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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Mar 25. 2024

#22. 예체능도 공부하자

교육 잡설(敎育 雜說)

#22. 예체능도 공부하자     

    

    현대 스포츠는 거울(mirror) 세포의 극단적인 활용 예가 될 수도 있습니다. 진화가 시작할 때부터 이미 준비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최근 스포츠 과학의 눈부신 발전을 보면 아직도 인간은 진화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80년대 스포츠 스타는 지금 일반 동호인 정도 수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과학의 진보로 스포츠 장비가 발전한 탓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체격과 근육량이 증가했고 스포츠 의료의 발달로 부상 예방 등으로 장기간 선수 생활이 가능해진 것도 한몫했습니다.      


    1985년에 개봉한 록키 4(Rocky IV)는 소련과 미국의 냉전 프로파간다(propaganda)를 삽입한 킬링타임 영화였습니다. 재미있는 건, 소련의 붉은 전사와 싸우는 미국의 대표 복서가 당시 미국의 대표적 소외 계층이었던 흑인과 이탈리아 이민자라는 점이었습니다. 감독은 로마의 검투사를 연상시키는 권투를 통해 미국식 애국, 다양성, 통합의 메시지를 전하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록키 4 포스터

    한편 1991년 소련의 몰락을 예언한 영화이기도 합니다. 이 영화에서는 소련 과학기술의 허구를 보여주며 우주 개발 경쟁이 결국 체제 붕괴로 이어질 것이라는 장대한 예측을 했다고 의미를 부여할 수도 있습니다. 영화에서는 구소련이 과학기술을 권투에 적용하고 자만심을 들어냅니다.     

 

    록키는 이미 퇴물이었지만 형제 같은 아폴로의 죽음을 계기로 다시 과학이 아닌 과거의 훈련법으로 적지에서 붉은 군대를 물리칩니다. 이 영화는 한편 베트남전 이후 침울했던 미국의 국뽕을 올리는 역할을 했습니다. 이미 당시 올림픽을 통한 체제 경쟁이 매우 치열했고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에는 미국을 비롯한 민주 진영이 보이콧했고 1984년 LA는 소련과 동구권이 불참했으며 1988년에서야 겨우 서울에서 모두 모였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구 사람들에게 철의 장막 속에 있는 소련, 동독 등 공산주의 국가 스포츠 선수들의 무지막지한 능력은 신체 개조, 약물 투입 등에 대한 많은 상상력의 보고였습니다.      


    체육 교육은 크게 나누면 전문성에 따라 아마추어와 프로로 그분 가능할 것 같습니다. 아마추어 체육 교육은 학교 교육이 포함되며 일반 클럽과 동아리 등이 있을 수 있습니다. 최근에는 보는 것보다 직접 하는 것을 선호하여 각종 스포츠 교육 및 장소 등의 인프라가 증가하는 추세에 있습니다.      


    당연히 신체에 대한 미적 표현이 자유롭고 풍요로워졌으며 비만에 대한 부정적 인식도 확산되어서 트레이닝, 필라테스, 요가 등 신체를 아름답게 하는 운동이 급속도로 늘었습니다. 또한 테니스, 골프 등도 실내 구장이 늘어나면서 전천후 스포츠로 각광받고 있습니다.      


    오히려 과거에 비해서 전통적인 강자였던 당구장, 탁구장 등을 찾기가 쉽지 않습니다. 롤러장과 볼링장은 좀 더 스마트하게 새 단장 후에 예전 추억을 가진 사람들이 많이 찾는 것 같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저는 어릴 때 프로야구가 개막하면서 야구를, 중학교에서는 마이클 조던 덕분에 농구를, 아시안 게임 덕분에 탁구를 배웠고 고등학교에서는 친구들과 함께 당구장에서 자장면을 시켜 먹었습니다.      


    롤러장과 볼링장은 덤이었습니다. 아주 잘하지는 않았지만 어느 정도 어울릴 정도는 됩니다. 딱 그 정도만 했기 때문이기도 하고 동네 형이나 학교 선배에게 배웠지 별도로 교육받지 못했기 때문에 더 잘하기는 어려웠습니다.      


    무도도 비슷합니다. 몇 년을 줄기차게 태권도 도장을 다니는 친구가 부러워 도장 보내달라고 했다고 깡패 된다고 공부나 하라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습니다. 사실 돈이 없어서 그랬는지도 모르지만 당시에는 그 말도 일리가 있었습니다.      


    프로 선수들이 워낙에 희귀했기 때문에, 프로 선수 연봉이 일반 직장인과 큰 차이가 나지 않던 시기였고 자리도 많지 않았기 때문에 프로 선수가 못되면 계약직을 전전하거나 부상이라도 얻으면 인생이 어려워졌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이 스포츠 강국이 된 데에는 감독과 코치진의 지도력, 부모님의 지원, 선수 개개인의 노력과 인내 등 모두의 역량이 결집된 데에 있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체육도 정체기가 있었습니다. 전환점은 IMF 시절 메이저리그의 박찬호와 LPGA의 박세리였고 양궁 선수단이었습니다.   

   

    그리고 수영선수 박태완이 있었고 2002년 월드컵이 있었습니다. 히딩크는 과학적 코칭 방법을 우리 선수단에 적용했고 성공했습니다. 동양인들의 악과 깡이 아마추어가 아닌 프로에서도 통용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었습니다.      


