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에 한번 배우되기
일생에 한 번, 배우 되기
가끔 ‘그림이 좋아서 이 길을 왔으니 다음 생에도 화가가 되고 싶지 않냐?’는 질문을 받는다. 다음 생? 믿는지 안 믿는지 모르는 채로 나는 이런 대답을 한다. ‘저는 배우가 되고 싶어요. 일등 배우 말고 적당한 조연으로, 평생 연기하는 배우요.’ 미인도 아니고 특별한 끼도 없는데 왜 그런지 나는 배우가 해 보고 싶다. 자신의 존재를 던져 다른 존재가 되어보는 것이 삶의 방식이라면 과연 어떨까?하는 궁금증인 것같다.
언강생심인 이 생각에 기회는 빨리 왔다.
2020년 대구현대미술가협회 회원 44명은 영화를 만들었다. 44명 모두가 주연인 러닝타임 두 시간을 넘어가는 영화, ‘당신은 누구죠?’. 감독 남기웅과 촬영감독 단 한 사람, 그리고 우리 작가들 모두는 제작자이면서 스텝이 되어 초초저예산 영화를 찍었다. 남감독님은 작가들 모두를 사전 인터뷰하면서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답에 작가 각자가 도달할 수 있도록 이끌어내었다. 콘티(대본)는 작가 본인이 썼다. 다중 제작인 시나리오가 만들어진 셈.
나는 특별한 콘티 없이 작업하는 장면을 노출하기로 했다. 당시에 내 작업실은 농촌의 거대한 곡물창고였는데 지금은 찾아볼 수 없는, 오래된 벽돌로 구축된 아름다운 벽이 일품이었다. 그 작업실과 나, 작업장면을 함께 주인공으로 생각하고 200호(세로 259.1x193.9cm) 세로형 다섯 점을 제작했다. 어떻게 이 작품이 이루어지고 마지막 사인에 이르는지를 관객에게 보여주기 위한 준비였다. 생각은 간단했지만 사전 작업은 간단하지 않았다. 작업의 특성상 나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획들을 그어 나가야 했기에 그 중압감이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마지막 한 획을 마음속에 정해두고 촬영에 임했다. 그 긴장은 고스란히 화면에 표정으로 남았다.
작가들의 일은 여기서 끝났지만 감독님의 편집과정은 지난했을 것이다. 44명의 작가를 배열하는 것, 모두 다른 배경음악을 넣어야 하는 점이 아주 어려웠을 듯했다. 나는 마지막 장면에 작업실의 거대한 철문이 둔중하게 닫히는 소리를 넣어달라고 부탁했다. 매일 퇴근할 때 들었던 그 소리를 꼭 기록해두고 싶었기 때문에.
그리고 코로나 사태의 한가운데, 그 엄혹함 속에 우리는 마스크를 끼고 시내 상영관에서 시사회도 했다. 보건 당국에서 참석자 100명만 허용했기에 작가를 제외하고는 미술관계자, 언론인을 포함해 50명만 참가한 조촐한 시사회였지만 잔뜩 멋을 부리고 참석했다. 나는 시사회에 참석하는 주연배우니까! 그래서 ‘다음 생에나......’ 하던 나의 소망은 생각보다 일찍 이루어졌다.
애초에 생각했던 제작비는 당연히 모자랐고 참여한 작가들의 기부로 순식간에 손실은 메워졌다. 작업실마다 작가마다 따뜻한 음식을 준비해서 촬영진을 맞이했다. 언제나 자본의 간택을 받아야 하는 영화판과는 완연히 다른 이 영화를, 남감독님은 자신의 인생영화로 꼽았다.
관객의 관람평은 다양했다. 어떤 이는 옴니버스 형식이라 집중도가 떨어진다고도 하고, 또 어떤 이는 이상하게 몰입된다고도 하고, 마음이 찡했다고도 했다. 나는 울었다. 세상을 향해 자신과 작품을 드러내고 이해받고 싶다는 간절한 열망을 가진 사람들의 연대가 만들어낸 이야기였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