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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훵붱 Oct 07. 2024

작업실을 없앴다

정 많은 사람은 종종 힘들다

다섯 살쯤부터 가지고 있던 20년 정도 된 애착 인형이 있다. 이름은 키티

믿거나 말거나 초등학교 즈음부터 하나님께 기도했다

서른 넘어서 내가 철들게 되어도 키티를 버리지 않게 해 주세요!


스물여섯 가을 키티의 얼굴 부분이 심하게 찢어져

유명하다는 인형 병원에 방문했는데, 천이 너무 삭아서 복구가 불가하고

복각만 가능하다고 했다. 마음이 너무 쓰렸지만 거금을 들여 키티를 복각하기로 했다


복각된 키티의 모습


다른 인형들도 많았는데 왜 하필 키티랑은 정을 씨게 붙였을까?

사람 마음은 신기한 것이다.


이번에 나오게 된 작업실도 그렇다.

대학 때부터 작업실을 엄청 많이 옮겨 다녔는데,

이번 작업실은 이상하게도 빼기 일주일 전부터 섭섭해서 눈물바다다.


나의 작업실

성수 쪽으로 첫 취업을 하며 작업 공간을 마련했다.

당장 퇴근하고 작업할 공간이 필요해서

일주일도 채 알아보지 않고 급하게 입주했다.


서운한 김에 이곳에 대한 기억을 정리해 본다.


1.

하루의 마무리는 늘 이곳이었다.

업무 중에 떠오른 아이디어들을 가지고 잰걸음으로 가게 되는 곳,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시 시작하러 가는 곳

저녁은 먹어야 하니까 샐러드나 베이글을 포장해서 가는 게 소소한 낙이었다.

작업실 생활은 참 외로워서, 외로운 느낌을 잊게 해 줄 아주 가벼운 콘텐츠를 보며 저녁을 먹었다.

내가 이곳에서 자주 보던 콘텐츠는 브루클린 나인나인과 무엇이든 물어보살


2.

이 방은 조그만 창문이 있었는데, 창문 때문에 비쌌다. (음악작업실은 거의 지하고 창문이 없다)

근데 사용하는 내내 창문을 잘 안 열었다.

시간 감각이 사라지고 블라인드 틈으로 밖을 보면 밤이 되어있었다.

이곳에 놀러 온 나의 친구들은 여기에 있으면 시간이 사라진다고 신기해했다.

방음 때문인지 미묘하게 진공 상태에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곤 했다.


3.

이곳은 애인을 만나게 된 계기이자 우리의 작은 영화관이었다.

우리는 피아노 레슨을 해주다가 친해졌고 이곳에서 첫 산책을 했다.

유난히 더웠던 올여름 작업실은 최고의 아지트였다.

모니터링 스피커로 영화를 틀어놓으면 프라이빗 영화관이 부럽지 않았고,

또 우리의 전용 음료컵인 '불의 잔'이 항상 상주해 있었다.


4.

음악을 나누는 시간들이 있었다.

일반인들의 목소리를 녹음해 주는 작은 클래스를 열었었는데,

행복하게 음악 즐기려고 오신 분들이라 내가 더 행복했던 시간들이었다.

첫 테이크의 설렘 떨림을 함께했고 한 분 한 분 모두 기억난다.




한 시절이 가는 건 늘 살짝 쓸쓸한 것 같다.

테트리스처럼 꽉 찼지만 때때로 공허하고 외롭기도 한 시기였다.

뭘 하고 있는지도 모르게 빡빡하게 채워져서 그랬나 보다.

덕분에 나도 모르게 얻어가는 것들이 있었겠지!



드디어 퇴사한 음악인입니다!

제 작업물이 궁금하다면 인스타그램 @younwho 에 놀러오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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