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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Mar 18. 2024

#21. 프란시스 베이컨

교육 잡설(敎育 雜說)

#21. 프란시스 베이컨  

   

    제2차 세계 대전 중 영국의 앨런 튜닝은 독일의 에니그마 암호 체계를 베이즈 정리를 이용해서 해독했습니다. 영어의 a/an에 해당하는 독일어 ‘ein’ 이 암호문에서 90%의 분포를 보인다는 것을 알아내고 알파벳 3개로 이루어진 암호문이라면 일단 ein으로 가정하고 에니그마의 세팅을 역으로 추측하는 시도를 했습니다.  

    

에니그마

    이런 시도는 선험적으로 가설을 추정하고 확률 분포에 따라 시행해 보는 방법의 베이즈 확률론 개념과 유사하고 튜링이 수학적 방법을 사용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베이즈 확률론은 암호해독의 효과적인 방법론이었습니다.     


    베이즈 확률론, 베이즈 정리에서 조건부 확률 P(A|B)는 사건 B가 일어났을 때 사건 A가 일어날 확률을 의미합니다. 즉, 이미 알고 있는 정보(B가 발생함)를 바탕으로 다른 사건(A)의 확률을 추정합니다. 수식으로 표현하면, P(A|B) = P(A∩B) / P(B)입니다. 베이즈 정리는 조건부 확률과 관련된 식인데, '사전' 정보를 가진 상황에서 새로운 정보(조건)가 주어졌을 때 '사전' 정보를 업데이트하는 규칙을 제시합니다.  

    

    현재 범용적인 수식은 P(A|B)= [P(B|A)*P(A)] / P(B)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베이즈 정리는 조건부 확률의 원칙에 기반하며, 이를 통해 주어진 데이터나 상황에 따라 주관적 확률과 객관성을 유지하며 가설에 대한 확신도를 업데이트하는 방법입니다.     

 

    여기까지 간략하게 소개했지만 이미 책을 덮은 독자도 있을 겁니다. 베이즈 확률론은 지금은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다양한 분야에 사용되고 있지만 과거에는 그러지 못했습니다. 미래를 예측하는데 과거의 정보(확률)를 가지고 미래(결과)를 업데이트하고 도출된 결과를 사전 확률화 해서 다시 결과를 예측하고... 이러한 절차를 반복하면 더 정확한 확률값과 오차값을 추정할 수 있다는 개념은 쉽게 받아들이기 어려웠고 비판도 많았습니다.      


    특히 도수 확률을 이용한 확률 추론을 하는 빈도주의 통계학으로 대변되는 전통 수학자에게 주관적 확률 개념까지 차용한 베이즈 이론은 귀신 들린 이야기나 다름없었습니다. 과거에도 보험계리, 금융, 의학 등의 분야에서 다양하게 사용되었고 현재는 컴퓨팅 능력의 확대로 분류, 회귀, 필터 기술을 활용하여 자연어 처리, 컴퓨터 비전, 음성 및 영상 분석, 머신러닝 등에 사용되고 있습니다.     

 

    네플릭스(Netflix) 등에서 선호하는 작품을 추천할 때 주요 알고리즘 중 하나입니다. 베이즈 정리가 사람들을 얼마나 헷갈리게 하는지 알 수 있는 유명한 일화로 ‘몬티 홀 문제(Monty Hall problem)’가 있습니다. 1970년대 방송인 몬티 홀이 진행하는 퀴즈쇼에서 일어난 상황인데 1990년 칼럼니스트 마릴린 사반트((Marilyn vos Savant, 1946~)가 잡지 ‘퍼레이드(Parade)’에서 이 문제를 질문한 독자의 편지에 대해 답을 하면서 유명해졌습니다.      


    문이 있는 방이 셋 있고 방 가운데 한 곳에는 스포츠카가 나머지 두 곳에는 염소가 들어있습니다. 문을 열었을 때 스포츠카가 있을 확률은 각각 3분의 1이며 퀴즈 참가자는 1번 문을 찍었습니다. 문제는 지금부터입니다. 이때 ‘스포츠카가 어디에 있는지 알고 있는’ 몬티 홀이 3번 문을 활짝 열었고 염소가 모습을 드러냈습니다. 그리고 홀이 참가자에게 물었습니다.      


    “선택을 바꾸시겠습니까? ”각 방에 스포츠카가 있을 확률은 3분의 1로 똑같고 참가자가 일단 1번 방을 선택한 뒤 진행자가 3번 방을 열었기 때문에(따라서 3번 방은 아니다) 1번 방과 2번 방에 스포츠카가 있을 확률이 1/2로 똑같을 것 같습니다.      


    바꿔도 기대 확률은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굳이 선택을 바꿀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우리의 직관과 달리 정답은 2번 방으로 선택을 바꾸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이와 유사한 게임을 하는 예능프로가 많이 있었습니다. 선택을 바꿀 경우에 스포츠카를 받을 확률이 3분의 2로 2배나 높아지기 때문이다. “Oh My God” 귀신의 조화였고 일부 수학자들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이 예는 수학, 통계학과에서 기본적으로 다루는 문제가 되었습니다. 여기서는 베이지 정리를 이용하면 간명하게 증명된다는 것만 말씀드리겠습니다. 더 이상 독자를 떠나게 할 수 없고 이 책의 논지에서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토머스 베이즈(Thomas Bayes, 1701~1761)는 영국의 장로교 목사였으며 확률론의 베이즈 정리를 최초로 서술했습니다. 그는 생전에 뉴턴(Sir Isaac Newton, 1643~1727)의 미적분에 관한 책을 저술하는 등 수학에 관심이 많았으며 말년에는 확률에 관심을 두고 여러 글을 남겼지만 살아있는 동안에는 출판하지 않고 원고를 받은 친구인 리처드 프라이스에 의해 1763년에 출간된 <확률론의 한 문제에 대한 에세이〉(An Essay towards solving a Problem in the Doctrine of Chances)에 담겼습니다.   

   

토마스 베이

    이러한 베이즈 정리는 거의 200년 동안 역확률((inverse probability)로 명명되었습니다. 베이즈가 정리를 출간하지 않은 이유는 베이즈 정리가 당시의 수학 수준으로는 설명하기도 이해하기도 어려웠습니다. 현재도 논문의 수와 관계없이 양자역학처럼 도처에서 사용하지만 받아들이지 않는 학자들이 존재합니다.     

 

    또한 당시의 과학자들은 프랜시스 베이컨의 귀납적 사고에 근거한 경험주의를 중시했습니다. 경험주의는 실험이나 관찰을 통해 얻은 증거를 중시하는 학문적 태도이지만 베이즈의 정리는 확률이라는 연역적 개념을 사용하기 때문에, 경험주의와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사전 확률의 개념은 경험주의적, 주관적 확률이라는 개념으로 일정 부분 일맥상통합니다.      


    다만 과학이 본질적으로 불확실성을 다루는 학문이고 주관적 확률을 객관화할 수 있다면 유효할 수 있다고 생각됩니다(현재는 수학 이론의 발달로 객관성도 담보된다는 의견이 다수설). 사실 완전한 수학적 증명과 개념의 정립은 한참 후에나 이루어지지만 인식론 차원에서는 논란이 지속됩니다.      


