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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Dec 16. 2023

#2. 사교육 안 하고 당당하기

교육 잡설

#2. 사교육 안 하고 당당하기     

    본래 공교육이란 근대국가가 만들어지고 국민에게 국가의 개념과 근대 시민의식을 계몽시켜 국가에서 활용이 가능한 인재로 빠르게 양산하기 위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즉 우수한 인재 양성 목적보다 보편적이고 필수적인 교육을 통해 공교육이 시작되었고 이후, 의무교육으로 발전합니다.      


    메이지 시대를 전후해서 일본은 많은 젊은이들이 서구 열강으로 유학을 떠납니다. 물론 초기에는 청나라도 대상이었지만 아편전쟁으로 청나라는 대상국에서 제외됩니다. 청나라도 미국과 유럽으로 엄청난 수의 유학을 보내며 청일, 러일 전쟁 후에는 일본으로도 유학을 떠납니다. 인도는 다소 사정이 달라서 영국이 인도 본토에 양질의 공교육기관을 설치했습니다.      


    물론 그럼에도 영국과 미국 등으로 많은 유학을 떠났습니다. 우리나라는 일제 치하에서 일부가 서구에서 유학하고 대부분은 일본에서 공부합니다. 통일신라 시기, 신라와 발해도 당나라로 유학을 떠납니다. 교육은 부국강병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지름길입니다.     


   근대는 모든 국가가 부국강병을 위해서 교육을 확대하고 계몽운동을 했으며 새로운 세상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우리나라는 뒤늦게 시작했지만 이미 여러 이유로 미국으로 이민 간 한인회의 도움으로 어렵게 유학을 합니다. 세계 어디를 가든지 한국민들의 교육 열기는 뜨거웠습니다.      


    그렇지만 이민자들은 언어와 인종 등의 장벽에 어려움을 겪습니다. 이 난국을 돌파할 수 있는 길은 품앗이였습니다. 품앗이 교육을 통해서 최소한 2세는 미국 사회에서 대접받기를 원했습니다. 이들의 교육열이 미국의 사교육 시장의 단가를 올렸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였습니다.      


    현재는 중국, 인도 등 아시아계가 덩치를 키운다는 말도 있지만 사실 미국인들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국민이 유독 교육에 열을 내는 것처럼 언론에서 다루지만 다른 국가도 사정은 비슷합니다. 공부는 인간의 기본 욕구입니다. 그리고 이 시절 미국도 사교육에 눈을 떴습니다. 더 좋은 대학과 취업이 성공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들도 최소한 주립대나 명문 사립대에 진학하기 위해서 SAT, ACT 사교육을 받습니다.      


    또한 미국 입시의 특성상 내신을 중요하게 여기기 때문에 명문대 합격률이 높은 명문고를 진학하기 위한 스포츠 등의 사교육이 일반적입니다. 그런 반면 일반 교사들의 대우가 평균적으로 좋지는 않다고 합니다.    

  

   우리나라는 공교육이 체계를 잡기 전부터 사교육에 관심이 높았습니다. 70년대까지는 과외가 주를 이루었고 이후에는 과외 금지 조치로 단과 학원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당시의 대형 학원가는 노량진 학원가(대성, 한샘, 정진 등)가 제일 컸고 용산 학원가(성지, 양지 등), 서울역 학원가(정일, 대일 등), 서대문 학원가(서울, 연세, 종로 등), 신설동 학원가(제일 등)가 컸습니다.      


    대치동 학원가는 아직 시작되지 않던 시기입니다. 과외 금지 시기에는 재수생 학원이 중심이었습니다. 현재는 중계동, 목동, 대치동이 3대 학원가로 불리고 있습니다. 물론 노량진도 있지만 노량진은 입시학원보다 직업과 연계한 다양한 콘텐츠의 학원이 많이 있습니다. 과외 금지는 1980년 7월 30일 발표했으며 1989년 방학 중 학원 수강 허용, 1991년 학기 중 수강 허용으로 해제되며 학원의 급격한 성장을 도왔습니다. 또한 강남 8 학군의 완성과 대치동 아파트, 수능, 보충 수업 폐지, 외고/과학고/특목고 확대 등이 사교육 시장을 확대했다고 보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뭐니 뭐니 해도 우리나라의 훌륭한 IT 기술이 없었다면 고액 과외는 있어도 절대 지금과 같은 대형화가 되지 못했을 겁니다. 엄청난 규모의 교육 콘텐츠 산업은 IT와 만나 거대해집니다. 만약 IT 기술이 없었다면 대치동에 살지 못한 사람은 멀리서 일타강사의 위명만 겨우 듣고 불편한 마음으로 냉가슴을 앓았을 겁니다. 부동산 가격을 견인했을 정도니 웬만한 재력으로는 꿈도 꿀 수 없었습니다.      


