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 인생

by 신완식

제가 이곳 충남 논산에서 살게 된 지도 벌써 7년 차가 되었습니다. 처음 이곳으로 흘러들어올 때만 해도 전혀 상상하지 못했던 일입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충청도 그것도 논산이라니! 언젠가 그런 말이 떠오르더군요. ‘신라 사람인 내가 백제 땅을 딛고 서있다.’


삶이라는 것이 참 묘하네요. 한 번도 생각하지 못했고 살아본 적도 없었던 이곳이 어쩌면 제 인생에서 가장 오랫동안 거주하게 될지도 모를 땅이 되었으니까요. 제 고향은 경남 진양군 이반성면 길성리 수성부락입니다. 지금은 행정구역상으로 진주입니다. 이제는 아는 분이 거의 계시지 않아 일부러 가기도 곤란한 조그만 농촌 마을입니다. 몇 년 만 더 있으면 아예 사라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거기서 나고 자란 뒤 열 살이 채 못 되어 드디어 기나긴 나그네 길에 올랐습니다.


진양 부산 부천 서울 대구 서울 강진 운천 부천 춘천 홍천 런던(London) 부평 통영 그리고 논산. 이런 지역들을 떠돌다 논산으로 흘러올 때는 서른네 번째로 하는 이사였습니다. 나고 자란 고향에서 10년 가까이 산 것이 현재까지는 가장 오랫동안 거주한 셈입니다. 짧게는 한 달 길어야 3~4년. 같은 집에서 6년 가까이 거주한 것이 그다음으로 오랜 기간이었는데 마침내 이곳 논산에서 기록이 깨졌습니다. 세상에. 한 집에서 7년째를 맞다니. 실감이 나질 않습니다.


고등학생 때였지요.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니 그 새 집을 옮겼더군요. 조금 당황스러워 전화를 걸었습니다. “거기서 이리저리 걸어오면 새로 이사한 집이다!” 어머니 말씀에 놀라지도 않았습니다. 어디 한두 번 옮겼어야지요.


이곳에 온 뒤로 이웃들과 대화 중 종종 서로 놀라는 일이 있습니다.


“어르신께서는 이 집에서만 50년 이상 살고 계신다고요?”


“네, 저도 여기저기 좀 옮겨 다녀 봤으면 싶었는데 기회가 없었어요.”


“그래요? 저는 이번에 서른네 번째 이사를 하면서 얼마나 간절히 기도했는지 몰라요. 하나님 이번에는 제발 한 곳에서 정 붙이고 오래오래 살게 해 주세요.”


“그렇군요. 저와는 정반대 기도로군요.”


7년쯤 살아보니 정말 제 소원대로 이웃 간에 조금씩 정이 들고 있습니다. 비록 말투 생활습관 문화 그리고 정서면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그래도 이제는 제법 스며들었습니다. 물론 처음에는 낯선 면이 적지 않았고 당황스러운 일들도 있었지요. 하지만 이웃들도 이제는 이해를 해주시는 것 같습니다. 신라 사람이 백제에서 살고 있다는 사실을.


저는 나그네 설움을 여러 번 경험했습니다. 그중에서 제일 뼈저리게 느낀 곳은 영국 런던에서였습니다. 학업 중 잠시 가족들과 아르바이트를 하는데 백인 십 대 아이들이 우리 식구들을 향해 돌을 던지더군요. 또 제 차 앞뒤를 가로막고 희롱하는 녀석들도 있었습니다. 속으로 울화통이 터졌지만 꾹 참았습니다. 거기로 간 것이 근본원인이었으니까요.


논산에 와보니 동남아와 동구권에서 돈 벌러 온 이들이 적지 않더군요. 차창가로 그들의 얼굴을 볼 때마다 런던에서 겪었던 나그네 설움이 떠오릅니다. 저분들도 혹시 싶고요.


‘너희는 너희에게 몸 붙여 사는 나그네를 학대하거나 억압해서는 안 된다. 너희도 이집트 땅에서 몸 붙여 살던 나그네였다.’(표준새번역, 출 22:21)


개구리 올챙이 시절 잊으면 안 된다 싶습니다. 제게 그랬던 것처럼 그들도 꿈이 있으니까요. 행복하고 단란한 가정을 꿈꿀 것입니다. 고국과 고향이 얼마나 그리울까요? 저도 한 때 향수병에 걸려 엉엉 운 적이 있었는데요. 혹시나 한국인들이 희롱하거나 린치라도 가한다면 그들이 받을 서러움은 훨씬 클 것입니다.


‘타관 땅 밟어서 돈지 십 년 넘어 반 평생 / 사나이 가슴속엔 한이 서린다 / 황혼이 찾어들면 고향도 그리워져 / 눈물로 꿈을 불러 찾어도 보네’(백년설, 나그네 설움, 2절 가사)


‘인생은 나그네 길 /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가 / 구름이 흘러가듯 떠돌다 가는 길에 / 정일랑 두지말자 미련일랑 두지말자 / 인생은 나그네 길 / 구름이 흘러가듯 / 정처 없이 흘러서간다’(최희준, 하숙생, 1절 가사)


노래 가사와 달리 저는 갈 때 가더라도 이곳에서 깊게 정 붙이고 살렵니다. 사랑하는 아내가 있고 저를 신뢰하고 따라 주는 맘씨 좋고 순박한 교인들이 있으니까요. 논산! 제게는 살기 참 괜찮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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