    지금도 많은 스포츠 선수들이 성공할 때마다 어디에서 어떻게 교육받았는지 관심이 집중됩니다. 쉽게 이야기하면 국내파인지 국제파인지 구분하고 싶어 하고 이왕이면 국내파여서 우리도 잘하고 있다고 인정받고 싶어서 일 수도 있지만 여하튼 아직도 관심이 많습니다.     


    클래식 음악 분야도 서양에 비해 약자이고 차별이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포츠에 비해서는 육체적으로 동양인이 클래식을 하는 것은 진입장벽이 낮았습니다. 다만, 언어 장벽과 고가 악기의 접근성, 교습비 등으로 대부분 클래식 전공자는 본래 부자거나 천부적인 재능으로 기부를 받아야 가능하지 어중간해서는 대학 입학에 만족해야 했습니다.      


    그럼에도 여러 이유로 많은 학생이 독일, 이탈리아 등으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우리나라에도 상가나 아파트마다 피아노 교습소가 많이 있었습니다. 최근에 다시 많아지고 있지만, 여하튼 전 세계적으로 볼 때도 피아노 교습소가 가장 많은 국가 중 하나일 겁니다.      


    그리고 유명한 클래식 라디오 방송과 음악다방이 있었으며 클래식을 듣기 위한 고가의 전축, 스피커 구매가 성공의 표상인 적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클래식 음악 애호가들을 비난하는 것은 아니지만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 클래식 음악을 이해하는지 그리고 즐기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물론 판소리나 가극 등도 깊게 들어가면 나름의 공부가 필요하고 전문 훈련을 받아야 합니다. 아직도 도제식 교육만을 시행하는 이유를 잘 모르겠지만 여하튼 서양음악고 비교해도 배우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한국 고전 음악은 그냥 듣는 데로 어느 정도의 안내만으로도 금세 흥얼거리며 즐겁게 따라 할 수 있습니다.      


    한국 고전 음악은 현장 음악이고 함께하는 음악입니다. 물론 대금, 가야금 산조 등은 스피커를 통해 들어도 충분히 즐길 수 있지만 판소리는 역시 공연을 봐야 합니다. 저는 동서양 어디의 예술이 더 우월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동양의 예술인 판소리, 경극, 가부키 등은 점점 사라지고 서양 예술로 대체되는 이유에 전승 교육방식도 한몫한다고 생각합니다.      

판소리 한 장면

    한국 전통 예술을 지키고자 국가가 나서 상당히 많은 지원을 하고 있습니다. 경극과 가부키도 마찬가지입니다. 유물을 관리하듯이 하고 있습니다. 물론 서양 예술에 비해 재미가 없게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소리도 익숙하지 않으며 움직임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모르니 재미가 없을 수밖에 없습니다.      

가부키 공연

    그렇다면 우리는 오페라를 볼 때 이런 걸 별도로 공부하지 않아도 충분히 즐길 수 있나요? 헨델의 <리날도(Rinaldo)> 중에 <울게 하소서(Lascia ch'io pianga)>라는 아리아를 카스트라토(castrato)가 여성보다 높은 키로 부를 때 카스트라토의 슬픔도 이해하지 못하면서 감동을 느끼기는 쉽지 않습니다.      

영화 파리넬리 포스터

    마찬가지로 중국 경극 <패왕별회(霸王别姬, Farewell My Concubine)>의 우희 역을 맡은 장국영의 애절한 노래나 일본 가부키의 여장 남성 배우인 온나가타(女形)의 몸짓과 사미센 연주를 처음 보고 감탄사와 무릎을 치기는 어렵습니다.      

영화 패왕별희

    유홍준 작가의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슬로건처럼 아는 만큼 보이는 법입니다. 어떤 예술이든 기본 지식은 필수입니다. 즐기기 위해서는 자주 노출되고 어느 정도 사전 공부가 필수적입니다. 그리고 서양 예술의 초기 교습소처럼 어린 시절에 경험할 수 있는 교습소가 많이 있어야 합니다.      


    피아노, 기타, 댄스 학원을 다닌다고 모두 연예인이 되는 것이 아니듯이 판소리를 하며 평생을 살라는 게 아닙니다. 서양은 예체능에도 근대교육 방식을 적용했지만 동양은 그러지 못했습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 서양의 펜싱, 오페라 교습소와 중국과 일본의 무도관, 그리고 바둑, 장기의 단증 개념을 무도에 적용했습니다. 결국 일본 사무라이 문화의 전파는 검도, 유도, 가라데 무도관의 개방이 한몫했습니다.      


    일본은 검도를 서양인에게도 가르쳤으며 유술의 달인(마에다 미츠요)은 브라질로 이민 가서 그곳에서 아예 그들의 신체에 최적화된 브라질 유술(주짓수)을 창시합니다. 그들은 세계 곳곳에 일본의 야마토(大和) 정신을 전파합니다. 그러나 중국의 무술 도장은 미국에서 개관해도 중국인에게만 가르칠 수 있었고 도장의 오의(奧義, 깊은 뜻)는 직계에만 전수되었습니다.      

마에다 미츠요

    직계가 죽거나 없으면 아무리 훌륭하고 강력한 무술도 사라지게 됩니다. 형만 남고 오의는 없어지는 희한한 상황이 생기게 됩니다. 태권도 협회는 초기 일본의 도장을 연구하고 그들의 개념을 잘 적용했습니다. 만약 당시에 민족의식을 발휘해서 중국식으로 갔다면 지금 아무도 태권도를 기억하지 못할 겁니다. 