    우리나라의 IT 기술은 지리적 약점을 극복했습니다. 저도 가끔 보면 정말 놀라운 기술이기도 하고 일타강사 분들은 프로 중의 프로입니다. 문제풀이에 관해서는 믿고 맡길만합니다. 이러한 선진 교육 콘텐츠는 해외로도 수출되고 있으며 이미 많은 나라들은 우리나라의 교육방법을 주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심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공교육이 아닌 우리나라 부모님들의 교육열과 사교육의 다양함, 필요성에 국한합니다. 저는 감히 우리나라 공교육을 비난할 만한 위치에 있지도 않고 하고 싶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그 어떤 국가보다 빠른 시간에 근대 교육체계를 구축했다는 사실을 찬양합니다. 그리고 다양한 교육 콘텐츠와 교사의 질적 우위, 교육 인프라를 활용해서 양질의 교육을 전 국민에게 제공하고 있다는 평가에도 동의합니다.      


   다만 정부의 사교육 근절에 대한 의지와 정책의 세밀함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정부의 사교육 정책은 금지와 해제만 있었고 더욱이 고액 과외가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고민이 부족했습니다. 이 기간에 오히려 교육이 세습되며 부의 세습을 견고하게 합니다.      


    80년대 이전에는 공부해서 성공한다는 공식이 최소한 선민의식으로 연결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과외 금지, 수능, 내신 강화 등의 공교육 혁신 발표 후에 고액 과외 등 소위 말하는 관리를 통해서 명문고등학교와 대학교를 보내는 교육 불평등 사례가 급증했습니다. 교육 평등화와 관련된 논의와 불법과 관련된 논의는 금주법처럼 끝없는 논쟁이기 때문에 접어두더라도 고액 사교육 시장만 보더라도 그렇습니다. 

     

    물론 현실적으로 고액 과외를 단속하기도 어렵고 고액과 저액을 나누는 기준을 설정하기는 더 곤란하고 설정하는 순간, 가이드라인을 제시한다는 비난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복잡한 정책적 이야기는 교육 당국에서 좀 더 생각하시는 것으로 하고 저는 금수저에 대해서만 일단 말해보겠습니다.      


   금수저로 불리는 원천적인 부의 세습은 교육의 세습으로 이어지고 이 순환을 통해 다시 부의 세습이 완성된다는 논리는 매우 근원적이며 또한 합리적입니다. 학자들은 이런 단순하면서도 보편적인 논리를 좋아합니다. 공교육 체계가 없던 시대나 신분제 사회, 독재 정권에서는 권력과 부가 세습되었습니다.      


    자본론(資本論, Das Kapital)에 따르면 프롤레타리아(Proletariat, 무산계급 또는 노동계급)는 동굴 속에 갇힌 사람들처럼 착취당하는 것을 모릅니다. 그러니 노동자들을 계몽하고 혁명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당연히 전제군주제 국가의 권력은 변화를 거부하고 그러다 민주혁명, 공산혁명이 발발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19세기 계몽주의와 의무교육으로 근대가 완성됩니다.     


    문명의 급격한 발전은 새롭고 거대한 충돌을 야기합니다. 플라톤의 공교육은 2,000년이 지나서야 어느 정도 완성됩니다. 그러나 이 교육사상은 모든 어린이에게 똑같은 교육을 해야 한다는 말이 아니었습니다. 공교육이 모든 것을 담당할 수 있다면 당연히 그렇게 해야 합니다.      


    플라톤은 공교육을 제안하며 모든 시민이 어릴 때는 같은 교육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적성과 능력을 고려해서 학생을 선발하고 자신의 의식이 어느 정도 흔들리지 않는 나이가 되면 본격적으로 공부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렇게 세월이 흐르고 모든 테스트를 통과한 사람만이 통치를 하고 구루(스승)가 될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대부분 국가가 19세기에 공교육 체계가 만들어지고 의무교육을 실시합니다. 물론 여전히 아이들에게 어떤 교육을 해야 할지는 과제입니다. 시대마다 다양한 논의가 있었지만 결국 학문의 종류, 깊이와 범위가 논란거리입니다.      


