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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화가의 추상적 웅얼거림

누드크로키 교실

by 조미향

누드크로키 교실

누드크로키를 오래 했다. 마지막 사인을 보면 98년인데 10년쯤 하다가 대학원을 가고 추상회화를 하면서 시간을 쪼개내기가 힘들어 그만둔 것 같다. 토요일마다 세 시간, 초고밀도로 집중해야 하는 그 시간을 나는 좋아했다. 순간순간 다른 선을 보게 되는 인체의 어느 순간들을 포착하고, 새로운 선을 만들어내면 세 시간이 후딱 가 버리고, 끝나면 녹초가 되곤 했다. 산만하고 복잡한 마음들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시간이었다. 집중해야 하는 농도를 생각해 보면 매우 역동적인 명상의 시간이기도 했다.

2007년 학교 근무하며 치렀던 7회 개인전을 위해서 잠시 다시 크로키 교실에 나갔다. 다시 가 보니 그 사이에 내 것이었던 선들은 무정하게 사라져버렸다. 고유의 선을 내 것으로 가지기 위해서는 그처럼 끊임없는 수련이 필요했다. 억지로 회복한 선은 이 7회 개인전 이후로 다시 미궁에 빠지고 상황을 알 수 없는 채로 나의 크로키 수업은 중단되었다. 추상작가로서 전시를 해내야 하는 상황이라 크로키에 들이는 시간, 공력, 금전적 지출에 비해서 발표할 기회가 그다지 없었기 때문. 종이에 그린 작품을 가볍게 여기는 경향이 있는 관객들의 분위기도 한몫했다. 간혹 다른 작가들의 누드크로키 실연이 있을 때 게스트로 잠깐 가 보는 것 외엔 다시 크로키를 하게 될 것 같지 않았다. 한번 나의 선을 잃어버렸던 경험이 다시는 못 할 것 같은 두려움으로 남아 있었다.

2021년 캘리포니아의 친구에게로 여행을 갔다. 국방부 공무원으로 은퇴한 이 유능한 친구는 그림도 잘 그렸다. 그는 한 주일에 한 번씩 누드크로키 교실에 나가고 있었는데 나더러 수업에 같이 가자고 했다. “난 안 그려, 아니 못 그려. 구경만 할게.” 지역의 문화센터에서 하는 이 크로키 교실은 대체로 은퇴한 부인들이 많았다. 이윽고 모델이 붉은 터번과 가운을 벗고 자리를 잡을 때 나는 내 안의 무엇이 돌변하는 걸 느꼈다. 피부가 검고 선하게 생긴 70에 가까운( 그는 나이를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몸매와 분위기를 가지고 있었다. ) 모델이 자리를 잡자 갑자기 돌변해서 좌중을 압도해나가는 눈빛으로 공간을 응시하기 시작했다. 모델의 힘이란 이런 것이었다. 그의 눈빛은 나를 움직이게 하고, 선을 긋게 했다. 생각해 보니 이런 힘을 가진 모델은 처음 만난 것 같았다. 두 시간 동안 모델의 힘에 이끌려 그려나갔다. 그리고 사라진 줄 알았던 선이 내 안 어딘가에 잠재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소중한 확신의 날이었다.


돌아오는 봄, 2025년 4월에 다시 크로키로 전시를 해 보기로 했다. 오래 넣어두었던 크로키 작품들을 꺼내보니 반 너머 버렸는데도 그 양이 엄청났다. 내가 참 좋아했구나, 그 시간들.

그런데 그 많은 그림들을 들춰보며 나는 나의 크로키들이 체온이 낮다는 것을 느꼈다. 기왕의 내 캔버스 작업에서 느꼈던 ‘체온낮음’이 크로키에도 있었다. 분명 난색인 색들인데 캔버스 위에 착 가라앉아 체온이 느껴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래서 작년 이후 캔버스 작업에서 체온을 높이려 애쓰고 있는 중이었는데 크로키에서도 체온을 뜨겁게 느끼게 하고 싶었다. 새로운 크로키교실에 등록하고 만난 첫 모델은 그야말로 체온이 뜨거운 모델이었다. 무지막지할 정도의 에너지로 좌중을 끌고 나가는 압도적 힘을 가진 모델이었다. 풍만한 몸과 검은 피부를 가지고 뇌쇄적 눈빛을 만들어내는 재능과 프로의식에 충만한 모델은 올해 가장 추운 날씨에 서슴없이 바닥에 누워 뜨거운 열기로 그 방을 채워나갔다. 당연히 작가들 모두가 숨소리조차 죽이고 작업에 열중했다. 휴식시간에 작품들을 둘러보는 모델의 눈빛은 경탄으로 가득 찼다. 자신이 참여한 작품을 진정 사랑하는 눈빛으로.

두 시간 반의 작업이 끝나고 나왔을 때 처음 참석한 그 교실에서 내가 통성명조차 하지 않고 나온 것을 알았다. 올해 가장 추웠던 저녁의 뜨거운 기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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