    공자는 악기를 타며 노래를 즐기는 등 시, 서화, 음악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습니다. 그런 유자(儒者)를 묵자(墨子, 중국의 사회주의자)는 비난합니다. 여하튼 제사와 관련이 깊은 제례(祭禮) 음악을 공자는 당연히 중요하게 여겼으며 이런 전통으로 조선의 선비들은 시, 서화에 능통했습니다.     

 

    그 많은 선비 중 단연 으뜸인 사람이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1786~1856)입니다. 그는 조선의 서예가, 화가, 금석학자, 실학자였습니다. 그는 과거 급제 후 관료로 성공했지만 여러 사건에 휘말려 제주도 등지에서 오랫동안 귀양살이를 합니다.      

김정호가 금석학으로 밝혀낸 진흥왕 순수시

    그는 16세 북학파의 대부격인 박제가(朴齊家, 1750~1805)의 제자가 되었으며 아버지를 따른 연행(連行) 길에서 당시 연경의 학자 옹방강(翁方綱)과 완원(阮元)을 만난 이후 학문 활동에 큰 도움을 받게 되었다. 옹방강은 일찍이〈사고전서 四庫全書〉의 편찬에 관여했으며, 경학(經學)에 정통하고 문장·금석·서화·시에 능한 학자였습니다.      


    김정희는 조선 금석학을 반석 위에 올렸습니다. 그는 제주도와 함경도 유배 기간 꾸준히 연구와 집필했으며 추사체도 이 시기 완성되었습니다. 그의 작품과 연구는 청과 일본에 알려졌고 조선에서보다 인기가 있었습니다. 그의 문하였던 흥선 대원군 집권으로 재평가되었다가 북학에 대한 반감으로 묻혔던 업적을 일제강점기 일본 학자인 후지츠카 지카시(藤塚鄰, 1879~1948)에 의해 꽃을 피우게 됩니다.      


    그는 청의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하는 북학파였습니다. 그가 서예, 시문, 그림에 능했다면 그의 스승 박제가(家, 1750~1805)는 모든 방면의 천재였습니다. 박제가는 서자(庶子)이면서 천재였기에 엄청난 울분이 있었고 이를 알아본 정조에게 발탁된 후 그 역량을 뽐냈지만 정조(正祖, 1752~1800) 사후 역사에서 사라집니다.      

박제가

    다만 그의 글은 남아 후대에 전해지니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 <북학의>에서 '소비는 단순한 소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재생산을 자극하는 것'이라 주장하며 '생산과 소비의 유기적 관계'를 정리하고 거래를 위한 상업과 무역의 중요성을 주장했습니다. 그의 소비, 생산 논리는 케인즈(John Maynard Keynes, 1883~1946)의 주장과 일맥상통하는 것으로 오히려 빠른 주장이었습니다.      


    이는 경제 이론적 측면보다는 실사구시로 조선의 선비들이 부를 천대하는 위선을 비판하며 사치의 정당함을 주장하며 정립된 사상으로 보입니다. 그는 당연하게도 신분제에 대한 강한 거부감과 과거제도의 부당함(결국 관직이 세습되는 현상)을 비판했으며 정조의 문체반정(文體反正)에도 소극적이지만 저항을 합니다.     

 

    그는 조선의 폐쇄성과 배타성, 허례허식과 동력을 상실한 지 오래인 허울뿐인 북벌론(北伐論)을 비난하고 북학과 서양 기술 도입 등 부국강병을 적극적으로 주장했습니다. 그는 시, 그림, 글씨에 두루 뛰어났으며 서체도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었고 제자였던 김정희의 추사체에도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합니다.      


    조선의 선비들에게 예술은 단순히 따라 하는 수준이 아닌 직접 즐기는 지식인의 한 방면이었고 글과 함께 자신의 사상을 표현하는 방편이었습니다. 당연하게도 르네상스인들처럼 다방면에 통달한 만능인이었고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조선은 물질적으로도 풍요롭고, 문화적으로도 향기 나는 사회였습니다.         


    동양은 동양 나름의 예술을 발전시켰습니다. 특히 유학의 종묘제례, 불교예술, 도교미술 등이 발전했습니다. 당연하게도 예술은 왕, 종교와 관련되었으며 기준을 제시합니다. 이후에는 귀족 등이 추종하게 됩니다. 국가가 만들어지면 먼저 왕과 신하의 예법을 정립하고 사가(私家)의 풍속이 뒤따릅니다. 풍류가 먼저 만들어지고 법을 제정하는 경우와 법이 제정되고 예법이 정착되는 경우가 있지만 조밀한 법을 만들지 않고 관습적으로 행하는 예법이 더 다양한 법입니다.     

 

    유교의 예법은 법과 경전에 없으면 옛것을 살피고 가장 유사하거나 합리적인 방법을 선택합니다. 조선은 양반의 관혼상제를 위해 주자의 ‘가례(嘉禮)’를 바탕으로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 길례(吉禮), 가례(嘉禮), 빈례(賓禮), 군례(軍禮), 흉례(凶禮)’를 제정했으며 후대에 평민으로 확대됩니다.      