     어떻게 17~18세기 과학 발전과 더불어 수학이 이렇게 고도화될 수 있었을까요? 당연히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분명히 패러다임의 전환 시점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습니다. 당연히 사람들은 서양의 과학혁명을 이끈 대사건이 존재하기를 희망합니다.      


    물론 그전에 과학혁명, 지식혁명이 일어나게 되는 일련의 사건들이 존재했습니다. 십자군 전쟁(1096년~1270년), 몽골 유럽원정(1220년대~1240년대), 100년 전쟁(1337년~1453년), 30년 전쟁(1618년~1648년)을 거치며 유럽 인류는 종교, 정치, 경제, 문화사적 대변혁을 겪었습니다.     

 

100년 전쟁의 끝을 장식한 잔다르크

    기존 중세의 질서가 붕괴되고 귀족과 기사계급이 몰락했으며 전제군주가 나타나고 전통 지주, 귀족 이외에 금융과 제조업 등으로 부를 축적한 신흥 세력이 등장합니다. 물론 처음에는 정치적으로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하지만, 에너지가 축적되고 있던 시기임에는 분명합니다.      


    그들은 종교혁명, 르네상스 등을 지원하고 더 많은 부를 만듭니다. 또한 전쟁과 사치를 지원하고 확대하기도 합니다. 값싼 노동력, 자원 확보, 생산품 수출을 위한 전기, 양자역학, 전자공학이 발견되고 진화하기 전에는 역학의 시대였습니다.      


    증기기관은 산업혁명을 이끌었지만 사실 증기기관만으로는 대변혁을 이끌 힘은 없었습니다. 인류는 증기기관의 발명 이전부터 힘을 전달하고 작은 힘으로 큰 힘을 낼 수 있는 기계장치가 필요했습니다. 산업혁명 시기를 사진 등으로 살펴보면 복잡하고 거대한 톱니바퀴를 발견할 수 있습니다.    

 

증기기관과 거대한 바퀴

    고대 중근동이나 아시아가 유럽에 비해 우위를 점할 수 있었던 것은 수레바퀴나 톱니바퀴 같은 정교한 기계장치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수레바퀴가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부분 고대문명의 조각, 그림, 문자 기록을 통해 고대국가부터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합니다. 심지어 힌두교에는 차크라(Chakra)라는 수레바퀴가 상징으로 사용된 것을 보면 인류의 도구 중에서 칼, 토기와 더불어 가장 중요했던 것은 분명해 보입니다.     

차크라 수레바퀴

    특히 수레바퀴는 전차의 핵심 부품이고 초원이나 평야에서 전투를 치를 때는 기마보다 전차가 더 중요한 전력이었습니다. 전차는 현대의 기갑전력과 같은 역할을 담당했기 때문에 당연하게도 수레바퀴는 부와 권력의 상징이었습니다.      

이집트 전차

    바퀴에 대한 인류의 인식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확장됩니다. 전쟁뿐만 아니라 농사와 일상생활에까지 광범위하게 퍼집니다. 한편 수레바퀴의 개념은 정교한 톱니바퀴로 전환됩니다. 처음에는 소나 말이 끄는 힘을 전달하기 위해 바퀴가 사용되었다면 작은 힘으로 큰 힘을 전달하거나 방앗간처럼 원운동을 직선 왕복운동으로 전환하는 방법 등으로 톱니바퀴의 사용이 보다 구체화됩니다.    

  

경주 물레방아

    과학혁명 이후에는 힘을 가속하거나 감속하는 기어 개념의 토크(타우, 회전하는 물체의 물리량)를 이용한 발전기, 자동차 기어 등에 사용됩니다. 그런데 과학혁명 이전에도 이와 유사하면서 다소 다른 방향의 발전도 있었습니다. 어쩌면 이런 작지만 지속되는 변화가 서양의 과학혁명을 낳았는지도 모르며 동양과의 격차를 가속했는지도 모릅니다.      


    진자운동, 태엽 등 에너지를 이용해 크고 작은 톱니바퀴를 서로 맞물려 초, 분, 시침을 움직이게 하여 시간을 알도록 하는 시계가 바로 그것입니다. 조선에도 해시계, 물시계와 더불어 톱니바퀴를 이용한 시계인 혼천시계(渾天儀, 혼천의)가 있습니다.      

혼천의

    다만 유럽은 이 시계를 더욱 정밀하고 휴대할 수 있도록 만들어 냅니다. 이미 유럽은 1300년경 교회의 종탑에 톱니바퀴를 사용한 시계를 설치했으며 1364년 프랑스는 기계시계(중량시계)를 만듭니다. 갈릴레이가 1583년 흔들이 운동의 등시성(等時性)을 발견하고 1656년 네덜란드에서는 시계에 적용하기 시작합니다. 또한 1500년 독일의 P. 헨라인(p.Henlain)에 의하여 태엽이 발명된 후로는 각 부품의 개량과 함께 시계는 점점 정교해지고 소형화되어 운반에 편리한 휴대용 시계가 탄생합니다.      

최초의 휴대 시계, 헨라인

    서양이 시간, 약속, 계약 등에 대해 민감하고 군대 전략, 전술, 항해에서도 세부적인 개념이 동양보다 먼저 형성된 이유는 시계의 정확도 향상과 소형화로 휴대성이 높아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시간이 공공재로서 국민에게 주어지며 발생한 변화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근대를 시간의 일반화로 정의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휴대 시계의 발달로 산업화와 자본주의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 중 하나인 시간의 개념이 일상으로 스며듭니다.

      

    시계 제작 기술은 매우 정밀한 작업으로 많은 공정과 수작업을 요하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시계의 지침은 가늘고 가볍고 내구성이 높아야 했으며 휴대용 시계에는 에너지를 공급하는 장치와 톱니를 정교하게 배치해야 했습니다. 당시는 수학적으로 토크를 계산하지 않고 경험으로 만들었으며 단순한 대수 방정식으로 톱니바퀴의 크기와 톱니의 개수를 계산했습니다.      

정교한 기계장치

    이후 정밀 가공 기술 발달과 재료 공학이 발전하게 되었고 태엽, 스프링, 진자 등의 발명과 더불어 에너지를 공급하는 방법이 속속 연구되며 시계의 발전이 본격화되었습니다. 전자공학 이전의 시대였습니다. 이런 시계공들의 본래 직업은 자물쇠공이었습니다.    

  

    유럽인들은 르네상스, 무역, 금융업, 수공업 등의 발달과 사유재산에 대한 인식변화로 자물쇠를 좀 더 정밀하고 튼튼하게 만들기를 원했으며 이를 위해 여러 기계장치를 연구했습니다. 특히 자물쇠 잠금장치에 복잡한 톱니바퀴와 스프링을 적용했습니다. 열쇠공, 시계공은 스위스에 많았고 그들은 이후에 정밀 산업 발전에 밑 걸음이 됩니다.      


