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백에 안착한 16개의 우주 3》

설계의 이행과 ‘임하여 도달함’이 남긴 흔적

by 이종열

​달정원이 소장한 《십구사략통고(十九史略通考)》 권 2는 특별하다. 이 책의 가치는 조선 초기 금속활자 기술과 지식 설계의 변화가 한 권 안에서 겹쳐 드러난다는 데 있다.

​책을 펼치면 본문은 1행 18자의 경자자로 정연하게 서 있다. 1420년(세종 2)에 주조된 경자자는 자폭이 좁고 획이 응축되어 있으며 판면 밀도가 높다. 한정된 공간에 최대한 많은 정보를 담으려는 구조적 결단. 빽빽하지만 무너지지 않는 균형. 그것이 경자자의 골격이다. 본문은 단순한 인쇄물이 아니다. 국가가 지식을 배열하고 고정하는 방식을 물리적으로 구현한 장치다.

​그러나 표지 안쪽 면에는 다른 장면이 숨어 있다. 본문과는 별개로 표지 내면에 직접 찍힌 5행의 인쇄부 중, 중앙의 3행이 1행 22자로 조판되어 있다. 이 22자 행은 본문의 경자자와 감각이 다르다. 획은 다소 두텁고, 자간의 호흡은 넓으며, 판면의 긴장은 완화되어 있다. 단순히 글자 수가 늘어난 것이 아니다. 설계의 방향이 미묘하게 이동한 흔적이다.

​더 흥미로운 것은 그 내용이다. 그 3행에는 진시황이 스스로를 황제라 칭하며 새로운 질서를 선포하는 대목이 놓여 있다. 제국의 탄생을 선언하는 순간이다. 유교 국가 조선에서 비판의 대상이던 진시황의 제국 선포 장면과, 경자자의 밀집 구조를 넘어 다른 판면 감각을 시험하는 22자 활자가 같은 좌표 안에서 만난다. 의도였는지 우연이었는지는 단정할 수 없다. 그러나 상징적 긴장은 분명하다. 한쪽에서는 제국이 탄생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활자 설계가 이동하고 있다.

​이 22자 활자는 전형적인 경자자와 완전히 일치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완성된 갑인자의 균형과도 정확히 겹치지 않는다. 오히려 경자자의 과밀한 구조를 조정하며 가독성을 개선하려는 과도기의 자형에 가깝다. 1434년의 갑인자는 어느 날 갑자기 등장한 체계라기보다, 경자자의 단점을 보완하고 판짜기 방식을 정비한 결과가 그 해에 확정되었기에 붙은 이름일 가능성이 크다. 단절이 아니라, 정제된 진화다.

​물성 역시 이를 뒷받침한다. 18자 본문과 22자 행의 먹색, 압흔의 깊이, 종이 섬유의 눌림은 크게 다르지 않다. 후대 보충이라기보다 동일 계열 인쇄 과정의 변주로 읽힌다. 이 22자 활자를 갑인자의 완성형으로 단정할 수는 없으나, 갑인자로 향하는 설계의 방향성을 실물로 보여주는 단면일 가능성은 충분하다.

​그리고 그 기술적 이행의 곁에 또 하나의 이행이 놓여 있다. 본문의 활자 질서를 가로지르듯, 여백에는 대자로 다섯 글자가 적혀 있다.

ㅇ奉始皇帝 (체봉시황제)

“임하여 시황제를 받들다.”

​첫 글자 체자는 행복할 ‘행(幸)’ 자에 책받침(辶)이 결합된 15세기 이체자다. 幸은 단순한 ‘행복’의 의미를 넘어, 권위 앞에 몸소 나아가 임하는 행위를 함축한다. 여기에 辶이 더해지며 ‘직접 이르다’, ‘몸소 다다르다’의 방향성이 강화된다. 그는 단순히 봉(奉)하지 않았다. 먼저 임하여 도달했다. 도달한 뒤에 받들었다.

​유교적 비난의 대상이던 진시황을 기록한 자리에서, 이 독자는 거리를 두지 않았다. 평가 이전에, 먼저 다가갔다. 그 선택이 대자의 필획으로 남았다. 기술은 지식을 밀어 올리고, 독자의 사유는 그 위에 직접 개입한다. 완성과 실험, 질서와 응답, 활자와 필사. 이 권 2는 그 모든 것이 한 판면 위에서 교차하는 순간을 붙들고 있다.

​완성은 어느 날 갑자기 탄생하지 않는다. 그 이전의 긴 시험과 조용한 조정이 먼저 찍힌다. 경자자와 갑인자 사이, 그리고 질서와 ‘임하여 도달함’ 사이. 이 책은 어쩌면 그 이행의 한순간을 조용히 보존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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