    음악 이론서이자 해설서이며 고증기록이기도 한 성현(成俔)의 악학궤범(樂學軌範)도 성종의 관심과 지원으로 편찬되었습니다. 성종(成宗, 1457~1494)은 조선의 예법을 완비한 왕으로 성리학을 정점으로 문화강국임을 천명한 왕이었습니다. 임진왜란(壬辰倭亂, 1592년~1598)과 병자호란(丙子胡亂, 1636.12~1637.1)을 거치면서도 살아남은 이 책들은 사라지고 훼손된 예술을 다시 살릴 수 있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악학궤범

    특히 악학궤범은 음률의 원리와 악기, 악보, 복식을 그림과 함께 세밀하게 기록한 교범 같은 책으로 전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의 책입니다. 더욱이 성현은 이 책에 한글로 써진 처용가와 정읍사 등의 향악도 수록해서 당시의 예술을 지금도 알 수 있도록 했습니다.     

 

    조선은 예술과 문화의 나라였습니다. 이렇듯이 <악학궤범>은 음악 이론과 악기편성, 악보나 악곡 등의 음악 문화 전승이라는 음악학 분야에서의 가치만이 아니라, 국어학과 미술사, 복식사에도 중요한 의미가 있습니다.     


    물론 조선시대 지배층이 향유하고 있던 한문학(漢文學)의 양식 가운데 가장 널리 확대되었던 것이 한시(漢詩)였습니다. 한시는 조선 후기까지 양반의 학문과 여가를 대표하는 문학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와 별개로 고려 때부터 유행했던 시조 문학도 한몫을 합니다. 시조(時調)는 한국 고유의 정형시입니다. 기본 형식(평시조의 경우)은 3장 6구 4 보격 12 음보로 총 45자 내외이며 3장은 각각 초장, 중장, 종장으로 부릅니다.      


    이 시조에 무반주로 가락을 붙여 여유로운 노래처럼 읊는 것이 유행하였으며 '시조창'이라고 하였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 갈수록 시조창의 템포가 점점 빨라졌다는 사실입니다. 시조 여러 개를 이어 하나의 시로 만든 '연시조'라는 새로운 형태도 발전합니다.      


    서민층에는 판소리가 유행합니다. 판소리가 언제 성립했는지에 대해 정확하게 말하기는 어려우나, 17세기 중·후반 무렵에 서민층을 기반으로 하여 성립했다고 보는 것이 통설입니다. 판소리는 인간의 희로애락을 음악적으로 표현하는 일종의 공연예술입니다.      


    판소리는 18세기에 독자적인 공연예술로 정립되어 성장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극적 표현이 확대되었으며 주제도 <춘향가>, <심청가> 등 12마당으로 정리되었습니다. 19세기에는 양반 좌상객, 중인 부호층 등이 판소리의 주요 향유층으로 등장하기 시작했고 후원자로서 역할로 판소리 발전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또한 예술적 수준이 높아지면서 명창의 사회적 위상이 높아졌으며 여성 소리꾼이 등장하기도 했습니다. 구전심수(口傳心授)로 전승되는 판소리에서는 사승(師承) 관계도 유파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요소이며 동편제와 서편제도 이 시기에 정립됩니다.      


    명창은 아니지만 신재효(申在孝, 1812-1884)는 많은 소리꾼을 후원하고 이론을 정립했으며 〈춘향가〉, 〈심청가〉, 〈박타령〉, 〈수궁가〉, 〈적벽가〉, 〈변강쇠타령〉 등 판소리 여섯 마당 사설을 정리했습니다.      


    조선은 춤에도 독창적이고 뚜렷한 발전을 이루었습니다. 조선은 유학의 예법과 오랜 불교의 승무, 무속신앙 등이 결합되거나 교섭하여 중국과도 다른 독창적인 장르로 나아갑니다. 궁중의 연회나 사신을 접견할 때 주로 추는 태평무와 같은 궁중춤, 교방을 중심으로 발전한 교방춤, 사자무와 같은 민속춤이 있었으며 교방춤 등은 중인들이 하던 가곡과 더불어 시행되었습니다.      


    일부 양반들이 즐기던 춤으로는 양산양반춤이 남아있습니다. 그러나 가혹하게 철저했던 유교 국가이며 신분 사회였던 조선에서 예인의 삶은 결코 추천하기 어려운 직업이었습니다. 철저하게 유학적 가치에 적합한 예술만 지향했던 조선의 예술은 정조 때까지 신분에 갇혀 있었으며 활로를 찾지 못합니다.      

대전 양반춤

    물론 청과 일본도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만, 조선에 비해 청과 일본은 서양 문물이 어느 정도 유입되었으며 상공업의 발달로 신흥 계층이 발달하며 예술에 대한 수요가 늘어나며 경극과 가부키 등 종합예술이 상업화합니다.    


    서양은 철학뿐 아니라 예술적 근원도 그리스 연극에 기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스 연극도 디오니소스에게 바쳐지는 종교의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디오니소스 축제는 1년에 4번 시행되었는데 봄에 열리는 제전은 비극으로 겨울에 연 제전은 희극으로 발전했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단순히 극을 진행한 것이 아니라 현대와 유사한 연극 경연대회를 했으며 기원전 5세기에는 완전한 전성기를 맞았고 범국민적인 행사로 엄격하게 배우를 선발했으며 선발된 배우는 존경을 받았습니다.      


    이 연극 경연대회에서 18회나 우승했던 소포클레스(Sophocles, BC 496 ~ BC 406)는 최고의 연출가이자 작가였습니다. 그의 대표작은 《아이아스 Aias》 《안티고네 Antigone》 《오이디푸스왕 Oidipous Tyrannos》  등이 있으며 지금도 그리스에서는 공연되고 있을 정도입니다. 인물들 간의 갈등과 보복, 복선의 교묘한 배치는 결국 비극으로 치닫습니다.      


