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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적호 May 19. 2024

#28. 통찰, 인사이트, 자기 객관화

교육 잡설(雜說)

    #28. 통찰, 인사이트, 자기 객관화


    프로에게는 보통사람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눈이 존재한다. 통찰(洞察)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이나 현상을 꿰뚫어 본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라면 영어의 인사이트(INSIGHT)와 유사하기도 합니다. 인사이트는 직관으로 번역하기도 합니다. 이 다른 문화권의 두 단어는 절차이기도 하며 결과이기도 합니다. 어떤 문제나 현상을 볼 때 눈에 보이는 이면의 것을 보기 위해 노력해야 하고 이런 의사결정 과정을 반복하면 통찰력, 인사이트가 만들어집니다. 이런 전문가의 통찰과 인사이트는 새로운 문제를 보다 빠르고 효율적으로 해결하기도 하며 창의적인 결과를 도출하기도 합니다. 이런 통찰과 인사이트는는 성공의 토대 위에서만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성공과 실패의 반복을 통해 오차 확률을 줄이는 겁니다. 


    한편으로 통찰이나 인사이트는 과정 속에서 깨달음을 의미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해 외부 대상에 깊어지는 인식은 종종 내부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제공합니다. 외부를 통해 내부를 관조하고 어떤 의식 체계가 만들어지며 뇌의 뉴런들이 연결되는 직관체계를 만듭니다. 그런데 그런 폭발적 연결은 단순히 책상에 앉아서 혼자 상상한다고 저절로 만들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다양한 매체를 통해서 북부 초원이나 신대륙의 원주민들이 대자연과 함께 호흡하며 자연의 기운을 느끼고 바람의 결을 볼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이 진짜 그런지 증명할 수 없지만 그들의 뇌는 최소한 그런 모습을 상상하고 자신을 부분으로 인식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습니다.


    당연히 이런 통찰, 인사이트는 정량적이지 않으니 측정하기 어렵고 단순한 고집이나 아집을 구분하기 어렵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명제가 그렇듯이 진실을 알기 어렵고 유사한 이유로 사이비 교주를 구분하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합니다. 자신만의 스타일로 구축된 통찰과 인사이트는 어느 시점에는 다른 이들과 괴리로 목표를 벗어나기도 합니다.


    전쟁은 두 적대적 집단의 인사이트 충돌입니다. 클라우제비츠(Carl von Clausewitz, 1780~1831)의 표현대로 전쟁은 천재 군사전략가가 수행합니다. 알렉산드로스(Alexandros the Great, BC 356 ~ BC 323)는 엄청난 인사이트로 전투에 앞장서서 승리로 이끌고 헬레니즘 문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렇지만 부하들의 회군 건의를 물리치고 강행한 인도 정벌에서 병을 얻고 죽습니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 BC 100 ~ BC 44)는 그의 정치적 군사적 천재성에도 불구하고 동료 의원들에게 배신당해 살해됩니다. 

카이사르의 죽음

    나폴레옹(Napoléon I, 1769 ~ 1821)은 영국 해상봉쇄와 러시아 원정을 감행한 대가로 결국 황제의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복귀전이자 마지막 전투인 워털루(Battle of Waterloo, 1815)에서는 자신의 장점을 하나도 살리지 못한 채 졸전 끝에 패합니다. 히틀러(Adolf Hitler, 1889 ~ 1945)의 러시아 침공은 더욱 극적이었습니다. 그는 이전의 역사를 알고 있었고 독일의 유능한 장군과 참모진은 완벽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러시아는 버텼고 반격에 성공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들의 인사이트는 좁은 의미의 직관이었고 통찰하는 능력이 상대에 비해 부족했습니다. 