    그런데 스위스는 왜 시계공이 많았을까요? 칼뱅(Jean Calvin, 1509 ~ 1564)과 위그노(Huguenot,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칼뱅파) 때문이었습니다. 유럽은 전쟁과 전염병의 여파로 분열되어 있었고 혼란스러웠습니다. 특히 십자군 전쟁 이후 종교의 타락과 오만은 다양한 종교개혁(혁신)을 불러일으킵니다.   

   

    독일의 루터, 스위스의 칼뱅, 영국의 헨리 8세는 모두 구교로 세를 불린 가톨릭과 갈등을 겪었던 인물들이며 각 지역에서 종교개혁을 이끈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특히 칼뱅은 직업소명설 등을 주장하며 프로테스탄트의 핵심 사상을 설파합니다.     


   막스 베버(Max Weber, 1864~1920)는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근대 자본주의 성립과 발달에 기여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종교개혁 이전 가톨릭에서는 돈을 많이 벌어서 부자가 되는 것을 죄악으로 간주하였으며, 노동을 인간의 원죄에서 비롯된 고통이라고 보았습니다.      

막스베버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프로테스탄트, 특히 칼뱅파의 교리에서는 삶의 목적으로서 부를 추구하는 것은 비난받아야 할 죄악이지만, 세속적인 직업 노동을 통해 부를 축적하는 것은 신의 축복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세속적인 직업 노동은 신의 소명이기 때문에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고 완전함을 추구하는 것이 마땅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또한 프로테스탄트 윤리에서는 금욕주의를 강조하였는데, 금욕주의란 풍요로운 하느님의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 사치와 낭비를 배격하고 근검절약을 실천하는 생활 윤리를 가리킵니다. 금욕주의를 실천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지속적으로 욕망을 분출할 시간도 없이 직업 노동을 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따라서 사람들은 사치와 향락을 누리는 생활을 멀리하면서 최대한 많은 시간 동안 직업 노동을 하는 것이 올바른 삶의 자세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절제된 생활과 성실한 노동을 통해 얻은 것이라면 사적인 이윤 추구도 결국 신의 뜻이라는 인식이 자리 잡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러한 프로테스탄트 윤리가 널리 퍼지게 되면서 사람들은 기업경영과 상거래를 통해 이윤을 추구하는 사람들을 더 이상 탐욕적이며 이기적인 사람들로 여기지 않게 되었으며, 오히려 하느님의 소명에 따라 맡은 일을 성실하게 해내는 사람들로 인정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점차 자본가가 등장하게 된 것으로, 베버는 '직업 노동을 통해 자본을 증식하고, 창출한 부를 또 다른 부를 창출하는 데 사용하는 프로테스탄트의 윤리와 그 윤리를 기반으로 한 생활양식이 자본주의 정신을 출현시켰다'라고 강조했습니다.      


    이런 종교적, 사상적 흐름은 그동안 이중적 잣대를 들이대던 교황이나 왕과 새로운 관계 정립이 필요함을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사유화된 권력과 종교는 이미 가진 것을 내려놓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당연히 자본가나 신 지식인 등 변화를 희망하던 자들과의 충돌이 본격화됩니다.      


    가장 먼저 프랑스의 위그노(동맹의 의미)들은 자신들의 의견을 주장하며 교회, 왕과 위그노 전쟁(1562~1598)을 벌였고 결과로 대대적인 숙청과 살육이 진행됩니다. 낭트칙령(Édit de Nantes, 1598)으로 신앙고백을 인정하며 다소간의 위태로운 평화가 지속되었지만 결국 낭트칙령 폐지(1685년)로 위그노에 대한 대대적인 숙청이 단행되었습니다.      

위그노 전쟁, 몽콩투르

    이 시기 동안 프랑스 위그노(프랑스 인구의 5%, 100만 명 이상) 중 상당수가 인근 유럽지역(독일,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등으로 디아스포라(Diaspora)를 하게 됩니다. 이들은 프로테스탄티즘으로 무장한 기술 보유자, 하이테크 전사들이었습니다. 각각의 직업에서 최고가 된다는 것이 하나님의 선택이며 죽을 때까지 금욕하며 밤낮으로 일을 강조하고 이를 통한 부의 축적은 죄가 아니라는 칼뱅의 해석은 위그노를 각 분야의 기술 전문가로 만들기에 충분했습니다.      


    그들은 기존의 기술력과 이주한 지역의 특성을 통합하거나 발전시켜서 각 국가의 부르주아(有産者 , Bourgeois)로 성장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위그노들의 결정적인 영향력은 영국에서 나타났습니다. 네덜란드가 스페인과 독립전쟁을 하는 동안 위그노는 다시 영국으로 집단 이주하였습니다. 그것은 영국의 찰스 2세가 뛰어난 기술을 가지고 있었던 위그노를 받아들이기 위해 특별 이민법을 만들어 정착할 수 있도록 하였기 때문입니다.      


    영국은 베르사유 가구 제작자, 방직업자, 은세공업자, 기계 제작자, 시계공, 실크 디자이너 등 많은 기술자를 적극적으로 유치하였습니다. 영국은 위그노들이 가진 증기기관 기술과 면방직 공업의 기술을 기반으로 산업혁명을 주도할 수 있었습니다. 종교적인 박해를 피해 유럽 곳곳에 흩어진 위그노들 덕분에 당시 기술 후진국이었던 독일은 프랑스를 추월하여 기술 강국의 반열에 올랐고, 네덜란드는 무역 강국을 이루었고 스위스는 시계와 금융 산업 등 근대공업의 기반을 다졌습니다.     

 

    네덜란드는 유대인까지 유입되어 금융업이 동시에 발전하는 등 역사상 최대의 호황기를 이룹니다. 그런데 종교적 신념의 차이만으로 위그노가 유럽 자본주의와 산업혁명의 주역이 될 수 있었을까요? 위그노가 거의 남지 않은 프랑스의 산업은 퇴보하고 경제가 붕괴되며 변화에 뒤처지고 결국 낭트칙령에 명시된 똘레랑스(toleration, 寬容, 종교적 관용)도 프랑스 대혁명(1789년)까지 유명무실해집니다. 

     

    더불어 낭트칙령 폐지 100년 후에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난 게 우연으로 보이지도 않습니다. 낭트칙령 100년 후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제군주였으며 부유했습니다. 그는 단일 종교로 국가를 통치하겠다는 의지로 칙령을 해제해 버리고 자신에게 고분고분하지 않은 위그노에게 개종을 강요합니다. 이 시기만 30만의 위그노가 유럽 각 지역으로 도피하고 프랑스 경제는 급추락하게 됩니다.    

  

낭트칙령 폐지

    더불어 영국을 견제하기 위해 미국 독립전쟁 자금 지원과 별 소득이 없는 연이은 전쟁으로 인한 전비 부담, 세금 증액으로 인한 불만 고조 등으로 극심한 혼란을 겪습니다. 결국 그는 세금을 더 추가하기 위해 삼부회(三部會, États généraux, 귀족/가톨릭 고위 성직자/평민)를 소집하고 결국 평민이었던 부르주아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무너지게 됩니다. 위그노 때문만이라고 이야기하기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촉발 요인 중 하나였으며 연쇄적 사건의 촉매제 역할을 한 사실은 분명한 것으로 보입니다.     