    배우, 음악, 무대연출 등의 발전과 훈련도 동시에 발전했습니다. 결국 이런 연극적 요소는 로마로 전파되었으며 콜레세움에서 황제를 위한 축제가 되었습니다. 그리스 문학은 비극과 희극뿐 아니라 동시대에 살았던 헤로도토스(Herodotos, BC 484? ~ BC 425?)의 <역사>에도 반영되었습니다.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을 사실 그대로 기술한 것으로 평가받는 <역사>는 시 낭송 형식으로 작성되었습니다. <역사>가 없었다면 마라톤 전투, 크세르크세스 왕과 페르시아 군, 테르모필레 전투, 살라미스 해전을 현대에 되살리지 못했을 정도입니다. 이와 더불어 신전을 비롯한 그리스의 건축 예술은 이후 서양의 모든 예술 사조에 근간을 이룹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詩學, Poetica)>에서 비극을 문학의 최고 형식으로 극찬하며 역사, 이론 등에 대해 논합니다. 재미있는 것은 다른 저서처럼 현재 남아있는 시학은 청강생의 필기 노트로 다소 명확하지 않은 부분도 있지만 그리스 철학이 활발히 재논의되었던 르네상스 이후 예술 분야의 바이블처럼 여겨지고 있습니다.     


    로마에서 중세를 거치며 이런 종합예술은 사라졌고 왕과 귀족을 위한 여흥으로서만 존재합니다. 다만, 시문학 형태는 기사문학(騎士文學, Dichtung des Rittertums)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물론 중세의 수도원을 중심으로 다양한 문학작품에도 운문 형식의 글이 있었으며 종교, 국가, 기사, 사랑을 한데 담은 기사문학을 대표적으로 분류합니다.      


    기사문학은 12세기부터 16세기에 걸쳐 프랑스·영국을 비롯한 유럽 각지에서 유행한 운문과 산문의 이야기 문학이며 십자군을 배경으로 하여 12세기 후반에는 운문으로 써지기 시작하였습니다. 이전의 무훈시(武勳詩, Chanson de geste)는 실제 역사적 인물을 다루었다면 기사문학은 허구의 틀 속에 기사가 종교적 의무와 세속적 의무, 특히 여성에 대한 사랑과 헌신 등의 현대적 관점의 기사도를 다루고 있습니다.      


    광장이나 궁정에서의 음악을 동반한 설화문학에서부터 문자로 읽는 서기문학(書記文學)으로 이행이 진행되었습니다. 또한 운문 형태는 산문화되었으며 다양한 언어로 쓰였고 롤랑의 노래(Chanson de Roland)처럼 무훈시와 기사문학이 혼합되기도 합니다. 이와 같은 기사문학의 대중화와 전파는 15~16세기 인쇄술이 보급됨에 따라 양적으로 증가했으며 전 유럽에서 유행하게 됩니다.      

롤랑의 노래

    르네상스기에는 상류계급·귀족·문인들에게 애독되었고 산문 형태의 새로운 작품도 시도되었습니다. 그러나 철 지난 기사도와 현실에 대한 통렬한 비판을 가한 세르반테스(Miguel de Cervantes Saavedra, 1547~1616)의 <돈키호테(Don Quixote, 1605)> 등과 같은 작품에 의해 기사문학은 종지부를 찍습니다.      

돈키호테

    이 시기에는 궁정문학의 태동기로 궁정 소속 직업 시인도 있었습니다. 르네상스기의 많은 예술가들과 마찬가지로 예술은 권력과 재력을 갖춘 후원자를 필요로 했습니다.     


    셰익스피어(William Shakespeare, 1564~1616)가 이런 기사문학의 마지막 시대와 새로운 시대에 등장하며 영국의 절대왕권 성립 기인 엘리자베스 1세 시기에 활동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릅니다. 셰익스피어에게 이전의 모든 철학, 예술, 역사는 엄청난 자양분이었으며 적절한 경쟁과 왕실의 지원 등에 힘입어 이전 세대의 작품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도의 작품을 써냅니다.      


    셰익스피어는 영어 어휘를 증폭시켰으며 영국을 정치, 경제, 군사뿐 아니라 문화적 측면에서도 자긍심을 고취시켰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유사한 시기에 르네상스가 한창이던 이탈리아에서는 오페라가 만들어집니다. 오페라는 르네상스 말기인 1597년 이탈리아 피렌체 바르디 백작 저택에서 탄생하였다.    

  

    바르디 백작 저택에 모인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극의 부활을 목표로 그리스신화에서 취재한 새로운 음악극, 오페라의 효시로 불리는 야코포 페리의《다프네》를 만들어서 상연했습니다. 오페라는 17세기 후반부터 전 유럽에서 성행하게 됩니다. 이 시기 독일에서는 궁전 연회를 위해서 궁정 소속 음악사가 활동했습니다. 음악의 아버지, 요한 세바스찬 바흐(Johann Sebastian Bach, 1685~1750)는 대대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그도 궁정 음악사로 대대적인 지원을 받으며 고전 음악을 집대성합니다.      