워털루 전투

    정당성이 부족했던 전투만 이야기했지만 다른 말로 시대에 요구되는 도덕이 결여된 전쟁과 결정은 언젠가 본래로 돌아오려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악인도 통찰 또는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습니다. 마블 영화 “어벤저스:인피니티 워”에서 타노스는 인구과잉으로 멸망한 자신의 고향 행성의 경험을 통해 얻은 인사이트로 우주 인구를 강제로 줄여 우주의 균형을 맞추겠다는 신념을 갖게 되고 행동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pyotr I, 1672 ~ 1725)는 어릴 때 실권을 잃고 청년기까지 크렘린 밖에서 일반인들과 함께 지내야 했습니다. 그는 전통보다 현실적인 것을 좋아했고 유럽에서 막 태동하고 있는 과학문명에 깊은 관심을 기울입니다. 그는 석공, 목수, 대포 주조 등을 익혔고 실권을 장악한 이후에도 기술공부에 많은 시간을 보냈습니다. 그는 유럽을 배우기 위해 서유럽에 젊은 귀족을 보내며 본인도 몰래 따라가서 프로이센의 대포 조작술, 네덜란드에서는 선박 건조술, 영국에 가서는 수학과 기하학을 배웠습니다. 어떤 분야에서는 전문가보다 뛰어났다고 합니다. 결국 스웨덴, 오스만과의 전쟁을 통해 러시아는 강국으로 거듭나고 칭기즈칸의 몽고의 어두운 그늘에서 벗어납니다. 

선박을 건조 중인 표트르 대제

    배우 이순재는 배우는 대사를 암기하지 못하면 떠나야 할 때라고 일갈합니다. 래퍼가 가사를 잊었다는 것은 스스로 정체성을 포기한 것입니다. 연극 배우는 생방송으로 연기를 하지만 카메라 앞의 배우처럼 끊임없는 연습과 반복으로 인물을 창조합니다. 어떤 것이 더 훌륭하다는 이야기가 아니라 저 마다 삶의 특징이 있다는 것입니다. 플레이보이는 작업 성공률에 제한을 두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통해 삶에 대한 저마다의 통찰을 얻고 스타일을 만들어갑니다.


    인간은 누구나 성선설이든 성악설이든 타고난 성향이 있지만 교육과 수련, 노력으로 좋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마음은 매 한 가지입니다. 플라톤은 이런 욕구를 인정욕구(thymos)라고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그는 인정욕구가 인간행동에 동기를 부여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교육에서는 인간의 인정욕구를 적절히 활용하면 상당히 높은 효율을 거둘 수 있다고 이야기합니다. 인정욕구는 전문가가 되고자 공부하는 사람에서부터 정체성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우리 모두에게 동기를 부여합니다. 그런데 이런 인정욕구는 통찰이나 직관처럼 우리의 생각과 달리 인류를 좋지 않은 방향으로 인도하기도 합니다. 한 개인의 인정욕구는 다른 사람의 인정이 필요하며 이런 이유로 피아를 만들고 그런 개념들의 상호작용 속에서 엉뚱한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합니다.


    집단광신(Group Fanaticism), 우월주의(Superiority Complex), 인종차별(racism), 성차별(Sexism) 등은 인정욕구가 과도하게 발현되는 현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자신과 타인의 인정의 과도한 불일치는 치우친 신념을 만들어 낼 수 있습니다. 결국 균형감이 매우 중요합니다. 국가나 사회뿐 아니라 가정에서도 인정욕구는 긍정적, 부정적 효과가 나타납니다. 그럼 어떻게 인간은 인정욕구를 관리할 수 있을까요? 신은 인간에게 독특한 재능을 주셨습니다. 일종의 상상하는 능력입니다. 우리는 간혹 과거를 회상하거나 꿈을 꿀 때 유체이탈(幽體離脫, Out-of-Body Experience) 같은 경험을 합니다. 과거를 회상할 때 자신을 영화를 보듯 제삼자의 시선으로 바라보는 능력입니다. 자신을 객관화하는 묘한 능력입니다. 아마도 이런 능력은 하늘을 나는 유희가 아니라 행동의 객관화를 통해서 행동을 검증하는 절차일지도 모릅니다. 연못에 비친 자신의 모습에 반해 스스로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 나르키소스(Narcissus)가 되지 않도록 자기 객관화 능력은 자기를 성찰하는 중요한 기재입니다.

나르키소스

    전문가는 자신만의 통찰, 인사이트를 가지고 있으며 반복 훈련을 통해 오류를 줄이고 도덕적 균형감을 유지해야 합니다. 이런 일련의 절차가 자신의 스타일로 체계화될 때 우리는 그런 사람을 일정 분야뿐 아니라 인생의 구루로 모실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도달할 수 있는 쉬운 길은 아닙니다. 그렇지만 모르면 몰라도 대충은 알 것도 같으니 한 번 개인의 삶에 적용해 볼 수는 있으면 좋을 것 같습니다. 뉴턴(Sir Isaac Newton, 1643 ~ 1727)은 자신의 업적을 소개하며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습니다.