    플라톤의 기준으로는 현대의 학생들은 너무 어린 나이에 공부를 시작해야 하고 내용도 방대합니다. 그렇지만 문명을 앞으로 밀어내고 미래 세대의 숙제까지 미리 해결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기초교육이 필수이기도 합니다. 또한 음악, 미술 등의 교양교육은 인성, 덕성, 감성을 함양하기 위한 필수 교육입니다.      


    사실 말이 기초교육이고 교양이지 고대인들은 엄두도 못 낼 양입니다. 심지어 수학 공부의 필요성을 주장한 플라톤도 단순 계산능력의 대수학(algebra, 代數學)과 평면상의 도형 공부인 기하학(geometry, 幾何學) 정도를 말한 정도였습니다. 다행히 두루두루 잘하는 사람들이 살던 시대도 있었습니다. 고상하게 우리는 그들을 르네상스인(Renaissance man)이라고 지칭했습니다. 다양한 예술적 성취와 법학, 철학 등의 인문학적 지식과 수학, 천문학 등의 과학적 해결 능력을 겸비한 다재다능한 사람들을 르네상스인이라고 불렀습니다.     

 르네상스 문화를 꽃피운 피렌체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요? 프랑스의 법률가이며 수학자였던 페르마(Pierre de Fermat, 1601~1665)는 르네상스 시대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명입니다. 페르마는 법학을 공부하고 변호사가 됐지만 평생을 수학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당대의 유명한 수학자들과 연구 성과를 서신으로 교환했고 방정식, 기하학, 확률론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업적을 남겼습니다. 그는 당시 유행했던 1621년 출간된 디오판투스 <산법>(Arithmetica, AC 3, 대수학의 아버지)의 여백에 다음과 같이 주석을 달았습니다.


        “~나는 이것을 경이로운 방법으로 증명했으나 책의 여백이 충분하지 않아 옮기지는 않는다.”

페르마

    

    이 방정식은 피타고라스의 정리가 세제곱 이상에서는 해가 없다는 내용이었고 페르마의 이 낙서로 358년 동안 수많은 수학자의 인생이 꼬였습니다. 이 사람은 법률가라고 불러야 할까요? 수학자라고 불러야 할까요? 우리나라에도 여러 개의 전문 직함을 가지고 사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럼에도 르네상스인이라는 의미는 좀 더 보편적인 의미의 시대를 말합니다.      


    당시의 많은 이들은 어떤 교육을 통해서 이 정도의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많은 사람이 당시의 사람들의 인문학적 베이스 때문이라고도 하고 오히려 학문의 경계가 모호했기 때문이라도 이야기합니다. 어릴 때부터 라틴어, 그리스어를 배우면서 그리스 철학이 자연스럽게 몸에 밴 때문이라는 논리입니다.      


    매우 설득적인 논거이지만 결국 일부 천재들에 국한된 이야기입니다. 다른 대다수 사람은 라틴어를 알 수도 없었고 공부할 수 있는 방법도 없었습니다. 그러니 공교육으로 만민에게 교육의 평등이 이루어지면 모두가 르네상스인이 될 수 있다는 인문학적인 대안이 제시되었습니다.


   기회의 평등이 공교육만으로 달성되기도 어렵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교육을 마녀사냥 하는 것 또한 비논리적입니다. 전두환은 집권하자마자 과외를 전면 금지한 ‘7·30 교육개혁 조치’를 발표합니다. 과외 금지를 어기면 학생은 무기정학, 학부모는 직장 해고, 과외 교사는 형사 입건 등의 처벌을 받게 했습니다. 이 조치는 과외로 연명하고 등록금을 내고 있던 많은 학생이 변변한 장학금도 없던 시절에 학업을 중단하게 합니다.      


    또한 불법 과외가 판을 치고 이를 단속하기 위해 공권력이 낭비됩니다. 더욱이 불법 과외로 단가가 치솟게 됩니다. 이런 조치는 가난한 사람들의 응어리를 풀 수 있었을지는 모르지만, 오히려 부의 세습화를 가속화했습니다. 한편으로 노태우의 과외, 학원 금지 해제 조치와 수능 체제는 금지 이전의 모습으로 돌리지 못하고, 오히려 새로운 양상을 낳게 됩니다.      


