니다. 오늘날의 의무교육 연한은 국가마다 일정하지 않아 최하 5년부터 최고 12년까지인데, 그 연한은 연장되어 가고 있습니다.     


    잠시 돌아와서 보면 중세 시대에도 교육은 존재했습니다. 다만 중세는 그리스, 로마의 철학이나 미학 보다 종교 중심의 교육이었습니다. 종교 교육을 담당하는 사람들은 당연히 성직자였고 내용은 성서였습니다. 성경은 라틴어로 적혀있었고 이를 해석하는 권한도 성직자에게만 있었습니다. 교육자와 피교육자 모두 귀족 이상의 권력자들로 한정되었으며 신의 뜻을 해석해 주는 사람도 성직자였습니다.      


    교육기관도 수도원 중심이었으며 설치되는 교육기관의 교육도 대부분 종교적인 내용이 중심이었습니다. 당연히 조선시대처럼 은밀하고 내부적이며 교조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세상의 모든 문제는 종교적 잣대로만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도 개인이 아닌 타인에 의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자유의지란 모호하고 추상적인 개념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은 이런 불합리한 상황을 근본적으로 바꾼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독일은 루터가 보편적으로 독일어로 읽을 수 있는 독일어 성경(이전에도 독일어 성경이 있었지만 고어로 번역되어 별도의 해석이 필요했음)이 써졌고 인쇄술(구텐베르크 성경)로 일반인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영국의 제임스 1세는 <흠정역 성서>라는 영어 표준 성경을 만듭니다. 또한 엄격한 청교도 주의자였던 크롬웰은 군인들에게 휴대용 성경을 만들고 교육합니다. 국민을 하나로 묶는데 종교와 군대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쿠텐비르크의 활판 인쇄술


    이 시대를 지식혁명의 시대로 부르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근대국가 모두에서 출판이 넘쳐나고 서점이 급증하게 됩니다. 조선통신사들은 일본 거리에 있는 서점에서 책을 구매합니다. 문화를 전파하기 위해 만든 사신단이 오히려 책을 구입합니다.      


   처음 만든 나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잘하는 나라가 중요합니다. 근대화를 조선이 먼저 했다고 해도 이런 근대 교육을 시행할 수 있는 여건이 조성되지 않으면 공염불입니다. 경제부흥, 부의 축적, 새로운 신진 세력의 등장, 정치 제도의 안정화 등이 필요충분조건은 아니지만 인류역사상 근대 교육이 완전히 새로운 시대를 열게 한 분기점이었던 것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물론 이 유럽의 근대국가들이 보편적 교육만 강조한 것은 아닙니다. 당연히 우수하고 집안이 좋은 귀족과 재산가의 자재들은 특별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한편으로 이러한 공교육 체계를 불신하는 사람 중에서도 재력가들은 집에서 가정교사를 들여와 사교육을 시킵니다. 저 유명한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1873)은 제대로 공교육을 받은 적이 없었습니다. 특히 아버지와 개인교사에게 집중적으로 교육을 받았습니다.     


   근대를 연 대부분의 국가는 결국 진화론을 오해한 우생학의 함정에 빠져들게 됩니다. 자유와 평등을 기반으로 근대를 열고 과실을 얻었지만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해서는 결국 다른 국가와의 경쟁이 필요했고 근대화되지 못한 열등한(?) 국가를 식민지로 삼았습니다. 그런 비윤리적인 정치경제행위의 명분을 주기 위해 우생학이 필요했습니다. 1, 2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이 생각이 얼마나 논리적 모순인지 깨닫게 됩니다.      


선천성 질환이나 장애를 지닌 사람에게 소요되는 일일 5.5마르크의 비용이면 건강한 일가족이 하루를 살아갈 수 있음을 설명하는 삽화


    잠깐만 생각해 봐도 의문이 생깁니다. 근대란 시민, 자유, 평등, 권리 등등의 단어로 집약됩니다. 이런 개념은 시민 한 사람에 대한 인권이 구체화될 때 성립할 수 있습니다. 근대국가의 이러한 개념들은 피로 구축되었습니다. 그런데 혈연에 따라 고유한 능력이 결정된다면 전장의 이름 모를 군인의 죽음은 아무 의미가 없고 이를 주장한 사상가도 이론을 보편화하지 못한 채 상아탑의 박제로 존재했을 겁니다.   

   

    어떤 의미로 생각해 보면 우매한(?) 국민의 의견과 관계없이 1,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고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몰고 간 사람들의 혈통이 일반 백성과 다르다는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유대인들이 랍비의 교육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피가 우매해서가 아닙니다. 본성이 태어나면서 100% 정해지고 유지된다면 당연히 우생학이 가장 중요할 겁니다. 그리고 정말 그것이 전부라면 조선은 망하지 말았어야 합니다.      


    물론 근대 교육도 빛과 어둠이 있습니다. 근대 교육의 결과인지 원인인지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지만 결과적으로 식민지와 인종, 성 차별 등이 나타납니다. 많은 학자들은 그런 과정을 겪었기 때문에 인류 보편적인 인권 개념이 생겼다고 하니 지금에 와서 누구를 비난할 일은 아닌 것도 같습니다. 다만 아직도 보편적 인권을 누리지 못하는 많은 국가의 젊은 삶이 애처롭습니다.      


    지금 우리도 교육의 방향을 생각하기에 앞서 과거 근대를 살펴보는 것처럼 서구의 근대 교육도 벤치마킹하는 모델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근대 교육의 태생적인 한계를 잠시 엿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근대국가는 인류의 역사상 처음 시도하는 엄청난 모험이었습니다. 성공 대박, 실패 쪽박인 도박과 같은 모험이었지만 군사 혁신처럼 당장 하지 않으면 손해라는 생각이 강했을 겁니다.     

 

    중세까지의 변화 속도에 비해 근대는 뒤쳐지면 영원히 패자가 될 수밖에 없다는 불안감이 팽배했습니다. 종교가 모든 판단의 기준이었던 중세를 넘기 위해 그리스 철학에 대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됩니다. 물론 다양한 사조만큼이나 당시 관점으로 비판의 목소리도 많았습니다. 종교를 비판하는 것보다 과거, 그리고 이미 강대국이 아닌 그리스 철학을 비판하는 것이 한결 수월했습니다. 근대국가와 교육에 근간이 되는 그리스철학은 무엇이었을까요? 왜 그들은 과거에서 미래를 찾아야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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