“만약 내가 더 멀리 볼 수 있었다면, 그것은 거인들의 어깨에 올라서 있었기 때문이다.”(If I have seen further it is by standing on the shoulders of Giants.)


    수학문제를 풀 때도 어떤 한 문제에 푸는 방식이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스타 강사들은 더 쉽고 빠른 방식으로 문제를 푸는 방법을 이야기하곤 합니다. 그런데 예전에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문제에 접근하는 사람은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고 빠른 풀이 법은 머신러닝에서도 중요한 과제였습니다. 현대는 엄청난 컴퓨팅 능력으로 많은 부분을 극복했지만 여전히 더 빠르고 정확한 새로운 방법론을 추구합니다. 


    물론 초기 접근 방법을 잘 몰라서 문제를 풀지 못하는 학생도 많이 있습니다. 사실 수포자의 대부분은 이런 상황입니다. 다른 방식으로 문제를 푸는 방식의 탐색은 기본 풀이를 숙달했을 경우에만 가능합니다. 어설픈 풀이방법과 설익은 풀이는 인생처럼 오답으로 이끕니다. 자기는 잔머리를 잘 쓴다며 겸손을 떠는 아이도 있습니다. 그런 학생은 문제를 금방 이해하고 문제를 풉니다. 그런데 시험 성적이 별로 신통하지 않습니다. 자존감이 떨어지고 인정받지 못하니 자신의 방식을 자신할 수 없습니다. 이런 학생은 배움이 늦은 친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유형은 몇 가지를 중복해서 묻는 복합 문제의 경우 풀이 과정이 길어지면 중간에 길을 잃고 헤매는 학생입니다. 이런 학생이 의외로 많습니다. 공리, 정리 등이 체화되지 않았고 문제를 읽었지만 공식이 주는 함의를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난이도의 문제를 잘 푸는 학생들이 수학 원리를 통달한 것도 아닙니다. 


    문과 학생들은 통상 글로 이해하지 않으면 다음으로 넘어가지를 못합니다. 그런데 이과 학생들은 일단 외우거나 풀고 봅니다. 잘 안 풀이고 이해하지 못하던 문제를 문제와 풀이과정까지 통째로 외우고 쓰기를 반복하면 어느 순간에 이해가 되고 문제가 풀리는 경험을 해봤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경험을 한 학생들이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종교에서 어린이에게 경전을 외우게 하는 데는 이런 효과를 이미 오랜 경험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과거에는 좋은 문장과 단어를 외우는 시합이나 놀이가 있었습니다. AI 시대에 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생각할 수 있지만 결국 우리가 어떤 것을 이해한다는 것은 보고 듣고 생각하는 과정과 묵상의 깊은 고뇌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런 지난한 과정을 지나면 어느 순간에 나의 지식이 연결되고 통합되는 신기한 경험을 하곤 합니다.


    탁구, 테니스, 골프 등 스포츠를 배울 때 선수들은 동작 하나에도 많은 시간과 공을 들입니다. 드라이브 샷을 구분동작으로 배우기도 하고 체화하기 위한 나름의 연습 방법도 있습니다. 선수만큼 다양한 교습법도 존재합니다. 물론 본능적으로 잘하는 천재도 존재합니다. 그런 면에서 예체능은 재능 없는 아이가 전문가가 되기는 다소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군인들은 제식, 사격등 개인 기술을 단계적으로 구분해서 배우고 점점 많은 수의 집단 전술과 다양한 무기체계를 융합하는 작전술을 배우며 군사 전문가로 성장합니다. 현대전 같은 복잡한 전장에서는 조자룡이 헌 칼 휘두르듯이 하면 패합니다.


   천재도 노력하지 않으면 사라진다는 명제는 이제는 진부하기까지 합니다. 천재의 단명은 예체능계에서는 흔한 일입니다. 모든 종류의 공부에는 천재적 탁월함도 필요하지만 쉼 없이 연습하는 태도가 더 중요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우리에게 남는 것은 정체와 퇴보뿐입니다. 하루를 안 하면 내가 알고 이틀을 안 하면 선생님이 알고 삼일을 안 하면 관중이 안다는 유명한 말은 모든 전문가 집단에 적용됩니다.


