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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Apr 23. 2024

#26. 금융과 사람

교육 잡설(雜說)

#26. 금융과 사람


    만약에 지금 누군가 "다시 산다면 무엇을 공부하고 싶은가?"라는 질문을 누군가 내게 한다면 주저 없이 금융이라고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여러 공부를 했지만 인간이 살면서 가장 필요한 교육은 역시 금융업인 것 같습니다. 금융 이야말로 인간만이 할 수 있는 유니크한 삶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가 행복해지고 잘 살기 위해서라면 더욱이 금융(경제)이 중요합니다. 우리는 이미 많은 연구 논문과 책을 통해 인간이 농경 생활을 시작하며 자본을 축적했고 이를 지키고 빼앗기 위해 국가를 만들고 더 많은 양질의 경작지를 빼앗기 위해 전쟁을 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어렵게 공부하고 취직하고 가정을 이루고 살아가는 모든 이유가 사실 잘 살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근본적인 사실을 외면하면 안 됩니다. 이런 너무도 당연한 사실을 외면하고 고고한 척하는 순간, 표리부동(表裏不同)하게 될 수 있습니다.


    인류 역사의 당연한 과정을 외면할 때 발전을  더디게 하고 오히려 퇴보하는 결과를 초래한 예를 숱하게 보았습니다. 물론 잘 산다는 의미를 시대와 장소마다 다르게 정의할 수도 있고 굶주림과 병마 속에서도 신념과 희망의 눈빛을 보며 살 수도 있습니다. 


    다만 오랜 가난과 병, 폭정, 부의 집중 등은 안정적 관계를 혼란의 시대로 인도합니다. 역사에 물리적 법칙은 존재하지 않지만 경험적으로 결과를 잘 알고 있습니다. 요는 어떻게 이런 혼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연착륙시킬까입니다. 물론 많은 인류의 선지자와 구루는 그 방법을 이야기했습니다.


    인간 본성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는 그로 인해 발생하는 부정적 결과를 예측하게 하였고 균형을 이룰 수 있도록 본성을 이성과 대립시키며 백성을 교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 결과 종교, 철학, 역사, 경제 등의 학문이 태동했고 어느 정도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현대 사회는 너무도 복잡합니다. 대중 속의 고독을 이야기하는 것은 이제 구태이기까지 합니다. 여기서는 이런 복잡한 이론이 아니라 정말 단순한 이야기를 해보려 합니다. 얼마나 많은 잘 사는 사례가 있는지 알아보겠습니다.


    사실 잘 사는 는 방법은 별로 어렵지 않습니다. 자자손손(子子孫孫) 잘 살기는 어렵지만 한 세대에 잘 살기는 어렵지 않으며 그런 사례는 수없이 많이 있습니다. 잘 사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합니다. 돈의 흐름을 이해하고 잘 벌고 잘 쓰는 것입니다. 특히 다수의 사례에서 가르쳐 주는 한 가지 주제는 "사람에 투자해라"입니다.


    사기(史記)에 적힌 내용의 진위를 확인할 수는 없지만 반만 믿는다고 해도 여불위(韋, ? ~ BC 235)야 말로 "사람에게 투자"한 상인이었습니다. 여불위는 갖은 모략을 동원하고 자신의 애첩까지 내어주며 귀향온 자초(王, BC 281 ~ BC 247)라는 진의 왕족이 왕이 될 수 있도록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쉽게 말하면 도박을 했습니다. 결국 그가 왕이 되고 얼마 되지 않아 그의 아들이 진시황(帝,  259 ~ B.C. 210)이 됩니다. 


    여불위는 최초의 통일 국가를 보지 못하고 반란을 도모하고 제거당하지만 생전에 그의 권력은 대단했습니다. 여불위는 상국이라는 최고 재상이 되었으며 전국말의 역사서인 여씨춘추(呂氏春秋)를 제작하기도 합니다. 진시황은 그와의 권력투쟁을 하며 내실을 다졌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진시황이 없었다면 한나라도 세워지지 못했을지도 모릅니다. 여불위는 중국 역사의 필요악이었습니다.

진시황제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 ~ BC 44)에게 투자한 크라수스(Marcus Licinius Crassus, BC 115 ~ BC 53)는 더욱 극적입니다. 카이사르는 정복과 마지막 공화제의 권력자로 알려져 있지만 채무와 여자관계로 더욱 유명합니다. 카이사르는 엄청난 채무를 지고 있었고 심지어 살면서 더 많은 빛을 지게 됩니다. 그는 자발적 채무자로 빛이 쌓이는 것을 아랑곳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빛은 상당수가 군인에게 성과급으로 지불되었고 나머지는 여인들에게 고가의 선물 공세로 쓰였습니다. 카이사르는 그의 외모와 달리 엄청난 바람둥이였고 당시 로마 귀족들의 시각으로도 과도했습니다. 