    수능 체계는 논리 과목의 사교육을 필요로 했고 시장은 386 세대 운동권에서 학원 강사를 유입합니다. 이후 내신 확대와 입학사정관제는 본래의 취지와 관계없이 더 많은 사교육과 교육의 세습이 가속화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공교육 정상화라는 표어만으로 교육체계 재정립이 가능할까요?     


   조금 마음에 안 들어도 현실적인 사교육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우리 아이들은 이미 공교육에서 감당하기에는 이미 다양한 사교육을 받고 있습니다. 핵가족이라는 의미도 퇴색될 정도로 집에 상주하는 부모님조차 찾기 어렵습니다. 당연히 아이들을 돌볼 곳이 필요합니다. 과거에는 조부모님이 아이를 돌보아 주었지만, 지금은 그러기도 힘이 듭니다. 결혼연령이 늦어져서 조부모가 아이들을 돌보기에는 체력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의 자녀이기도 한 학부모들의 다양한 욕구를 충족시키기도 힘듭니다.      


    그런데 지방 중소도시만 해도 주위를 둘러보면 태권도 도장부터 교습학원까지 없는 게 없습니다. 초등학교 저학년은 예체능 중심의 학원을 다니고, 공부에 관심이 있는 부모님들은 영어유치원 등의 영재교육을 시킵니다. 유치원부터 무상교육이 시작되었지만, 부모가 퇴근할 때까지 아이들을 돌보아 주지는 않습니다. 골목길과 놀이터, 학교에서 만나던 친구들은 모두 학원에 있습니다. 집에서 아이들은 무방비한 상태로 혼자 있습니다. 개천에서 용이 나오기는 예나 지금이나 어려우며 홀로 성장해서 성공하는 것은 위인전집에나 등장하는 특별한 사람들입니다.     


   집에서 혼자 있는 아이들은 학교에서도 혼자 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대부분의 아이들이 학원으로 다닙니다. 초기에는 공부하기 싫은 아이들을 학원으로 돌린다며 비난했지만 요새는 아이들이 학원을 선택합니다. 학원에 가야 친구를 만날 수 있습니다. 어디를 보든 학원이 있고 학원 선생님들은 다양합니다. 학교의 선생님은 선택할 수 없지만 학원은 선택할 수 있습니다. 학원비도 법적 제도화 되어서 지금은 서울 강남을 제외하고는 어느 정도 평준화 되었습니다. 물론 교육 인프라를 고려할 때 지방은 수도권을 따라갈 수 없지만 최소한 아이들을 방치하지는 않습니다. 과거에 선생님들은 방과 후의 아이들을 지도도 하고 관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현재는 수업 시간만 관리하기도 벅찹니다.      


    아이들도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있으며 칭찬은 고래가 아니라 아이들을 춤추게 합니다. 예체능, 학업 어느 것이든 더 잘하고 칭찬받고 싶은 욕구가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학급당 학생 수가 줄어도 학교 선생님이 내 아이를 위해 맞춤식으로 교육하기는 어렵습니다. 학교 선생님의 시간은 부족하고 해야 할 일은 많습니다. 플라톤은 교육할 만한 사람만 선발해서 공부시키고 루소는 자연주의 교육을 강조하지만 위인전에 나오지 않는 사람도 공부를 잘하고 싶은 욕망은 있는 법입니다.      


    특히 예체능은 공교육만으로 성취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래서 예중, 예고, 대학이 만들어집니다. 모두가 세계적인 위인이 될 수 없지만 그래도 열심히 행복하게 살기 위해 노력합니다. 이 다양한 욕구를 공교육만으로 소화하기 위해서는 교육당국의 엄청난 재정부담이 필요합니다. 가능할까요? 만약 공교육 체제로만 예체능 교육을 시행했다면 지금과 같은 세계적인 인물들은 육성하기 어려웠을 겁니다.    