바흐

    프로테스탄트이기도 했던 그는 교회음악을 많이 창작했으며 음악교육에도 관심이 많아 교습용 작품도 많이 남겼습니다. 그를 이어 모차르트(Wolfgang Amadeus Mozart, 1756~1791)와 베토벤(Ludwig van Beethoven, 1770년~1827년)이 고전 음악의 성체를 쌓았습니다. 특히 모차르트는 <피가로의 결혼, 1786>, <돈 조반니, 1787>, <마술피리, 1791> 등 당시 유행하던 오페라를 작곡했습니다.      

모차르트

    지금은 그의 천재성에 감탄하지만 당시 진중했던 오스트리아 궁정의 정서에는 맞지 않았던 것 같습니다. 다만 마술피리는 앞서 그의 다른 오페라와 달리 소박한 가곡, 익살스러운 민요, 진지한 종교음악, 화려한 이탈리아 오페라 스타일이 고루 섞여 있어 일반인들도 쉽게 접할 수 있었고 당시는 뮤지컬 성격이 강해서 인기가 많았습니다.     


    여하튼 유럽은 프랑스 대혁명, 나폴레옹과 전쟁 등 엄청난 역사의 소용돌이 속으로 들어가며 예술은 더욱 국가와 긴밀해지게 됩니다. 여하튼 유럽은 연극과 오페라의 종합예술을 추구하며 전문 가수와 배우가 등장하고 혹독한 훈련이 뒤따르며 현대의 연예인과 같은 부와 명예를 가질 수 있게 됩니다.      


    이런 발전과는 다르게 유럽이 아메리카 대륙으로 식민지 진출하고 많은 흑인 노예들이 유입되는 과정에서 고전 음악의 변주가 시작되었습니다. 남부 농장 귀족들은 파티에 흑인들이 악기를 연주하게 하였으며 그들만의 예배를 허용한 곳에서는 교회음악과 아프리카 리듬이 교섭하게 됩니다. 이를 바탕으로 재즈(jazz)라는 퓨전 예술이 탄생했으며 오페라의 아리아처럼 또는 찬송가처럼 가사를 붙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결정적으로 1920년대 풍요는 미국의 유럽에 대한 문화적 열등감을 극복하는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팝 뮤직이 본격적으로 대중 앞에 드러나게 됩니다. 한편 발레는 르네상스 거치며 댄스가 체계화되고 정리되었습니다. 발레는 스포츠와 유럽 음악처럼 정형화되고 루이 14세는 1661년 무용가 양성기관인 왕립무용학교(Académie Royale Dance)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현재의 파리오페라극장(Opéra de Paris)의 전신입니다. 이후 스포츠처럼 기술적 진화를 거치며 현대와 같은 도약, 군무가 펼쳐집니다.      

   

에드가 드가(1834~1917) 작품

    19세기 이후 전 세계적인 예체능 분야의 급격한 변화와 발전은 이전에 본 적이 없는 새로운 양상을 보여주었습니다. 유럽 열강의 제국주의는 식민지의 확대와 함께 예체능을 전 세계로 전파했습니다. 예술과 스포츠는 종교와 함께 유럽의 식민지에서 식민지로 전해졌습니다.      


    기존에 있던 시민지의 전통 종교와 문화는 야만으로 간주되었고 백인 흉내를 내기 위해서 자신들의 음악을 버리고 열강의 문화를 익히며 무술을 버리고 스포츠를 배워야 했습니다. 물론 받아야 하는 문화가 좋지 않았다면 전면적인 개편도 없었을 겁니다.      


    역사적으로 다져진 유럽의 예체능은 그 자체로 완성도가 높았으며 대중적 인기도 검증된 상태였습니다. 또한 그들의 교습법과 교습서 또한 이미 다양하고 완성된 상황이었습니다. 예체능은 언제나 소통을 위한 도구이기도 합니다. 예체능의 교류를 통해 유럽과의 소통의 장이 열리기도 합니다.      


    물론 초기에는 비난과 조롱이 있었지만 동양의 예술적 소양은 유럽인의 마음을 여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그리고 서양인들의 예체능 교습법은 그동안 도학적이기도 했던 동양의 예체능을 서양식으로 바꾸며 근대 교육 체계의 한 축을 담당합니다.      


    K-pop이 빌보드 1위를 하고 영화나 드라마가 전 세계 등등 K-예술이 이토록 엄청난 수준이 될 것이라고 예견한 사람은 세종대왕, 박제가, 김구  정도였습니다. 우리나라처럼 전근대적인 국가에서 예인들의 운명이란 비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특히, 조선은 상업을 천대했으며 이방을 비롯한 아전들조차 녹봉을 지급받지 못하는 사회였습니다. 정통 고전 예술적 재능으로 왕의 신하가 된 소수의 관원들 이외의 직업적인 예인은 살아남기가 어려웠습니다. 창작의 자유와 후원 등을 통한 경제적 독립이 없는 예술은 아무래도 혁신적 발전이 부족합니다.      


    특히 오랜 식민지와 일본의 단계적이고 통합적인 전통문화 말살 정책과 기독교 탄압은 정상적인 문화 발전을 저해하기에 충분했습니다. 이 시기 왕조가 사라진 전통문화는 천대 시 여겨졌으며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전승이 쉽지 않았으며 식민지 이후에도 술집 문화로 남게 됩니다.      


    다만 서양 예술은 부유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되었고 전통문화와 차별화된 고급문화로 자리 잡게 됩니다. 이런 예체능은 해방과 6ㆍ25 전쟁을 겪으며 새로운 활로를 찾지만 군사독재와 숨 가쁜 근대화 시기, 일재 문화의 잔재들 사이에서 제한된 발전을 이룹니다.          