삼부회 소집, 테니스 코트의 서약

    이 장황하고도 재미없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시계공이었습니다. 위에서 확인한 것처럼 그들은 프랑스의 위그노였으며 직업윤리와 실천 의지 그리고 높은 교육 수준을 보유한 초기 자본가였습니다. 그들은 기술에 대해 열린 생각을 갖추고 있었고 실제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스위스로 이주한 위그노는 자신들이 보유한 자물쇠, 시계 기술을 당시 스위스의 보석 세공 기술과 융합해서 정밀기계 분야에 독보적 역할을 수행합니다. 위그노의 이런 놀라운 일들이 가능했던 이유는 앞서 살펴본 것처럼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각자의 직업에서 성공한 사람이 결국 신에게 선택받았다는 자본주의적 선민사상과 함께 높은 교육 수준을 이유로 꼽을 수 있습니다.      


    위그노는 종교적 박해를 피해 새로운 땅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서, 교육에 많은 투자를 했습니다. 그들은 자녀들의 교육을 위해 학교를 설립하고, 교육을 장려했습니다. 그 결과, 위그노는 유럽에서 교육 수준이 가장 높은 집단 중 하나가 되었습니다. 이런 기술력과 교육 수준을 바탕으로 위그노는 섬유, 금속, 기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냅니다.      


    금융 분야에 집중된 유대인에 비해 당시 대다수의 제조업 분야에 종사합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 money)’는 그리샴의 법칙은 1558년 즉위한 영국 엘리자베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에 있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시기는 위그노들이 아직 영국으로 오기 전이었습니다. 경제 관련 이야기였지만 이 이야기는 프랑스가 위그노를 떠나보내는 과정을 보는 듯해서 씁쓸합니다.      


    여하튼 위그노들에게 스위스는 어쩌면 제2의 고향 같은 곳이었습니다. 위그노는 프랑스의 칼뱅주의자들이었습니다. 칼뱅은 1509년 프랑스 누용에서 태어났고 파리대학까지 프랑스에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칼뱅은 젊은 시절부터 프랑스 정부와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 스위스 제네바로 망명했고 제네바의 일반 시민에게도 엄격한 신앙생활과 예수에 대한 믿음 등을 강조하는 신정정치 체제를 수립하였습니다.      


    제네바는 그 후 종교 개혁파의 중심지로서 전 유럽에 영향을 끼쳤으며 칼뱅은 성년기의 대부분을 스위스에서 보냈지만 프랑스의 종교개혁을 위해 제네바에서 프랑스로 다수의 선교사를 파견합니다. 이전까지 루터교회가 다수를 차지하던 프랑스 개신교(위그노)는 스위스의 영향을 받아 칼뱅의 개혁교회로 전환되지만 프랑스 개신교 공동체는 결국 탄압을 견디지 못하고 소수 세력으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칼뱅이 주장한 교리에 대해 여기서 이야기하는 것은 불필요합니다. 그의 사상은 후에 유럽과 미국의 개신교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으며 수많은 논쟁도 있었습니다. 여하튼 당시 유럽 지식인들의 종교적 갈망을 기존의 교단은 충족해 주지 못하고 오히려 성경에 대한 불신만 있을 때 칼뱅의 주장은 매우 신선했습니다.      


    칼뱅은 신의 주권과 인간의 타락을 강조했고 기독교적 윤리관을 정립했으며 기독교 공동체를 강조했습니다. 그는 무엇보다 교육을 강조하며 제네바의 공교육 시스템을 정립하고 목사와 개혁가로 교육에 직접 참여하기도 했습니다.     

칼뱅이 설립한 제네바 대학

    이렇게 위그노는 프랑스의 박해를 피해 너무도 당연히 스위스로 가야만 했습니다. 이미 제노바는 종교개혁이 성공한 곳이었으며 그들은 생존을 보장받으며 또 다른 생존을 위해 수공업에 진력합니다. 시계 제작은 물리학과 역학의 이론적 발견이 실용화된 최초의 산업이었으며 시계공들은 그들이 하는 가장 섬세한 작업을 정확하게 수행할 수 있는 도구들을 고안했습니다.      


    그들은 열에 의한 금속의 팽창과 태엽의 탄성, 복원력을 연구하고 다양한 강철과 구리의 속성을 조사했습니다. 또한 몇몇 단순한 도구들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기계를 발명하고 개량했습니다. 이런 정밀 산업이 제네바에서 시작된 이유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위그노의 이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단순히 이동뿐 아니라 제네바의 시계 산업이 융성하게 된 이유로 칼뱅이 다시 등장합니다.      


    그는 철저한 금욕주의자로 사치품을 엄격하게 제한하는 ‘사치품 금지법’을 내리게 되는데 규칙적인 생활과 예배를 중요시 여긴 그는 시계를 사치품 목록에서 제외했고 사치품으로 지정되며 생활이 어려워진 제네바의 보석상들이 시계공과 결합하며 시계 산업의 중심지로 탈바꿈됩니다.     

 

    그런데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이런 시계를 전 유럽에 유통 및 마케팅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저 유명한 스위스 용병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항상 이동하며 전 유럽의 전장을 전전했기 때문에 휴대가능한 물품들을 가지고 다녔고 치료와 전술적 목적으로 약품과 시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영국 방직기

    그들의 휴대품은 유럽의 왕가와 귀족 등 돈 많은 고객들에게는 청나라의 도자기 이상으로 진귀했으며 사치스러웠습니다. 유럽의 왕가와 귀족은 도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스위스에 더 고가의 사치스러운 시계와 약품을 주문 생산합니다. 사실 18세기까지 스위스는 대량 생산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러나 유럽의 절대 왕정은 더 많고 다양한 상품을 원했습니다. 그 시기 영국의 위그노는 증기기관과 방직기를 발명하고 대량 생산을 시작합니다. 스위스도 이러한 기술을 이용하고 부품을 표준화해서 생산하기 시작합니다. 이런 스위스의 시계는 용병들이 자비로 마련해서 다양한 목적으로 휴대하는 총으로 기술이 이전됩니다.     


    15세기 총이 발명된 이후에도 사실 기존의 활을 압도할 무기체계는 없었으며 전장은 엄청난 무게의 갑옷과 말을 이용한 기사들의 세계였습니다. 기사들은 당연히 귀족이거나 돈이 많은 사람들이었습니다. 고가의 갑옷과 말, 창, 칼, 방패는 웬만한 경제력으로는 어림도 없었고 상비군이 없었기 때문에 야심 있는 봉건 영주가 비용을 대거나 아니면 전액 개인이 마련해야 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영국의 롱보우(longbow)는 장거리 무기이면서 파괴력도 강해 전쟁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또한 대포는 공성전을 무력화하기도 합니다. 이 시기에 화승총이 개발되었습니다.     

 

영국의 롱보우

    총의 역사는 생각보다 단순합니다. 초기에는 격발방식의 변화만 있었으며 18세기 되어서야 강선과 후장식 방식이 도입되고 19세기에 드디어 콜트(Colt)가 만들어집니다. 초기 화승총은 페드로넬, 아케부스, 매치록 머스킷 등 크게 세 종류가 있었습니다.      