  

    학원 현장에서 아이들은 정말 순수하게 희로애락(喜怒哀樂)을 드러냅니다. 시험을 잘 보면 기뻐하고 잘못 보면 슬퍼합니다. 다음에 목표를 잡고 선생님과 함께 공부하고 친구들과 경쟁하기도 하며 수다도 떱니다. 많은 학생이 학원에서 친구를 만나고 약속을 정하고 학원 선택도 스스로 합니다. 80~90년대 서울 유명 단과학원은 정원 200명 강의실에 500명이 넘게 수강했습니다. 학교보다 수업환경이 더 좋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학원에 갔던 이유는 학생마다 이해도와 진도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반복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학교에서도 우등반, 열등반이 있었고 방과 후 수업은 성적으로 나누어 관리했습니다. 아이들의 교육받을 권리는 어디로 갔을까요? 어떤 아이들은 매달 학원을 옮겨 다닙니다. 또 어떤 아이들은 취학 전부터 고등학교까지 같은 학원에 다니고 대학교 졸업 후 선생님으로 취업하기도 합니다. 누가 더 공부를 잘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미 학원은 지역사회와 밀착되었습니다. 학교 선생님은 이전을 하지만 오래된 학원은 아이들과 오랫동안 함께 있습니다.     


   언론에서는 학생이 들로 산으로 뛰어다니지 못하고 학원에서 학원으로 전전하는 모습을 매우 불쌍하게 그립니다. 그러면서 창의적이고 자연 친화적인 쟝 자크 루소(Rousseau, 1712-1778)의 에밀(Emile)의 교육방법을 제시합니다. 물론 이런 교육 방식도 중요합니다. 그렇다고 계산 중심의 수학학원 방식을 비난할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코딩학원이 생기면서 너도나도 찾아갑니다. 그런데 일본에는 신기하게도 계산기 학원이 있으며 카시오(Casio, 전자계산기 회사)에서 계산기 대회도 개최합니다. 우리나라가 수학을 그나마 이 정도 하는 이유 중 하나로 과거 성행했던 주산학원을 꼽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국 교육 분야도 시장 논리가 반영됩니다. 시대의 요구와 소비자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어야 성공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어떻게 시장에만 모든 것을 맡길 수는 없습니다. 다만 모든 책임을 공교육에만 맡길 수도 없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겁니다. 공교육만을 주장하고 모든 죄를 사교육에게 전가하는 마녀사냥식 논리는 이제 그만해야 합니다. 그런 비난을 하는 사람에게 자신이나 자녀들은 사교육 혜택을 본 적이 없는지 매우 궁금합니다. 내로남불이 생각납니다. 그리고 정말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면, 제가 볼 때는 자연 친화적이지도 않고 부모 마음대로 했으니, 인권이 존중받지도 못한, 순수한 의미로 방치입니다.      


   일각에서는 학원이 부모와 학생들의 불안심리를 자극하기 위해 선행학습을 조장하고 불필요한 과잉 교육을 통해 이익을 창출한다고 주장합니다. 사실 선행학습에 대한 개념도 불분명하기에 비합리적인 논쟁이지만 언 듯 들으면 이것도 말은 됩니다. 그런데 우리의 예습과 복습은 어느 시점, 수준까지가 적정할까요? 학생들은 여러 과목을 학습하기 때문에 하루 주어진 양의 예습, 복습과 숙제를 하고 나면 자야 할 시간입니다. 앞서 말한 것처럼 학생마다 공부에 대한 선호도, 이해도 등에 차이가 있습니다. 제 두 아이도 서로 많이 다릅니다. 예체능처럼 눈에 보이고 부족한 부분을 알 수 있는 분야에서도 단계별 학습 효과에 대해 의문을 제기합니다. 예술, 체육 재능을 찾기 위해 여러 학원과 선생님을 전정하기도 합니다. 재능을 뛰어넘는 결과를 만들기 위해 고된 그들의 숙련과정을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다리고 기대합니다.