        

    예인들에게는 그들의 재능을 펼칠 무대와 절대적 자유가 필요했지만 민주, 자유, 인권 등에 대한 왜곡된 인식과 경제적 자립도가 낮은 국가에서 예술혼은 다소 저항적이었고 대중적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클래식과는 다른 대중문화를 선택하고 발전시킵니다.  

    

    서양의 예체능은 동양인의 유전에는 아직 각인되지 않았고 접할 기회가 적은 이들에게 익히는 것은 더욱 어려웠습니다. 비교적 접하기 쉬운 음악과 체육이 먼저 대중화되고 소수의 사람이 이런 제한을 극복하고 성공합니다.      


    초기 실패와 단발적인 도전은 오히려 군사독재의 추진력과 맞물려 엘리트 교육으로 집중 육성하게 됩니다. 언제 어디서나 천재들은 있었고 한반도의 젊은이는 성공과 부에 목말랐고 예체능은 공부와 더불어 노력에 따른 보상을 해주었습니다. 해방 후 시기는 정제되고 체계화되지는 않았지만 최소한 노력에 따른 작은 성취감을 줄 수 있었고 각 방면에 재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오랜 전제 정권의 신분제와는 다른 시대가 펼쳐진 것입니다. 특히 일본 군부가 서양과의 대결 속에서 강조한 정신 승리가 오히려 우리나라에서 꽃을 피웁니다. 가진 것 없는 나라에서 처음부터 기반도 없는 예체능으로 성공신화를 이루기 위해서는 처절한 노력과 인내가 필요했습니다.      


    재능만으로 성공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고 언어와 신체적 능력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밥 먹는 시간마저 줄여야 했습니다. ‘안되면 되게 하라’ 이야기는 군대뿐만 아니라 전 분야에 동일하게 적용되는 명제였고 실패하면 노력이 부족하거나 정신력이 문제였습니다.      


    물론 성공한 사람보다 실패한 사람이 많았지만 누구를 탓할 수 없었고 자신의 무능함과 나약함을 트라우마로 안고 살아야 했습니다. 일반 학교에서도 공부를 정신력의 문제로 인식하고 체벌이 가해졌으며 일제가 만든 유행어인 ‘조선 놈들은 말로 해서 안돼!’를 스스로 이야기했습니다. 당연히 개인 간의 우열이 즉각적으로 눈에 보이는 예체능 분야에서의 체벌은 당연한 의례였습니다.      


    우리도 할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기까지는 굉장히 오랜 시간이 걸렸습니다. 전 세계가 인정하기 전에는 만족하기 어려웠던 시절 당연히 감내해야 했지만 예체능을 만들고 발전시킨 서양의 예체능이 과학적, 합리적 교육법과 엘리트 관리법을 도입하고 더 나아가 생활 예체능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었음에도 출발이 다른 우리는 애써 외면했습니다.     


    물론 동서양 모두를 막론하고 예인들은 절대왕권의 폭력 앞에서 목숨을 걸고 그들을 울고 웃겼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가 말한 카타르시스(katharsis, 정화(淨化)는 그들만의 것이었습니다. 독일의 희곡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Eugen Berthold Friedrich Brecht , 1898~1956)는 비 非아리스토텔레스적 연극이론인 ‘서사시적 연극론’을 처음 주장했다.      

브레히트의 억척 어머과 자식들

    브레히트의 새로운, 연기자도 관객도 연극 속으로 빠져들지 말고 연극 밖으로 나와서 무대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라는 것이었다. 연극에서 맛보는 감정이입이나 카타르시스를 경계하는 새로운 연극론은 오랜 세월 정화의 반대편에 서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트라우마의 무의식을 예술로 정화시키는 역할이 없어지지 않습니다.     

    예체능은 별도의 무대장치가 없어도 실현 가능하고 전쟁 없이도 폭력적 본능을 대결할 수 있기에 가장 오랜 역사를 자랑하며 동서양이 유사합니다. 대규모 전쟁은 영웅이 나오고 그 사건을 예찬하는 예술이 발전했습니다. 뭔가 극적이고 드라마틱하며 개인의 영달이 아닌 대의명분, 종교를 위해 불나방 같은 인생을 살며 아름다움 연인을 위해 신분을 뛰어넘거나 버리고 전쟁 같은 사랑에 올인하는 모습은 보통 사람들의 삶에 실낱같은 희망을 제공했습니다.      


    동양은 자신들 고유문화를 배척하고 서양 예술을 받아들이고 발전시키고 역으로 고유문화를 덧씌우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당연하게도 서양의 주류는 동양의 문화를 즐길 뿐 직접 시현하고자 하지는 않습니다. 백인이 판소리를 한다는 것은 성대나 발음, 발성의 차이 때문에 힘이 들기도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습니다. 동양인이 이탈리아와 독일의 가곡과 오페라를 부르는 것하고 큰 차이가 없습니다.    

  

    그토록 많은 동양인이 오페라를 공부하고 국립극단의 주연을 차지하거나 한국에서 오래 살면서 지방말을 자유롭게 구사하고 멋들어지게 트로트를 부르는 외국인을 보는 것이 그렇게 낯설지 않습니다.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훌륭한 바이올린 연주가였습니다. 현대의 예체능은 정신병이나 재활훈련, 그리고 전인교육에 아주 훌륭한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예체능을 성공하면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을 수 있지만 그렇지 못한다고 해도 실패하는 인생은 아닙니다.      