    화승에 불을 붙여 격발 하는 방식이었으며 일본의 조총(鳥銃)이 아케부스를 포르투갈 상인에게 구입해서 개량한 것이었습니다. 통상 이야기하는 머스킷이 매치락 방식이어서 매치락 머스킷으로 불렀습니다. 기본 격발 방식은 유사하며 화약의 질과 총구와 총알의 표준화가 정밀하지 못해서 제한점이 많았습니다.     

 

일본의 조총

    17세기에는 휠락 방식의 피스톨을 휴대한 용기병(dragoon, 龍騎兵)이 등장합니다. 휠락은 격발 장치에 태엽과 황철석을 이용해 마찰로 화약에 불을 붙이는 방식이며 일회용 라이터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러니 기병이 총을 들고 쏠 수 있어서 용기병이라 불리었습니다.      

용기병

    18세기에는 부싯돌을 사용하는 플린트락 방식이 등장하며 총의 끝에 검을 꽂아서 사용하는 전술적 변화가 생깁니다. 미국의 독립전쟁, 프랑스혁명하면 떠오르는 전술 대형과 사격 등을 생각하면 됩니다. 19세기에는 퍼커션락의 격발 방식이 등장합니다. 퍼커션은 뇌관(percussion)이란 뜻으로 말 그대로 총알에 뇌관을 캡으로 삽입해서 포장하는 것을 말합니다. 이후에는 총알을 만드는 방법과 장탄 방법 등이 개량되고 표준화되며 현대적 개념의 총이 만들어집니다.      


   이런 16~18세기 유럽의 전장은 용병들이 머스킷 총을 들고 싸우던 시기였습니다. 그들은 창병과 함께 움직이고 여전히 기병과 포병이 주요 전력이었습니다. 태엽을 이용한 휠락 방식은 황철광 조각을 물고 있는 서팬틴을 마찰 바퀴에 대고 방아쇠를 당기면 태엽으로 움직이는 마찰 바퀴가 돌아가며 황철광과 부딪혀 불꽃이 일어나고 이 불꽃이 점화약에 닿으면서 총알이 발사되는 방식입니다.      


    화승총에 비해 기병도 쉽게 사용할 수 있었습니다. 이렇게 태엽을 이용한 휴대용 총은 암살용으로도 사용되는데 유럽에서는 사용금지 법안이 만들어기도 하며 귀족들이 휴대할 수 있도록 아름답게 제작되기도 합니다. 이런 총의 발전의 뒤에도 스위스의 장인들이 있었습니다.      


    태엽을 이용한 휴대용 시계의 개발은 총으로 이어졌고 용병들은 개량을 거듭합니다. 물론 현대식 개념의 총이 만들어지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만 인류의 기계, 기술의 발전에 위치를 차지하기에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토마스 모어(Thomas More, 1478~1535)는 <유토피아>에서 용병제도를 자세히 묘사합니다. “~ 그들은 정말 오직 전쟁만을 위해 태어난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언제나 참전할 전쟁터를 찾고 있으며, 기회가 포착되면 즉시 수천 명이 달려가 병사를 필요로 하는 자에게 적은 돈을 받고 봉사합니다. 목숨을 빼앗는 것이야 말로 그들이 유일하게 알고 있는 생계 수단이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고용자를 위해 매우 충성스럽게, 성심껏 싸우지만 언제까지 그렇게 할지는 보장할 수 없습니다. 적군이 좀 더 많은 돈을 지불하면 그들은 다음 날 당장 적군 측에 가담할 것이고, 다시 이쪽이 조금 더 지불하면 모레는 돌아온다는 생각으로 전쟁에 참가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탐욕의 유혹에 발 빠르게 굴복하면서도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렇게 피를 흘리며 번 돈을 방탕한 생활을 하면서 가장 더러운 방식으로 탕진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토마스 모어

    토마스 모어는 팩트와 픽션을 섞어서 용병제를 비난했습니다. 유토피아는 현실적으로는 아무 데도 존재하지 않는 이상의 나라, 또는 이상향을 가리키는 말로 원래 토마스 모어가 '없는(ou-)' '장소(toppos)'라는 그리스어를 조합해서 만든 말이고 영어로는 "not a place" 즉 "nowhere" 정도의 의미입니다.    

  

    모어는 소크라테스의 반어법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했습니다. 아마도 어디에도 없지만 어디에선가 벌어지고 있는 세상의 부조리를 이야기했는지도 모릅니다. 본래 전쟁이 빈번했던 시대에는 언제나 용병제도가 있었습니다. 용병을 가장 효율적으로 사용했으며 용병에 의해 제국이 무너진 국가가 아이러니하게도 로마였습니다.      

    오늘날 영세 중립국이기도 한 스위스가 당시에는 최고의 용병 수출국이었습니다. 지금도 스위스 최고의 관광지 중 하나가 '빈사의 사자'라는 조각상인데, 프랑스혁명에서 루이 16세를 지키다 1792년 전멸한 스위스 용병 786명을 기리기 위한 작품이기도 합니다. 지금도 로마 교황청을 지키고 있는 군대는 스위스 출신들의 용병이며 당연하게도 계기가 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1527년 신성로마제국의 카를 5세의 군대가 로마를 약탈하는 소위 사코 디 로마 전투가 벌어졌지만 스위스 근위대 500명과 오합지졸 시민군 4500여 명만이 로마의 성벽을 지키고 있었습니다. 당시 교황이었던 클레멘스 7세는 스위스 근위대에게 조국으로 돌아갈 것을 권고했지만, 그들은 끝까지 남겠다는 맹세를 지켜야 한다면서 교황의 권고를 거부했고 5월 6일, 성벽이 뚫리고 근위대는 189명만 남았지만 이들은 도시를 약탈하며 끝없이 밀려오는 신성로마제국 용병대에 맞서 '스위스 근위병의 저항'이라는 이름이 붙은 마지막 전투를 치렀습니다.      

    교황이 피신할 시간을 벌기 위해 성 베드로 대성당 계단에서 마지막까지 처절하게 싸워 근위병 189명 중 147명이 전사한 것이다. 이에 감복한 교황청은 이들을 무한히 신뢰하게 되어 교황 바오로 3세 이후 교황청은 오직 스위스 근위대만 고용하도록 못을 박았고 이 전통이 지금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당시 용병들이 오로지 돈을 목적으로 하는 직업 군인이었기 때문에 국가관이나 윤리 의식이 없었고 영주가 전비를 충당해 주지 않는 경우 지역을 약탈하고 불법행위가 난무해서 일반인들은 그들을 악마로 묘사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스위스 용병은 조금은 다른 의미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용병의 이상향 정도로 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들 용병들은 돈에 따라 움직이기 때문에 거의 모든 전쟁에서 이쪽 면과 저쪽 편 양쪽에서 서로를 발견할 수 있었고, 심지어 같은 부대에서 전우로 함께 싸우다가 어느 한순간에 양쪽으로 갈라져서 서로 숙명적인 원수처럼 싸우곤 했습니다. 한편으로 살아서 돌아오지 못하는 자의 상금 관련한 상속 문제로 지금의 재산권, 상속권이 발달했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십자군의 성전 기사단도 넓은 의미에서는 교황에게 충성하는 용병이었으며 그들 중 템플기사단(─騎士團 , Ordre des Templiers)으로부터 대부 금융업이 발달했다는 주장도 이런 이유였습니다. 대략 1467~1715년 기간 동안 프랑스 군대에 종사한 스위스 병사가 백만 명이 넘었고 스위스는 11세기 십자군 전쟁 이후 유럽에서 가장 용맹스러운 용병 국가로 이름을 떨치게 됩니다.      