    사실 예체능의 숙련과정이 체계화된 것은 근대 이후의 일이고 이전에는 군과 종교에만 이런 전문 교육 과정이 있었습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길드의 숙련공처럼 예술 분야도 체계화되었습니다. 체육도 전문 직업인이 된 시기는 프로 구단이 만들어진 때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올림픽 등 아마추어 대회에 유럽 국가들은 지금도 다른 직업을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 참가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지금은 이미 인물의 이름이 되어버린 플라톤은 고대 올림픽에서 우승하고 얻은 닉네임(nickname)입니다. 그는 지덕체의 조화를 중요하게 여겼습니다. 그는 화성학(음악)은 공부해야 하는 대상으로 분류했지만, 체육은 교육 과목이 아니라 지와 덕처럼 인간이 갖추어야 하는 기본 소양으로 보았던 것입니다. 여하튼 예체능 분야처럼 공부도 상대보다 더 잘하고 더 빨리 능력과 재능을 찾기 위해서 조기교육에 열을 올리기도 하는 것이니 남이 이래라저래라 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고민해야 하는 것은 조기교육이나 선행학습의 필요성이 아닙니다. 이런 논의는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에 순환 논리에 빠질 수 있으며 법과 제도로 제한할 수도 없고 오히려 왜곡될 수도 있습니다. 필요하고 원하는 사람은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일반 공부의 조기교육도 이런 측면에서 예체능만큼이나 어떤 의미에서 필수적입니다. 어느 분야에 재능이 있고 재미를 느끼는가는 지속 가능성에서 매우 중요하며 평생 교육과 직업 측면에서도 필수적입니다. 문제는 이런 교육을 통해서도 대부분의 아이들은 명확한 재능을 찾기 어렵습니다.      

    여기에서 선행학습의 원인이 있습니다. 탁월하지는 않지만 그룹 내에서 등급을 선점하기 위해서는 조금 더 많은 학습을 하게 됩니다. 사실 복습은 학생들마다 성과가 다르게 나타나지만 예습은 학교에서 정상 진도를 공부할 때 지적 우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예습도 성과에 어느 정도의 영향을 미치는지 명확하지는 않지만 최소한 학생의 학습 불안감을 해소시킵니다. 부모님의 만족감은 부수적인 효과입니다.     


   선행학습이 항상 선한 결과만을 만들지 못하기 때문에 많은 전문가들이 반대합니다. 선행학습의 실효성에 대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학습 만족도는 증가하지만 전체적으로 학습 의욕이 저하되는 효과가 있다고 합니다. 선행학습의 양과 질, 그리고 학생의 학습능력 등 많은 요인이 있어서 명확하지는 않지만 선행학습의 속도가 1학기 이상 차이가 날 경우 학교 수업의 집중도가 결여된다고 합니다.      


   물론 최근에는 이런 문제 때문에 보습 학원에서도 한 챕터 정도 앞서거나 동일한 내용의 수준을 높이는 정도로 평소에 학습하고 중간, 기말고사 대비해서 반복 복습 과정을 진행합니다. 물론 특목고 등 특화된 교육이 필요한 학생은 그에 맞는 선행학습이 필요합니다. 특목고의 학생들은 대부분 대학 수준의 전공 학습이 선행된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예체능 계열과 유사합니다.      


   사실 조기교육이나 선행학습의 문제는 재능이 부족하거나 선호하지 않는 경우에 발생합니다. 부모나 선생님의 욕심, 학생의 불안한 심리 상황에서는 어떠한 교육도 성과를 내지 못합니다. 보통 이런 상황에서 어른은 학생에게 인내로 돌파하기를 요구합니다. 어떤 경우에 위기 상황을 돌파하고 성공하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사례를 너무 많이 알고 있고 유행하는 자기 계발서처럼 자녀에게 요구합니다. 또 과거에 비해 부모의 유사 경험치도 높습니다. 이럴 때 부모는 쉽게 자식의 부적응을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진짜 영재는 소수고 다수의 아이는 그러지 못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다행히 조기교육이나 선행학습 없이도 정말 훌륭한 어른이 되는 사람도 생각보다 많이 있습니다. 생각해 보면 과거에 비해 아이들은 변화한 환경에 잘 적응하고 있습니다. 너무 악하지 않다면 환경에 적응하고 사는 것도 한 방법일지도 모릅니다. 사실 과거에는 조기교육이나 선행학습을 하고 싶어도 하기 어려웠고 대부분은 그런 게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그냥 교과서에 충실하고 엉덩이 붙이고 열심히 공부만 하면 언젠가 성공할 수 있다는 신화 속 동굴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동굴에서 나왔고, 부모가 된 지금은 할 수만 있다면 다 해주고 싶습니다. 결국 좋은 교육 인프라에서는 이런 교육 방법도 의미 있을 수 있습니다. 좋은 학습환경과 수준에 맞는 선생님, 그리고 학생의 학습 적응성이 조화를 이룬다면 선행 학습 아니라 어떤 방식도 가능합니다.      


