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 나이와 비행
“청출어람”, 푸른색은 남색에서 비롯된다는 의미이지만 남색에서 비롯된 푸른색을 강조한 말이다. 배움과 훈련에 있어 열심히 하여 일취월장함을 스승과 견주어 하는 말이고 새롭게 도약하는 젊은이들의 발전과 두드러짐을 설명하기 위해 사용하는 말이다.
젊은이들의 빼어남에, 그들의 날래고 무모함에, 거칠고 탁월함에 그리고 밝고 꿋꿋함에 찬사를 보낸다. 갖추어지지 않았으면서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러운 것은 능력이 많기 때문이 아니고 가능성 때문이며 소유한 것의 값어치 때문이 아니고 품고 있는 희망 때문이다. 계획을 세우고 목적을 이루기 위해 밤을 새우지 않더라도 그 시기를 사는 이유만으로도 그대로의 모습, 원석으로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장인의 의지와 손길에 의해 생명을 부여받는 채석장의 돌덩이가 젊음이다. 식후 불과 한 시간도 되지 않아 음식 타령하고 다음 날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아침밥을 요구하는 아이들을 보면서 신기하고 그들의 능력에 놀랍다. 그들의 몸과 마음과 정신은 기성세대가 잃어버린 강한 소화력과 흡입력을 가지고 있다. 받아들이고 배우고 만들어내고 새롭게 하는 행위들이 그들의 젊음에서 비롯되고 성숙하여 결국 우리의 삶과 문화를 이어가고 발전한다고 생각하면 세대의 순환이 얼마나 중요한 질서의 흐름인지 깨닫게 된다.
나에게도 그러한 시절이 있었건만 이전 세대와 구별이 될 만큼 두드러졌던 모습은 기억 속에 까마득하다. 지난 세대들에게는 자신들이 지나왔던 궤적과 같음에도 그들의 모습이 처음 보는 것처럼 새롭다. 나의 아버지도 나의 소년과 청년 시절을 보며 같은 생각을 느끼셨을 것이고 최선을 다해 나를 키우시고 순환의 질서에 따라 또 나에게 길을 양보하셨을 것이다.
삶을 지탱해준 비행 생활은 지난날의 일이 되었지만, 비행이 나에게 어떤 의미였고 그리고 어떻게 평생의 가치로 좋은 추억으로 남길 것이가는 아직 숙제로 계속 되고 있고 비행을 추구하는 젊은 사람들에게 어떠한 모델로 남아야 할 것인가의 고민은 지속되고 있다. 그나마 주제넘은 생각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비행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그를 통한 젊은 세대와의 교감과 어느 정도의 긴장은 비행 생활 이후 삶의 꾸준한 비상과 연착륙을 유도하는 길임을 느낀다.
사계절로 인생을 축약하여 설명하기도 한다. 봄 여름 가을 겨울 계절은 인생의 어느 부분을 각각 의미한다. 세월의 순환을 겪으며 각 계절의 의미와 소중함이 어느 것이 다른 것에 더하고 덜한 것이 없음을 점점 느끼게 된다. 계절마다 특이함과 고유의 색채가 있고 사계를 이루고 일년을 만드는데 각각의 역할이 있다. 우리 삶의 여정도 소년 청년 장년 노년기를 거치면서 각기 색채와 특성을 담고 흘러간다.
아직도 나의 마음속엔, 비행궤적을 따라 창공에서 보낸 시간으로 만들어진 무형의 조각처럼 이야기를 나누어야 하는 대상으로 추억으로 가치로 나의 비행 삼십여 년의 시간이 새기어져 있음을 느낀다. 이를 통해 나의 가족이 현재의 모습으로 발전할 수 있었음에 감사하고 나의 생각과 개인의 역사가 같이 함께 할 수 있었음에 자부심을 느낀다. 돌아보며, 젊은 시절 최선을 다하지 않았던 비행 생활에 회한과 겉으로만 잘하려고 했던 불성실한 모습을 발견한다. 젊은 부기장 시절 연세가 지긋했던 기장님들의 매끄럽지 못한 모습에 불손한 생각을 가졌던 사실에 반성한다. 피곤함에 지쳐 비행 중 힘들어하던 기장님들께 범했던 불경스러운 생각과 편협한 마음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이제 그 시절 경멸했던 그분들의 나이 이상이 되었고 과거 그분들이 모습이 나의 모습이 되어있음을 발견한다. 지금 나의 모습이 젊은이들에게 과거에 내가 느꼈던 그대로의 모습으로 보일 것이란 생각을 하면서 좁았던 생각과 용렬함에 고개를 숙인다. 편치 않은 생각으로 보았던 선임 기장의 등에 내려앉았던 삶의 거리와 무게 그리고 책임의 중량을 애송이 젊은 부기장이 느끼기에는 너무 컸었다는 사실을 이제 와서 고백하며 용서를 구한다. 그분들의 굽어진 어깨를 통해 수많은 항공의 역사도 같이 날아왔음을 이제야 느낀다.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는 황혼을 뒤로하고 시나브로 김포로 접근하는 항공기를 쳐다본다. 포근한 저녁 안개는 도시를 감싸고 먼 거리를 달려온 비행기는 안식을 위한 편안한 날갯짓을 한다. 착륙을 준비하는 어느 고참 기장은 긴장을 할 것이다. 승부사의 다짐과 정결 의식을 치른 것 같이 또렷한 기운과 습관된 동작은 고도와 속도와 방향과 바람에 매몰되어 있을 것이다. 그리고 활주로 위로 피어오르는 항공 등화의 환한 불빛 속에 기장의 진지한 얼굴은 활주로 위에서 살짝 바쳐올리는 감각적인 손목의 움직임과 함께 사뿐히 내려앉는 육중한 녀석의 안정된 호흡을 확인하고서 편안한 모습으로 돌아온다. 스피드 브레이크와 오토브레이크와 역추진등 순차적으로 작동되는 제동장치의 작동 여부를 확인하고 줄어드는 속도를 확인하며 유연하게 활주로를 벗어나면서 하루의 날개를 접는다.