템플 기사단

    특히 종교전쟁으로 불리고 최초의 국제전이었던 30년 전쟁에서 용병들은 엄청난(?) 활약을 하게 됩니다. 그러니 이 기간 동안 용병들은 과거의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전쟁, 훈족과 게르만족 등의 북방 민족의 이동, 몽고의 유럽 원정, 이슬람의 확장, 십자군 전쟁 등처럼 문명의 전달자 역할을 하게 되었습니다.     


    미국의 새뮤얼 콜트(Samuel Colt·1814~1862)는 1836년 증기선의 바퀴에서 영감을 얻은 '리볼버'(Revolver·뇌관식, 회전식 권총)를 세상에 내놓습니다. 미국 포드를 산업혁명, 표준 생산 방식의 효시라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콜트가 100년 전에 시작했습니다. 콜트는 어린 시절 대서양, 당시 증기기관 바퀴(혹은 캡스턴)를 보고 영감을 얻어 설계한 권총은 전쟁의 판도를 바꿨을 뿐 아니라 미국 산업혁명의 공신이었습니다.      

1836년 특허획득한 리볼버

    서부 개척 시대의 주요 전력이었고 남북전쟁의 핵심 무기였으며 대량생산체제의 아버지로 여겨지는 자동차왕 포드보다 100년 먼저 균일하고 호환 가능한 부품을 만드는 미국식 대량시스템으로 리볼버를 세상에 퍼트렸습니다. 이 콜트사의 리볼버는 공이치기를 뒤로 당기면 멈춤쇠가 올라가고 멈춤쇠가 실린더 뒤에 있는 래칫을 밀어 올리면 실린더는 전체 회전의 6분의 1을 정확히 돌아가며 그와 동시에 실린더 멈춤쇠가 실린더 바깥에 있는 작은 홈 안으로 떨어져서 공이치기와 총열이 완벽하게 정렬되면서 고정됩니다.    

  

    격발하고 공이치기를 당기는 절차만 반복하면 됩니다. 그러면 6 연발총이 발사됩니다. 기관총이 나오기 전까지 미국의 기병들은 이 6 연발 리볼버로 미국을 평정합니다. 당연히 이 완벽한 기능 위주의 단순한 구조의 권총은 유럽에 충격적으로 다가왔고 유럽은 한 발 늦게 산업화합니다.     


    이러한 시기를 모두 합쳐 혁명의 시대라고 합니다. 물론 문자혁명이나 농업혁명 등에 비할 수는 없다는 논쟁도 있지만 그래도 현대문명이 있게 된 원동력이었던 것은 분명합니다.      


    베이컨은 과학적 합리주의를 주장하고 관찰과 실험의 중요성에 대해서 심도 깊은 논의를 진행합니다. 이 시기의 전환을 연금술의 과학화라고도 볼 수 있습니다. 연금술의 환상과 환영을 떼어내고 관찰과 실험으로 자연을 탐구하고 신문물을 만들려고 한 노력과 방법론이 과학의 영역으로 전환되었다고 생각하는 견해입니다.      

    위그노가 시작했든 누군가에 의해 필연적으로 개화될 수밖에 없었던지 모르지만 이 암울하고 우울한 시기를 거치며 인류 문명은 도약하게 됩니다. 이런 점에서 도자기의 역사는 과학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는데 부족하지 않습니다. 유럽도 고대부터 석기를 제작해서 사용했습니다. 당연히 고대에는 식문화가 다양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릇을 포한한 식기류가 발전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먹는 음식이 비슷했기 때문에 신분의 차이를 보여줄 수도 없었습니다. 다만 제기(祭器)는 권위와 부를 상징했지만 일반 사람들의 식기는 먹는 것을 담는 용도 이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자본의 축적은 새로운 사치품을 찾았습니다. 사치품 중 유럽을 강타한 제품 중 하나가 도자기였으며 그중에도 청화백자였습니다. 이전에도 도자기는 이미 중국에서 유럽으로 수출되던 상품이었습니다. 그러나 육지로 이동되면서 결손이 많이 발생해서 양이 많지 않았고 터무니없이 비쌌으며 도착한 물품의 질도 왕가나 귀족들을 사로잡을 만큼 그렇게 훌륭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청화백자가 만들어지고 대항해 시대가 되면서 완전히 상황이 달라집니다. 청화자기는 1,000도의 가마와 유약, 코발트, 도자기공, 화공이 필요한 당시 최첨단 과학이었고 종합 예술품이었습니다. 청화자기는 원나라 중기부터 만들어졌고 청에서 절정을 이룹니다.      

청나라 청화백자

    명의 영향을 많이 받은 조선도 관요(官窯)를 중심으로 청화자기를 생산합니다. 그러나 임진왜란(유럽에서는 ceramic war라고도 부릅니다.) 이후 도공이 일본으로 넘어가고 일본의 예술과 접목해서 일본의 자기가 유럽에서 인기를 끌게 됩니다. 특히 이 시기는 명청 교체기로 바닷길이 막히고 조선도 자기를 생산하지 못하면서 모든 도자기 수출이 일본에서 이루어지게 됩니다.      

조선의 청화백자

    현재 반도체 전쟁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면 됩니다. 처음에 도자기는 실크로드로 전달되었지만 더 많은 상품이 필요했던 유럽의 상인들은 바닷길을 열었고 당시로서는 엄청난 물량이 바다를 통해 전해집니다. 당시 상품 대금으로 엄청난 양의 은이 청과 일본으로 전해지고 청은 이러한 무역역조 현상으로 아편전쟁의 늪에 빠져들기도 합니다.      


    조선은 임진왜란으로 도공도 많이 빼앗겼지만 가마도 대부분 소실되었고 특히 그림을 그리는 원료인 코발트가 비싸고 전량 수입이라서 철화자기로 방향을 유턴합니다. 후에 유럽에서 유사한 원료가 들어오지만 이미 질이 저하되어서 도태됩니다.      


    그런데 유럽은 아시아의 물품을 사는 것만으로는 소비도 충족하지 못하고 국부가 유출되는 것도 싫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유사품을 만들려고 하지만 실패합니다. 그러나 유럽에는 연금술사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현대의 실험과 관찰, 그리고 일지 작성이 일상화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다만 경질자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높은 온도의 가마와 고령토, 유약, 프린팅 기술이 필요했고 제작법은 기밀이었습니다. 이때 지른하우수의 과학 지식, 뵈트거의 제약 기술, 연금술이 합쳐져서 자기 제조 비법을 알아냈습니다.      