   사교육의 가장 큰 문제는 부의 세습도, 조기교육도, 선행학습도 아닌 비용입니다. 우리나라는 빠른 근대화로 공교육으로 모든 교육을 감당하려 했지만 예산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성공하고 싶은 사람들의 욕구를 만족시키기에 공교육은 항상 부족했습니다. 이런 공교육의 부족을 사교육 시작으로 메우게 됩니다. 지금까지는 교육에 여러 가치를 씌워 사교육을 억제하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몰았습니다.      


    그런데 교육 수요와 공급 간 불일치는 오히려 거대하고 고급화된 교육시장이 만들어졌습니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서 노동에 대한 정당하고 합리적인 대가라면 누구도 비난할 수 없지만 왜곡된 시장에서 비윤리적이고 비합리적인 시장을 형성하고 있다면 문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분야든 공적 부분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을 시장에서 해결합니다. 특히 SOC(Social Overhead Capital, 社會間接資本)처럼 국가가 반드시 해야 하는 교육 분야는 온전히 국가가 모든 책임을 져야 합니다. 그러나 그런 세계는 공산주의 전체국가에서도 불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알고 있습니다. 당연히 공교육이 열심히 하고 있지만 부족한 부분을 사교육이 감당하고 있다면 사교육을 양성화하고 오히려 정당한 값을 치러야 합니다. 


    이것이 합리적이고 민주적입니다. 지금 우리는 모든 교육 분야에서 인강의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심지어 유튜브의 각종 콘텐츠의 양과 질은 놀랍습니다. 어떤 자격증도 학생으로서 자세만 있으면 인강을 통해서 공부하고 성취를 달성할 수도 있습니다. 플라톤도 이런 세상은 꿈에도 몰랐을 겁니다.      


   그런데 이전에도 우리나라에는 학습지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학습지 선생님은 집으로 직접 찾아와서 친절하게 학습 진도를 확인해 주고 숙제를 확인하는 등 학원이나 과외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부모와 학생들의 불안감을 제거해 주었습니다. 여성 노동 인력의 증가와 맞물려 우리나라 경제에 큰 힘도 되었습니다. 이후에는 인터넷 환경이 발달하며 비대면 학습지 활동이 활성화되었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교육이 인기를 끌까요? 과거에 공교육이 부족한 것이 무엇일까요? 아마도 그건 교육은 결국, 1대 다수가 아니라 1:1 교육이 가장 효과가 있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공교육은 근대화의 산물로 교실조차도 공장이나 사무실처럼 구성되어 있습니다. 이 방식은 결국 극도의 효율성을 지향합니다. 우리는 이런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선생님과 학교를 늘려 우리의 미래인 아이들에게 좋은 교육환경을 제공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런데 선생님의 급격한 증가는 선생님의 권위를 오히려 낮췄습니다. 본래 선생님은 수업뿐 아니라 학생들의 인생에 대한 지도를 해주시는 스승님입니다. 아시아 국가들 중에도 가장 유교적인 대한민국의 선생님에 대한 존중은 교육 선진국인 서구 국가에도 놀라운 일입니다. 권위=체벌이 아니기 때문에 체벌이 없어져서 권위가 낮아졌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선진국처럼 학부모의 평균 학력이 오르고 선생님의 수가 많아지며 벌어지는 일로 보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선생님들의 모든 체벌에 면죄부를 드릴 수는 없습니다.      


    저도 학교 다니면서 선생님께 맞지 않기 위해 많은 규칙을 지켰던 기억이 있고 지금도 처벌이 두려워 열심히 법을 지키고 삽니다. 그런데 이것이 저의 도덕적 성장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는 항상 의문시 여기고 있습니다. 여하튼 선생님이 많아지면 그런 다양한 역할이 가능하고 방과 후 수업, 맞춤형 교육 등 선진국형 교육환경을 구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오히려 선생님들은 너무 많은 일을 해야 했습니다. 학급당 학생 수가 줄면 아이들에게 더 많은 관심과 교육이 이루어질 거라 생각했지만 선생님은 오히려 일이 많아졌고 과거에 없던 엄청난 민원에 시달립니다. 어쩌면 일반 공교육을 진행하는 학교의 역할을 너무 과도하게 설정한 것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인간은 타자와의 관계를 통해서 성장합니다. 어릴 때는 엄마, 아빠와 자라면서 동네 친구, 선생님과, 그리고 학교 친구들 등등등, 그런데 이러한 동질성이 높은 삶의 패턴 속에서는 위대한 사람이 나오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살아오던 곳을 과감히 떠나 유학도 가고 새로운 학교로 전학을 가며 새로운 선생님과 관계를 찾아다닙니다.      