    예체능으로 먹고살기 위한 재능과 노력이 공부보다 결코 작지 않습니다. 인간의 고유한 특징 중 하나가 문명을 만드는 것이라면 예체능이야말로 고도의 작업입니다. 사람의 일생 경험은 부족하고 정신은 항상 자유롭습니다. 뇌를 포함한 인간의 신체 능력을 신이 부여한 만큼이라도 확장시키고 유지하기 위해서는 지속적이고 활발한 자극이 필요합니다.      


    예체능이야말로 편향될 수 있는 인간은 완전하게 만드는 훌륭한 도구일지도 모릅니다. 평생 보고 듣고 공부한 독서 토론회만 하지 말고 희곡도 읽고, 웅변학원 다니듯이 K-드라마나 영화의 희곡과 시나리오를 구해서 읽고 연기를 해보는 것도 즐거운 공부입니다.      


    연극을 괜히 종합예술이라고 하는 게 아닙니다. 간단하게 스마트폰으로 영화도 만들어보고 상영도 하는 것이 삶에 직업적으로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공부는 책상에 앉아 있기만 한다고 능률이 오르지 않습니다. 칸트(Immanuel Kant, 1724~1804)는 자신의 사상과 삶을 일체화시킨 철학자 중 한 명입니다.      


    어려서부터 허약체질이었지만 규칙적인 생활과 건강관리로 강의, 연구, 저술 활동을 별 어려움 없이 이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가 하루도 어김없이 정해진 시각에 산책한 것과 관련된 일화는 유명합니다. 칸트는 예술을 분류하고 우선순위를 매기며 시문학을 음악에 앞에 두었습니다. 칸트는 비판적 이성, 상상력을 중요시하였고 이에 가장 부합하는 것을 시문학이라고 보았으며 음악은 너무나 직접적으로 감정과 연결되어 무비판적이고 상상력의 수준이 낮다고 보았습니다.      


    뭐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상상력을 수치로 구분하기도 어렵고 사람마다 다른 감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우위를 말하는 것 또한 애매합니다. 그저 칸트가 살던 시기, 독일의 척박한 환경과 정치적 상황이 위대한 철학자와 예술가를 배출했으며 상호 간 경쟁과 비판이 오히려 인류 문명을 한 차원 높였습니다.     

    한때는 우리나라에서 랭보(Jean-Arthur Rimbaud, 1854~1891)를 외우고 클래식 음악, 밥 딜런(Bob Dylan, 1941~) 같은 포크 송, 오페라 등을 듣고 이야기하는 것이 지식인의 품격이라고 여기던 시기가 있었습니다. 지적 허영(snobbism, 속물근성, 얕은 지식으로 허세를 부리는 눈꼴사나운 태도)이라고 비난하기도 하지만 이 또한 어떻게 보면 ‘구별 짓기’의 또 다른 모습이기도 합니다.      

밥 딜런의 앨범 재킷

    어느 국가나 사회든지 권력자와 가진 자는 일반인과는 다른 문화를 향유하고 싶어 하는 욕구가 있으며 사치로 나타납니다. 경제나 사회가 발전하며 일반인들이 이 문화에 진입하고 일반화되면 또 다른 ‘고급문화’를 원하고 예술은 충족시키기 위해 다른 양식을 선보입니다. 이런 신문화가 받아들여지면 새로운 사조로 성립하게 됩니다. 결국 이런 과정이 반복되며 예체능 분야는 변화합니다.      


    아무리 진정성(authenticity, 소비즘의 반대 개념)으로 포장하고 타인을 속물이라고 해도 인간의 욕망 중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가장 크다고 본다면 이런 비난은 박제가가 말한 조선 선비의 허위고 위선일지도 모릅니다. 다만 너무 수동적으로 예술을 대하지 말고 능동적으로 예체능을 하는 것이 새로운 사조를 만드는 방법일 수도 있습니다.      


    작곡과 작사도 해보고 유화나 난을 그려 보기도 하며 연주를 하고 야구와 축구를 하고 골프나 테니스를 칩니다. 혼자서 집에서 조용히 할 수도 있지만 동아리나 학원 등에서 배우고 같이 하며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는 방법입니다.      


    옛것을 찾는 방법이 장인을 잘 관리하는 방법은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방법입니다. 즐기기 위해서는 많이 듣고 직접 해봐야 합니다. 접할 수 없는데 우리 유전자 속에 언제까지 궁상각치우가 있을지 자신할 수 없습니다. 판소리를 해보지 않고 글과 이야기로 판소리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해 봤자 무슨 말인지도 모르는 젊은 이들에게는 오페라, 경극, 가부키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TV에서 연예인들을 불러와 인문학을 강의하고 질문하면서 모르거나 틀리면 웃고 비아냥거리는 프로는 조선시대부터 내려오는 오랜 편견과 관습의 결과일지도 모릅니다. 그들도 그들 나름의 공부와 노력이 있었고 충분히 존중받아야 하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연예인들이 벌어들이는 돈에 관해서만 관심 갖지 말고 우리도 즐겁게 예술을 즐기기 위해, 우리의 뇌를 활성화시켜 삶과 영혼을 좀 더 자유롭고 아름답게 하기 위해 병원에 가기 전에 능동적으로 참여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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