카이사르

    그가 정치적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 크라수스는 고민 끝에 더 많은 돈을 빌려 줍니다. 결과로 로마는 카이사르, 폼페니우스, 크라수스의 삼두정치라는 기묘한 정치체제가 만들어집니다. 크라수스는 빌려준 돈의 대가를 누리지도 못하고 무리한 원정 끝에 살해됩니다. 이후 카이사르와 폼페니우스의 로마 내전이 발발하고 카이사르가 루비콘강을 건너며 공화정이 막을 내립니다. 후세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크라수스의 재산 총액은 약 1억 7천40만 세스테리우스라고 하며 이는 기원전 67년 로마 공화정의 연간 예산인 2억 세스테리우스에 근접하는 수준이었습니다.  또한 크라수스는 2008년 포브스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부유한 75인> 중에서 1698억 달러를 기록하여 8위를 차지하였습니다.

크라수스

    윌리엄 N. 괴츠만의 저서 <금융의 역사>에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 그리고 이후 로마의 금융 제도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기술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동양은 국가(정부) 관료가 징세(수)를 하는 반면 유럽은 징세를 하는 권리를 사고팔았다는 것입니다. 국가는 다소 저급한 금전 문제에 직접적으로 관여하지 않고 대리인을 내세워 비난을 회피하고 이득만 취했다는 이야기입니다. 로마 초기에는 주식회사 형태의 징세조합이 성행하다 결국 관료에게 바통이 넘어갑니다. 이미 로마에는 은행업, 환전상, 길드 등이 성행했고 손해배상(유한, 무한), 계약, 일종의 세금인 구호기금, 부유세, 연금 등이 흔했습니다. 또한 중세 유럽에는 부동산과 관련한 경제권인 통행료, 이용료, 어업수렵권 등 조건부 점유권, 관할권이 있었습니다.


    앞선 글에서 십자군이 유럽 전역에 대부업을 발전시키는 계기가 되었다고 했습니다. 더불어 13일의 금요일의 발단이 된 성전기사단의 종말에는 프랑스 황제와 로마 교황 간의 재산권 다툼이 한 몫했다고도 했습니다. 이렇게 유럽 교회의 재산권을 보유한 교황청은 막대한 재산의 유지 관리와 헌금과 투자를 통한 재산 증식에 관심이 많았습니다. 오랜 사제의 특성상(프로테스탄트 탄생 전까지 종교인은 최소한 겉으로는 청렴해야 했습니다.) 직접 할 수 없었고 전문지식도 부족했습니다. 결국 믿을 만한 사람이 필요했습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 국가에서는 금융업(은행)이 성행하기 시작했고 교황청은 돌아가며 관리직을 맡겼습니다. 이 시기에 은행업을 메디치 가문이 이 자리를 노립니다. 메디치 가문은 본래 이탈리아어의 어원으로 추론하면 의사나, 약제사, 염료 상인의 직업을 가졌던 것으로 보이는 데 조반니(Giovanni di bicci, 1360 ~ 1429) 시대에 메디치 은행을 설립하며 새로운 가문의 역사를 쓰게 됩니다. 그는 앞서 기술한 프랑스 황제와 로마 교황의 불화로 일어난 사건인 아비뇽 유수(Avignonese Captivity, 1309∼1377) 등으로 혼란한 시기에 교황을 지원하며 교황청의 재무관리자와 피렌체의 행정장관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들 코시모(Cosimo di Giovanni de' Medici, 1389 ~ 1464)는 피렌체뿐 아니라 런던과 아비뇽 등 유럽의 다른 지역들로 은행의 지점을 확대합니다. 당연히 명분은 교황청의 재산관리였습니다. 이후 메디치 가문은 그들이 구축한 부와 권력을 토대로 수많은 예술가와 학자를 통해 르네상스를 이끌었습니다.

메디치가 문장

    이 시기 베네치아는 무역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합니다. 그들은 중개무역의 특성상 채권을 발명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로마 가톨릭 교회가 고리대금업을 금지했기 때문에 국가에 돈을 빌려준 베네치아 투자자들은 도덕적으로 애매한 처지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 문제를 다루기 위해서 자본의 사용이라는 주제에 대해 깊이 있게 분석을 했고 유럽인들이 시간을 개념화하고 수량화하는 방식으로 바뀌었습니다. 대항해 시대의 초석이 되었던 베네치아 뱃사람들은 바다에서 위치를 알 수 있도록 위도와 경도를 연구했으며 정확한 경도를 측정하기 위해 고가의(경도 측정용 시계가 당시 배 한 척 값이었다고 합니다) 시계를 만들기도 합니다. 여하튼 시간을 가치로 환산하는 복리 개념이 만들어지게 됩니다. 지옥의 문이 열렸습니다.

