깡통이게 하기
깡통이게 하기
당신은 깡통을 어떻게 쓰시지요? 라는 질문을 던져볼까? 먼저 이 질문을 나에게 던져봤다. 내 집에서 깡통들은 무엇을 하고 있나? 의외로 내가 깡통을 별로 쓰지 않고 있다는 것, 두어 개 정도의 깡통을 반지나 귀걸이 등을 담는 용도로 쓴다는 것 정도를 파악했다. 아마도 분리수거에 강박적인 내가 즉시 분리수거를 해 버렸나 보다.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기로 했다. ‘깡통이 하나 있으면 어디에 쓰시겠어요?’ 화가에게 물었더니 팔레트, 딸아이의 집에서는 ‘아기 약통’. 사탕통으로 쓰기도 한다. 습기 있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을 담아도 좋을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들에게 깡통은 늘 무언가를 담는 존재인 셈이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깡통은 언제 깡통자신일 수 있지?
이 의문은 ‘읽는 것’과 ‘보는 것’의 경계에서 풀려나간다. 그러고 보니 모든 ‘보는 것’에는 ‘읽기’가 ‘읽는 것’에는 ‘보기’가 수반되는 것 같다. 신호등 앞에서 우리는 붉은 색을 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지시하는 말을 읽는다, 혹은 듣는다. 그리고 그 말을 따라 행동한다. 혼돈의 시대에 길거리의 현수막들은 거친 언어로 우리의 뇌리를 괴롭히고 부박(浮薄)한 형태는 시각적 잔상으로까지 남아 감각적 폭력에 부대끼며 우리의 현실을 인식하게 한다. 최근의 무안비행기 사고 희생자를 애도하는 현수막들은 예외 없이 검은색 글씨를 써서 이 참혹함 앞에서 어떤 색채도 쓸 수 없다는 시각적 선택을 하고 그것은 읽는 이들에게 고스란히 먹먹함, 막막함으로 다가온다. 아마도 이 경우는 읽기와 보기가 분리 불가능한 경우일 것이다. 극한의 고통이 그러하듯.
화가들도 언제나 이 문제에 직면한다. 아니 비평가도 관객도 ‘읽기’와 ‘보기’의 경계지점에서 어느 한쪽으로 자리하거나 아니면, 흔들린다. 나는 이십몇 년을 화면에서 의미를 제거하는 그림을 그려왔다. 그러므로 읽을 게 없는 것이 내 그림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관객들은 화면에서 새를 찾기도 하고 산을 읽어내기도 한다. 심지어 나조차도 사인을 하고 한참 뒤에 그림에서 계절을 보기도 한다.
아무래도 이건 피할 수 없는 일인 것 같다. 인류는 언제나 직면해야 하는, 알 수 없는 세계를 정리하고 읽으면서 생존에 적응해 왔으므로. 하늘에 해가 사라지는 괴변을 마주했을 때 인류가 이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신에게 빌고 용서를 구하고, 그 결과 다시 해를 되찾는 질서정연함이 그들에게 필요했지 않을까? 그래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었다. 현대인이라고 다르지 않다. 그냥 두고 본다는 것이 이처럼 인간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벨기에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는 이 ‘보는 것’과 ‘읽는 것’ 사이의 경계 지점에 걸쳐진 인간의 인식 세계 자체를 작품으로 제시했다. 그는 누구나 아는 담배파이프를 그려놓고 그 아래에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 Ceci n’est pas une pipe’라고 써 놓았다. 아니, 그려놓았나? 처음 이 작품을 대했을 때 나는 너무나 당혹스러웠다. 파이프가 아니라고? 그럼 도대체 이게 뭐라는 거지? 그래서 나는 그 그림을 읽지 않기로 하고 형태 그대로 보았다. 그러자 그냥 색채, 물감, 선, 화면에서의 위치가 보였다. 그럼 그 아래에 있는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는 것도 같은 캔버스에 있으니 그냥 물감인가? 그렇다면 풀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사과가 아니라고 해도 마찬가지 아닌가? 굳이 파이프가 아니라고 하면 저 위의 파이프 그림과 연관이 없지도 않은데?
아,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아마도 이 끊임없는 우왕좌왕을 마그리트는 노린 것 같다.
난 오늘 아무래도 깡통에서 내용물을 비워놓고 그것을 그려봐야겠다. 깡통을 읽지 않고 그냥 볼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