비행은 아직 나 자신으로 남아있음을 느낀다. 비행으로 세상을 이해하고 비행으로 사랑하며, 비행은 나의 한 부분이었다. 농부가 흙을 통해 자신의 숙명을 확인하듯이 조종사는 하늘을 대하며 비행을 자신들의 숙명으로 받아들인다. 나를 설명할 수 있었던 지난 시절의 좋은 빛깔은 저물어 갔어도 비행은 나의 자존심과 멋으로 남아서 나를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오래되지 않은 시절까지 아내와 같이 까페에 앉아 대화를 나누기를 좋아했다. 치즈케익 한조각과 커피는 대화 만큼이나 중요한 메뉴였다. 부담없는 부부간의 까페의 대화는 생활의 전반을 빗질하듯 소소히 나누는 재미가 있었다. 최근 깊이 빠진 종교 생활의 담론은 우리 부부를 한결 성숙시키는 느낌이 든다. 어떻게 시작이 됐는지 기억이 나지 않지만 달콤한 한 조각의 케이크와 쌉쌀한 한 모금의 커피는 아내와 대화를 나누는 가운데 단골 메뉴가 되었었다. 하지만 매번 건강검진 때마다 지적받았고 결국 최근에 의사 선생님의 강력한 권고에 따라 커피를 포기해야 해야 했다. 소중한 일상의 한 요소를 빼앗긴 것같이 아쉬움은 컸다. 카페를 갈 때마다 커피를 선택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생활의 흐름을 바꾸어야 하는 중대한 사건이었다.
허전함을 달랠 방법을 찾던 중에 우연히 떡과 차를 내놓은 어느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다. 자극적인 맛은 없었지만, 떡과 차는 케이크와 커피만큼 부드러운 조합을 이루고 있었다. 입맛에도 맞았고 차는 훨씬 몸과 마음을 편안히 해주었다. 떡과 차를 즐기는 장소를 찾기가 쉽지는 않지만 집에서만큼은 다시 이전의 대화 분위기를 내기에 손색이 없었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케이크와 커피에서 떡과 차로의 변화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달콤하고 쌉쌀한 자극에서 편안하고 그윽함으로의 변화 같은 것이다. 우리것, 아버지 어머니와 조상들이 즐겼었던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 주는 편안함과 뿌듯함이 있다. 반듯한 도로 위에서 걷다가 폭신한 흙길 위를 걷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육십 중반이 넘어서야 비로써 나이를 먹는다는 것을 느끼기 시작한다.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공감이 증가하는 정서의 숙성을 이루는 세월의 마법이다. 시간을 통해 생각과 이해가 순화되어 사물을 더욱 넓게 받아들이고 개인과 세상의 이치와 질서가 순리에 의해 순치되는 세월에 의한 퇴행이 주는 의식의 진전이며 놀라운 반전이다.
매번 뜨고 내리는 일상에 이제 체력적으로 버거운 때가 있었다. 그런데도 비행이 나를 존재케 하는 힘이었다. 조종사가 되게끔 했던 운명의 질서에 감사한다. 이삼십 대의 날렵함과 사십 오십대의 명민함은 없어도 쌓여온 세월의 마법은 더 높이 날게 할 것이다. 아직도 비행관 관련된 일을 한다는 사실에 감사한다. 오늘은 어떤 사람과 이웃을 만날 것인가 기대하며 어떤 얘기를 나눌 것인가 생각해본다. 나의 새로운 이륙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