    1,708년 에렌프리트 발터 폰 치른하우스(Ehrenfried Walther von Tschirnhaus, 1651~1708)와 요한 프리드리히 뵈트거(Johann Friedrich Böttger, 1682~1719)는 작센의 드레스덴(Dresden)에 연금되어 연구 중, 열을 가하면 단단하고, 희고, 그리고 반투명한 자기를 만들 수 있는 흙을 발견하고 유약도 개발하며 도자기를 생산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뵈트거는 1,709년 아우구스투스 2세에게 보고했고 왕은 1,710년에 1,350도의 고열로 도자기를 구울 수 있는 공장을 마이센에 세웠습니다. 동일한 시기에 기술을 입수한 오스트리아, 프랑스도 자기를 생산하기 시작했으며 거리상 다소 떨어진 영국은 1,749년 토마스 프라이(Thomas Frye, 1710~1762)에 의해서 소 뼈가루(Bone China)를 넣은 자기로 특허를 얻었고 조쉬아 스포드(Joshia Spode, 1754~1827)는 프라이의 본차이나 기법을 활용해 고령토와 골회를 섞어 진짜 자기와 별 차이가 없는 제품을 만드는 데 성공했으며, 이때부터 본격적인 본차이나 상업화가 이뤄지게 됩니다.     


    한편 유럽은 대량 생산을 위해 동판화를 응용한 전사 인쇄 기법을 적용해 표면에 다양한 색과 무늬를 대량으로 인쇄하기에 이릅니다. 결국 분업화, 효율화, 표준화 등 과학기술을 접목한 유럽식 자기 제작 체계는 산업혁명과 만나며 질 좋은 자기 생산이 폭발하게 됩니다. 화약 무기처럼 시작은 아시아였지만 서양에서 완성된 사례 중 대표적입니다.      


    여담이지만 일본의 도자기 수출 과정에서 도자기를 포장제가 필요했던 일본의 도공들은 풍속화(우키요에, Ukiyoe, 浮世絵(부세회))를 목판화로 만든 종이를 사용했고 이를 본 유럽의 화가들(인상파)에게 영감을 주었다는 일화입니다. 청화백자로 청나라 풍이 일색이었던 유럽의 화단에 일본풍이 유행한 이유이기도 했습니다. 

우키요에

   이 이야기의 끝은 다시 프란시스 베이컨(Francis Bacon, 1561~1626)으로 돌아갑니다. 영국의 철학자 러셀(Bertrand Arthur William Russell, 1872~1970)은 17세기 초 거의 모든 중대한 지식의 발전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공격하는 것으로 시작됐다고 주장했습니다.    

  

    베이컨이 쓴 《신기관》이 바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방법론에 문제를 제기하며 등장한 책이기 때문입니다.《신기관, Novum Organum》이라는 제목은 아리스토텔레스 논리학 책인 《기관, Organum》에 맞서 새로운 철학적 방법론을 세우겠다는 도전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기관》이라는 책의 부제는 ‘자연의 해석과 인간의 자연 지배에 관한 잠언’으로 자연을 지배하기 위해 자연을 이해하는 방법을 탐구한 책입니다. 베이컨은 참된 지식을 세우는 작업을 ‘개미-거미-꿀벌’ 비유를 통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개미는 재료를 모으기만 하고 거미는 자신의 속에서 거미줄을 끌어내기만 하는 특징이 있으며 꿀벌은 꽃에서 재료를 모아 꿀을 만들어냅니다.      


    즉 관찰과 실험의 결과만 수집하는 경험주의자가 개미와 같다면, 독단적 추리만 강조하는 합리주의자는 자기 자신 속에 있는 걸 풀어서 집을 짓는 거미와 같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참된 철학자는 이성의 힘에만 의존하지도 않고, 실험 사실만 수집해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꿀벌과 같이 모은 재료를 지성으로 변화시켜 자연에 존재하는 참된 지식을 알아내는 사람입니다.      


    꿀벌의 방법, 이것이 바로 베이컨이 아리스토텔레스의 방법론을 대신해 세우고자 했던 새로운 방법론인 귀납법입니다. 물론 베이컨도 귀납법의 문제점을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현대 데이터 분석에서도 반드시 유의해야 하는 점입니다. 우리는 표본의 평균, 표준편차로 우리가 알고자 하는 모집단의 평균, 표준편차를 추정합니다.      


    그러나 귀납법은 반대 사례가 발견되면 결론이 무너지고 지금까지 쌓아온 문명이 흔들릴 수도 있습니다. 책이 출간되고 몇백 년 후에는 확률론과 피셔 검정력(Fisher's exact test power) 등을 도입하며 보강되었지만 기본 철학은 비슷합니다.     


    이러한 인문학적 통찰은 수도승, 연금술사, 수공업 장인인들에게 칼뱅과 더불어 새로운 시대를 여는 복음이 됩니다. 종교적 신념과 진리에 대한 갈망은 그들을 신세계로 인도했으며 인류가 한 번도 도달하지 못한 영역으로 안내했습니다.      


    이탈리아의 갈릴레이(Galilei Galileo, 1564~1642)는 이론을 정립하지 못했지만 관찰과 실험만이 새로운 질서를 발견할 수 있는 유일한 길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직접 관찰하고 실험을 통해서 얻은 지식이 아닌 기존의 상식은 온통 의심뿐이었습니다.   

   

갈릴레오와 망원경

    이러한 갈릴레이의 주장에 정당성을 부여하고 명분을 제공한 사람이 베이컨이었습니다. 그는 기존 지식 엘리트와 교단에서는 종교적 신념과 같았던 아리스토텔레스를 공격하며 자연을 연구하는 새로운 방법론을 제시했던 것입니다. 물론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미 그의 저서에서 귀납법에 대해 언급을 했습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귀납법을 인정하지 않았고 연역법만이 진리의 방법으로 간주했습니다. 또한 이후 기독교는 절대주의 세계관에 입각해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주장을 받아들이고 천동설, 삼위일체론 등이 정립됩니다. 그러니 베이컨의 귀납법에 관한 생각과 주장은 이런 기존의 패러다임을 송두리째 변화시키는 과격한 제안이었습니다.      


    베이컨으로 촉발된 과학 방법론에 대한 논쟁은 결국 영국의 아이작 뉴턴(Sir Isaac Newton, 1643~1727)에 의해 완성되었습니다. 뉴턴의 사과나무 일화가 실재였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이 일화는 관찰과 실험의 중요성을 이야기합니다.      

뉴턴과 사과나무

    지금도 많은 물리학과에서 뉴턴의 F=ma 등의 이론을 실험으로 증명, 재현하는 수업도 병행합니다. 재현 실험의 목적은 뉴턴이 일화처럼 자연에서 갑자기 연역적으로 물리법칙을 깨달은 게 아니라는 사실을 가장 먼저 교육합니다.     