    조선 시대에는 다른 지역으로 이주하기가 어려웠습니다. 한 번 스승은 영원한 스승입니다. 스승이 어떤 사람인지는 관계없습니다. 어느 시대나 사회가 안정화되고 먹고사는 게 어느 정도 해결되면 그다음은 자식을 통해 가문을 세우고 자아를 실현하고 싶어 합니다. 재산이든 노하우든 가진 것 모두를 아이들에게 물려주거나 영속되기를 희망합니다. 이 두 가지가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능이며 동시에 강한 욕구라고 알려진 ‘인정받고 싶은 욕구’와 맞닿아 있습니다. 이 본능은 너무도 당연해서 별도의 설명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현재는 이러한 일련의 과정이 학원에서 이루어집니다.      


   물론 학교교육에서도 여전히 진행하고 있지만 전체 교육에서 공교육의 점유비가 낮아지고 있다고 보입니다. 국가가 아무리 선생님을 많이 선발해도 선생님과 학생의 비율을 1:1까지 할 수 있을까요? 불가능합니다. 간혹 과거에 미국의 대학은 선택과목 중 특별 지원 과목의 경우 한 명만 지원해도 개설이 되어 교수님과 둘이 수업을 진행한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쉽지 않은 이야기고 효과적인 지도 의문입니다.      


    현재 거의 대부분 국가의 헌법에 수록된 ‘자유’에 대한 지적 재산권을 보유하고 있는 ‘자유론’의 저자 존 스튜어트 밀(John Stuart Mill, 1806년 ~ 1873년)은 학교를 안 다녔습니다. 당시에도 독특했던 부모님의 교육방침에 따라 집에서 가정교사에게 교육받았습니다. 그리고 공리주의의 열렬한 신봉자였던 아버지와 친구인 벤담 등과 교류하며 학문적 소양을 기릅니다. 그리고 당시 영국의 계몽철학적 학문 사조 등과 버무려, 약간 흔들리는 시기를 제외하면, 본인 스스로 만족할 만큼 성공적으로 인생을 살게 됩니다. 이런 사례 때문인지 서양에서는 오히려 공교육을 완전히 배제하고 자녀에게 사교육만 시행하는 사람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은 관계를 통해 성장한다는 공교육의 대원칙하에서 홈스쿨이 웬 말일까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홈스쿨은 대부분 실패합니다. 조선도 그랬고 대부분 국가의 홈스쿨은 실패합니다. 아무리 스승이 훌륭해도 마찬가지입니다. 친구 관계가 별거 아닌 것 같지만 결국에는 많은 위인들이 친구들과의 관계에서 갈등하고 배신하고 협력하는 등 전반적인 사회성을 학습하고 유사 관심사를 교류하며 성취를 이루기도 합니다.      


    밀도 초반에 정신적 혼란을 겪습니다. 홈스쿨은 천재는 만들 수 있을지 몰라도 훌륭한 시민을 만드는 데는 다소 부족합니다. 따라서 천재도 어느 정도는 일반인과 같이 살아야 하며 일반인도 천재를 보며 다양성의 가치를 상향평준화 해야 합니다. 교육은 언제나 정답이 없으며 시대와 공존합니다.     


   공교육만 선하고 사교육은 악하다는 이분법적인 현실 인식은 국가 생존에도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교육은 시대와 공존하며 국가의 특성과 상관관계가 높습니다. 최근 우리나라의 교육 콘텐츠 사업은 선진국형입니다. 아직 부족한 부분이 있다면 좀 더 투자하고 육성해서 정상화, 활성화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유연하지 않으면 언제가 도태됩니다. 과거에 연연해 봤자 아무도 알아주지 않습니다. 동네에서 잘난 척해봤자 아무 소용없습니다. 우리 아이들을 어떻게 교육시키고 우리는 어떻게 공부할지 이야기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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