    노력도 중요하지만 과정에서의 기쁨도 중요합니다. 이 과정이 지난하고 괴롭기만 하다면 한두 명의 탁월한 사람만 있고 역사의 발전은 요원했을 겁니다. 성공의 기쁨은 잠시지만 성공을 향한 발걸음은 느리지만 우리 삶입니다. 남들의 시선을 의식하지 일부로 의식하지 않기는 어렵지만 스스로 과정이 흥미 있고 몰입하면 나름 만족하고 행복합니다. 이런 무소 같은 발걸음이 자존감을 높이고 삶을 균형되게 합니다.


    몰입의 다른 말은 행복입니다. 여러분이 무엇을 하는데 온전히 몰입할 수 있다면 행복한 순간입니다.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서,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찾기 위해서 살아갑시다. 누구나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이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고 싶은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삶의 괴로움은 몰입할 수 있는 대상을 찾기 쉽지 않고 겨우 찾은 그 대상이 실은 적합하지 않은 경우도 많다는 사실에서 발생합니다.


    몰입하는 대상을 찾았다고 해서 누구나 사회적으로 성공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니 더욱더 과정이 행복해야 합니다. 과정이 행복하고 온전히 몰입하기 위해서는 마음에 마(魔)가 끼지 말아야 합니다. 자신을 믿고 한 걸음씩 나아가야 합니다.  


    혼자 공부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어떻게 자신의 길을 신뢰할 수 있을까요? 방향을 잡고 반복 숙달을 하게 되면 어느 정도 자신만의 스타일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잘하면 모든 사람이 성공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렇게 가능한가요? 자신의 잘못된 스타일은 자신은 인식하지 못합니다. 오히려 어설픈 주변인의 조언은 오류를 고착화하게 됩니다. 결국 본인 스스로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만 스스로 깨닫기는 어렵습니다. 이때 본인의 모습을 눈으로 보여주는 방식을 추천합니다. 


    본인을 스스로 객관화하기 어렵거나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진과 동영상을 통해서 보여주고 잘못을 이해하게 합니다. 이미 골프 등에서는 널리 사용하는 방법입니다. 웨이트트레이닝은 시작 전에 사진을 찍고 거울을 보며 수시로 체크하고 기간별로 근육의 변화량을 비교하는 것도 이런 이유입니다. 인강은 과거 유명 단과학원 강사를 인터넷으로 옮긴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온라인의 성격상 파급력과 수입은 비교할 수 없지만 방식은 유사합니다. 


    그렇다면 학생은 달라졌을까요? 학생도 똑같습니다. 무신경하게 바라보는 인강으로 뇌가 자극받고 스스로 깨닫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유명 예능을 보는 것과 다르지 않습니다. 일종의 게임을 하고 있는 뇌의 움직임과 유사합니다. 외우고 반복하고 수정보완하는 일련의 교육 과정은 변하지 않았습니다. 유튜브 등을 통해 쏟아지는 수많은 지식정보 콘텐츠를 보고 기억을 못 하는 것과 동일한 현상입니다. 체화과정을 거치지 않으면 어떤 지식도 지혜로 발전하지 못하고 자신의 것이 되지 못합니다.  


    만약 본인이 하루동안 학습하는 것을 촬영한 후에(동의가 필요합니다.) 학습 상담을 받아 본다면 혹시 달라지지 않을까요? 학교에서 수업을 받던 학원에서 공부하던 학생들의 모습은 몇 가지로 구분됩니다. 완전히 포기하고 다른 행위를 하는 학생, 선생님을 주목하고 필기도 하지만 유체이탈한 학생, 필기를 하는 순간 선생님의 말을 놓치는 학생, 10분 단위로 유체이탈 하는 학생, 선생님과 적극적으로 교류하는 학생(5% 이내) 등입니다. 


    물론 이외에도 정도의 차이에 따라 다양한 모습이 관찰되지만 서로 상처를 들출 수 있으니 이 정도만 하겠습니다. 중요한 것은 아무도, 심지어 선생님조차도 학생들의 상태를 정확히 이해하기 어렵다는 것입니다. 이런 학습 태도는 학습에 대한 성취를 기대하기 어렵고 잦은 질책으로 자존감이 낮아지고 아예 공부를 포기하게 합니다. 공부뿐 아니라 다른 분야에서도 유사하게 발생합니다.