베네치아

    한편 유럽에 640년간 발자취를 남긴 합스부르크 가문은 1273년 스위스 알프스 북부 지역의 작은 봉건영주에서 일약 (신성)로마독일 왕으로 루돌프 1세가 선출되며 새로운 시대를 엽니다. 합스부르크는 1452년 로마황제로 등극하며 이후 460년 동안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배출하는 황실로 거듭나게 되었습니다. 합스부르크 황실이 전 유럽을 재패하는 데는 유명한 결혼 동맹이 결정적 역할을 합니다. 고려 왕건이 결혼을 통해 호족과 정치적 동맹을 맺은 것과 유사합니다. 합스부르크 황실은 결혼 동맹과 상속을 통해 유럽의 상당히 많은 땅을 전쟁 없이 소유하게 됩니다. 이런 결정적 결혼에는 예나 지금이나 성대한 결혼식, 결혼 지참금, 정치적 대가 등 엄청난 비용이 듭니다. 

합스부르크 문장과 동맹 국가

    이런 막대한 비용을 스위스 알프스의 시골 군주가 가능할 리 없습니다. 그들의 든든한 후원자로 푸거 가문(Fugger family)이 있었습니다. 은행업과 광산업 등으로 유명한 푸거는 합스부르크의 떡잎을 일찌감치 알아봤으며 그들과 정치적 동맹을 맺으려 막대한 금액을 지원합니다. 이후 그들은 유럽 제일의 은행이 되었고 교황청의 새로운 관리은행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합니다. 최초의 자본가로 평가받기도 하는 푸거가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영광을 안겨준 4건의 결혼을 성사시켰고 황제 선출에도 깊게 관여했을 정도였습니다. 봉건시대 다국적 기업으로 평가받았던 그들도 결국 몰락했습니다.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오스트리아)은 봉건 시대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습니다. 결국 서유럽의 지배권을 두고 두 거대 세력은 부딪힐 수밖에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특히 프랑스 황실과 합스부르크 황실 간에는 경쟁과 동반이라는 다소 애매한 상황이 연속됩니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시기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마리 앙트와네트(Marie-Antoinette, 1755~ 1793)가 합스부르크 가문이었습니다. 당연히 프랑스 내부에서는 사실과 거짓이 뒤섞인 뒷이야기가 난무했습니다. 

마리앙뜨와네트

    이 시기 프랑스는 미국 독립전쟁에 막대한 전비를 지원하느라 국고가 이미 바닥나 있었습니다. 도시 근로자들은 빈민이 되었고 황제는 외면했습니다. 프랑스혁명은 주변 제국주의 국가에게는 위협이 되었고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연합군은 나폴레옹(Napoléon, 1769 ~ 1821)에게 격파당합니다. 나폴레옹은 프로이센의 베를린을 거쳐 모스크바까지 진군합니다. 이후 프로이센의 비스마르크(Bismarck, 1815 ~ 1898)는 나폴레옹 3세를 포로로 잡고 베르사유 궁전의 거울의 방에서 독일 연방 탄생을 선포합니다. 

독일 연방 선포

    다시 시간이 흘러 1차 세계대전의 승리자였던 프랑스는 베르사유 궁전에서 독일의 항복과 군비 제한, 배상금을 포함한 베르사유 조약을 체결합니다. 히틀러는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키며 프랑스를 침공해서 파리 곳곳에서 선전물을 촬영합니다. 히틀러는 1차 세계대전 이후 베르사유 체제로 인한 살인적인 인플레와 국가 자존심 회복을 명분으로 정권을 장악합니다. 유대인은 그들의 피를 빨아먹고 기생하는 고리대금업자, 그 이하도 이상도 아니었습니다.

히틀러와 에펠탑

    유대인들이 금융업을 많이 한 이유도 사실 종교적, 정치적 이유였습니다. 항상 권력은 일종의 고리대금업에 대한 종교적, 윤리적 문제를 제기했지만 누군가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습니다. 세금 걷는 일조차 천대 시 했는데 하물며 사적 금융업은 말할 것도 없었습니다. 그런 와중에 그들은 금융업이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하고 나름의 원칙과 기준을 가지고 발전시킵니다. 많은 역사가들은 유럽의 대항해 시대가 가능해진 것도 사금융의 발달, 주식, 채권 채무, 보험, 손해배상 등 자본주의의 근간이 차곡차곡 쌓여왔기 때문이라고 이야기합니다. 악독한 유대인 상인 샤일록이 등장하는 <베니스의 상인>은 당시 금융 자본주의의 현실과 그들의 인식 수준을 잘 보여줍니다. 

유대인의 연도별 디아스포라

    이런 필요와 이중성은 프로테스탄트가 나타나며 이념적으로 명분을 갖게 되고 자본주의의 비약적 성장을 돕습니다. 이후에도 자본주의는 여러 어려움을 겪고 오해와 남용으로 의구심을 갖지만 어떻게 보면 인간만이 가능한 신이 부여한 능력일 수도 있습니다. 현대 금융은 인간이 발명하고 찾아낸 모든 법칙과 방법으로 점철된 종합 예술입니다. 낙타는 바늘귀를 통과하기 어렵지만 부자는 통과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 최선을 다해서 돈을 벌고 멋있게 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이제 위선 떨거나 눈치 보지 말고 <부자 되세요>를 다시 외칠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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