 

    《신기관》은 헨리 8세(1509~1547)의 희한한 종교개혁이 선행되지 않았다면 그리고 베이컨이 정약용처럼 실각하지 않았다면 세상에 나올 수 없는 책이었습니다. 그는 책에 여러 성경 구절과 이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는 적당한 타협(?) 때문이었는지, 당시 영국 국교회가 로마 교황청보다는 느슨했는지 알 수는 없지만 최소한 종교적으로 문제가 발생하지 않습니다.   

   

    물론 영국도 처음엔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과학지식을 갈망하고 종교의 시녀로 허덕이던 이들에게 그의 책은 너무도 시기적절했습니다. 영국 왕립협회나 프랑스 과학아카데미 같은 새 과학단체가 잇달아 설립되었고 과학이란 배가 가진 막강한 추진력을 확인한 학자들이 합심해 공동 연구하는 바람직한 풍토도 생겼습니다(신기관에는 귀납법의 특성상 협업이 필요하다고 주장).      


    이로써 17세기 유럽발 과학 르네상스 시대가 열렸습니다. 법학자이자 철학자이고 고위 관료였던 프란시스 베이컨이 과학을 철학적으로 증명하고 현대 과학혁명의 초석을 놓았다는 것은 또 다른 아이러니입니다. 이러한 국가적 지원과 학문의 토대가 없었다면 뉴턴은 다른 나라에서 나왔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사실 베이컨이 그리스 철학자들에 대해 비난한 것은 그의 이론을 뒷받침하기 위해서였을 뿐입니다. 

     

    그는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를 가장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들의 논증 방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할 줄 알았습니다. 문제는 후대의 이들이 종교와 결합해 진리에 장막을 덮고 사람들에게 우상을 숭배하도록 강요하는 권력가와 종교 지도자라고 생각했습니다.      


    어쩌면 그의 비난의 화살은 동굴 속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그들을 동굴 속에 가두고 나오지 못하도록 막으며 이것이 신의 뜻이라고 호도하고 진리를 자신들만의 전유물처럼 통제하는 소위 지식 권력자들에게 향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베이컨은 인류사에서 방향성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로마나 중세도 천재적인 사람이나 사상들은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베이컨의 이야기처럼 우상에 갇혀 진실을 외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다수는 무엇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정확히 무엇을 변화시켜야 패러다임 전환(paradim shift)이 일어나는지 몰랐거나 알아도 외면했습니다.      


    패러다임을 처음 이야기한 토마스 쿤(Thomas Samuel Kuhn, 1922~1996)은 패러다임에 따른 변화란 세상이 바뀌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바라보는 방식이 바뀌는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당연하게도 자연, 세상은 그대로 있지만 이를 바라보고 해석하는 인간의 지각, 지식의 전환이 발생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야의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도 그렇듯이, 어떤 분야에 종사하든 모든 사람들은 나름의 관점, 세계관, 인생관을 갖고 살아갑니다. 쿤은 패러다임으로부터 패러다임으로의 이행은 강제될 수 없는 일종의 개종과 같은 경험이라고 보았습니다. 정상 과학의 옛 전통을 신봉하는 이들은 옛 패러다임이 모든 문제를 풀어 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에 패러다임의 자연스러운 변화는 불가능하고 혁명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과학의 혁명은 정상 과학이 더 이상 기존의 패러다임 안에서 아무런 힘을 발휘할 수 없을 때 나타나게 되는데, 그 방법은 대안을 모색하는 것과 기존의 패러다임을 포기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양자역학이 처음 발호했을 때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1879~1955)은 죽을 때까지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라며 경원시했습니다.      


    하지만 모든 혁명은 스스로를 파괴하는 방법을 취하기 때문에 ‘죽어야 산다.’라고 설명할 수도 있습니다. 베이컨은 그리스 철학이 자연을 고찰하던 방법 모두를 비판하지는 않았습니다. 다만, 신비주의로 빠지는 것을 경계했습니다. 인간이 신의 뜻을 알 방법은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1809~1882)처럼 가설을 세우고 관찰하고 실험해서 증명하고 다시 가설을 세우고…. 하는 일련의 과정을 거쳐 더 이상 의문이 없는 상태라고 생각했습니다. 공부는 어떻게 하는가 보다 무엇을, 왜 하는가 하는 방향성이 중요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베이컨은 분명 패러다임을 전환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여담으로 베이컨이 비판한 아리스토텔레스는 억울할 수 있습니다. 베이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모든 것을 비판하거나 연역법이 잘못된 추론방법이라고 주장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논증법은 그의 여러 학문적 업적의 일부분일 뿐이며 자연과학을 연구하는 다양한 방법론을 제시했을 뿐입니다.     

 

    그의 시대에는 귀납법적인 논증이 진리를 왜곡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릅니다. 당시 아리스토텔레스 사후 스토아학파가 나오기 전까지 주류였던 소피스트들의 논증법이 귀납법과 일맥상통한 부분도 있었고 자연에 대한 인식이 현대와는 사뭇 달랐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앞서 언급한 토마스 쿤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역학을 다시 연구하면서 과학혁명의 개념을 얻었습니다. 십자군 전쟁 전까지 그리스 철학은 오히려 이슬람권과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연구되었으며 유럽에서는 12세기가 되어서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저서가 번역되었으며 기독교적 해석에 따라 폄하되거나 추증되었습니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5~)는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적 원리를 통해 가톨릭의 철학과 사상을 학문적으로 재정립하고 보편적인 문화로 승격시켰으나, 이 때문에 근본적인 아리스토텔레스주의라는 오명으로 단죄를 받기도 했고 50년이 지나서야 교황의 조사로 성인이 되기도 합니다.   

   

토마스 아퀴나스

    14세기가 되어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체계가 교회의 교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고, 공부해야 할 정규 과목이 되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운동의 성질에 관하여 근본적인 의문들이 다시 제기되었는데, 특히 파리 대학과 옥스퍼드 대학의 학자들이 앞장섰습니다. 이런 변화에서 항상 아리스토텔레스는 비판과 오욕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래서 어떤 이는 현재의 모든 학문은 그의 저서에 주석을 단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을 하기도 했습니다. 무언가 시작이 있어야 에너지가 쌓이고 폭발하며 새로운 세계로 들어갈 수 있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이란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논증에 따라 탐구하고 연구해야 할 대상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는 “자연은 무엇인가를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 이 ‘목적’을 조사하지 않으면 안 되며, ‘원인을 향한 질문’에 대해서는 ‘왜’라는 말이 갖는 모든 의미에 대해 답하지 않으면 안 된다.”라며 끝없는 지적 호기심을 들어냅니다. 


    단테(Durante degli Alighieri, 1265~1321)의 <신곡>에는 당시 사람들의 염원과 고민이 함께 담겨있습니다. 그는 지옥(Iinferno)을 9개 층으로 두며 첫 층을 림보(Limbo, 경계)라는 주변, 경계로 두고 2층부터 진짜 지옥이라고 했습니다.      

림보에서 만난 그리스 철학자

    지옥인데 지옥이 아닌 이곳에는 불신자이지만(예수 이전의 성인과 세례 받지 못한 아이들 등) 경외하는 이들을 배치하며 불경함을 다소나마 해소합니다. 그리스 문명을 연구하는 유럽의 지식인들에게 면죄부를 선물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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