    모 TV 프로에서처럼 일상생활뿐 아니라 공부하는 모습도 촬영해서 보면 스스로의 모습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신을 이해하는 것이 공부의 처음이자 마지막입니다. 자신의 정체성을 만들어 가는 게 삶이라면 언제나 할 수 있습니다. 꿈처럼 우리를 객관화할 수 있다면 삶의 또 다른 단계로 나아갈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무도에는 이미지 대련이 있습니다. 상대를 상정하고 실전처럼 개인 훈련을 하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상대가 명확하지 않거나 허무맹랑한 대상을 만들어 냅니다. 그런데 훈련을 거듭할수록 구체적이고 명확한 상대가 만들어지고 실제 대련 효과를 만듭니다. 더욱 지속하는 경우에 대련의 모습을 영화처럼 여러 각도로 볼 수도 있습니다. 음악이 공간 중에 퍼져 나가는 장면을 보았다는 경험과 명상을 통한 유체이탈 체험도 비슷합니다. 단순한 상상과는 전혀 다릅니다. 


    그런데 이런 능력이나 순간은 아무나 가질 수 없고 언제나 오지 않습니다. 과거에 일부 가능한 사람을 천재라고 했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에게는 여러 기기를 통해 동영상을 촬영하고 스스로의 모습을 객관화를 도울 수 있는 문명의 이기가 있습니다. 그리고 이미지 트레이닝도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심지어 우리는 가상현실이 가능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내 모습과 전문가를 비교해서 평가하고 수정 보완할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너무 혼자서 끙끙 앓지 말고, 수줍어하지도 말고 힘내서 한 번 해봅시다. 일신우일신하는 당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객관화하면서 오히려 대상에 몰입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종교의식이 있습니다.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신을 접하기 위한 단계적 절차를 이행합니다. 아무 고민 없이 우연히 신이 당신 앞에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고행과 금욕은 신에게 다가가는 헌신의 행위이기도 하며 동시에 육체적 고통에 대한 완전한 객관화를 통해 영적인 상태로 들어가는 길입니다. 이런 객관화를 위해서는 완전한 믿음과 몰입이 요구됩니다.

성지순례 등 고행과 금욕

    어쩌면 인간 뇌가 극한의 고통과 금욕으로 인한 한계에 봉착하면 생존을 위해 객관화 행위를 하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굉장히 이례적이고 우연히(?) 병이 회복되기도 합니다. 일종의 플라세보 효과라고 볼 수도 있습니다. 여하튼 뇌는 극한의 상황에서 고통을 잊도록 도파민을 분비하든지 전혀 다른 세상으로 안내하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신은 인간의 생로병사에 대한 직접적 개입보다 극복하고 깨우칠 수 있는 기재를 주셨는지도 모릅니다.


    공부도 할 수 있다는 믿음으로 주저하지 않고 나아간다면 최소한의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습니다. 정말 공부해서 남주지 않습니다. 공부는 비교적 살며 경험하는 몇 안 되는 매우 정직한 활동 중 한 가지입니다. 갑자기 어려운 문제를 만나 몇 시간에 걸쳐 씨름할 때, 뇌는 한계의 지평선에서 우리가 나아갈 길을 안내합니다. 쉬운 상황, 우연한 순간에 신은 절대 우리 노력을 마중하지 않습니다. 공부 잘하게 해달라고 기도만 하는 것은 병약한 환자가 맹목적으로 신만 찾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한 걸음씩 걸어간다면 언제가 어떤 곳에 도착할 겁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는 매우 합리적 행동입니다.


    몰입하고 자신을 객관화하며 바른 공부를 할 때 우리는 통찰하고 인사이트를 가진 각자 삶의 전문가가 될 수 있습니다. 이건 어떤 특정 사람이나 집단에게만 허용된 것이 아니라 인류 모두에게 공평하게 신이 부여한 권능입니다. 우리 하나하나가 모여 국가를 이루고 인류를 만듭니다. 개인의 정체와 퇴보는 역사의 퇴보를 의미합니다. 우리는 어떤 신념이나 가치에 동의할 수도 있고 거부할 수도 있는 세상에 살고 있습니다. 당장의 삶이 힘들고 어려워도 배움의 행복을 포기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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