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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쯔뜨끄 Mar 03. 2016

호랑이

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

잠깐 사이에 잠이 들었어요. 요즘 조금 피곤 했거든요. 초인종 소리가 하도 요란해서 간신히 눈만  떴어요. 눈은 떴지만 일어날 수는 없었죠.


‘저러다 그냥 가겠지…...’


무시하려고 이불을 머리 끝까지 푹 뒤집어썼는데, 망할 초인종이 자꾸 울리는 거에요. 어쩔 수 있나요, 너무 시끄러운데…… 기신기신 일어나 인터폰  화면을 확인했죠.


아무도 없었어요.


초인종은 계속 울리는데 인터폰 화면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거에요. 분명 동네 꼬마들이 장난치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이놈의 자식들을 따끔하게 혼내 줄 요량으로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죠.


아무도 없었어요.


뒷머리가 바짝 서면서 짜증이 머리 끝까지 올랐죠. 욕이 입 밖으로 나오려는데, 문 뒤에서 ‘그르릉 그르릉’ 하는 소리가 낮게 들리는 거에요.



하, 이것 참…… 못 믿으실 것 같아서 이걸 말해 야 할지 말아야 할지……



두 눈으로 직접 본 나도, 처음엔 믿지 못 했거든 요. 오죽했으면, 아직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을 정도였으니까요.




흠……





그건, 호랑이었어요.

네, 맞아요. 호랑이. 백두산 호랑이, 벵골호랑이 할 때 그 호랑이요. 곶감을 제일 무서워한다는 그 호랑이 말이에요.


그르릉 그르릉 소리를 내면서,


꼬리를 좌로 우로 살랑살랑 흔들고 있는!


호랑이요!


휴……



난 너무 놀라서 순간  온몸이 딱딱하게 굳어 버렸어요. 아마 누군가 지나가다 봤다면, 내가 메두사와 눈이라도 마주친 줄 알았을 거에요.


나 같은 건 아랑곳하지 않고, 호랑이는 너무 태연히 스르륵 일어나 기지개를 한번 켜더니 집 안으로 어슬렁  들어갔어요. 커다란 호랑이의 살랑살랑 흔들리던 꼬리가 내 볼 을 살짝 스쳐가는데, 온몸에 털이란 털이 쭈뼛이  섰어요. 내 그 곳 털까지도요. 그제야 정신이 퍼뜩 들었죠.


‘이건 꿈이 아니구나! 진짜 호랑이가 우리 집으로 들어갔구나!’


나도 재빨리 호랑이를 따라 집 안으로 들어갔죠. 호랑이는 현관을 지나 부엌을 대충, 아주 무심한 표정으로 훑어보더니, 거실 소파 앞에 자리 잡고  앉았어요.


호랑이요? 백두산 호랑이 같기도 하고, 시베리아 호랑이 같기도 하고. 모르죠, 저야. 제가 무슨 호랑이 박사라도 되는 줄 아세요? 뭐, 그래도 무늬는 제법 선명했어요. 호랑이는 무늬가  선명할수록 건강한 거라고 어디서 들은 것 같은데……


아무튼 호랑이는 문 밖에서 봤을 때 보다 훨씬  컸어요. 거짓말 살짝 보태서 말하면, 앞발이 내 머리만 했어요.한 번 상상해보세요, 내 머리만한  앞발을 가진 호랑이가 우리 집 거실에 앉아 있는 상상.


난 덜덜 떨리는 다리를 간신히 부여잡고 휴대 전화가 있는 방으로 게걸음을 쳐서 들어갔어요.


‘그래! 빨리 119에 신고해야 해! 오, 맙소사 맹수가, 호랑이가, 내 집에 있다니!’


심장이 요동쳤어요. 어찌나 쿵쾅쿵쾅 뛰던지 내 목젖까지 뛰었던 것 같아요. 심장이 목젖을 찔러 자꾸만 헛구역질이 났거든요. 벌벌 떨리는 오른손을 달달 떨리는 왼손으로 간신히 부여잡고 우선 호랑이가 들어오지 못 하게  방문을 걸어 잠갔어요. 그리고 곧바로 119에 전화를 걸었죠.


"우리 집에 호랑이가 있어요!"


"호랑이요?"


"네! 지금 호랑이가 우리 집 거실에 앉아있어요!!"


"......”


"빨리 와주세요! 초인종이 자꾸 울려서 나가 보니까 호랑이가 서 있더라고요! 그러더니 갑자기 우리 집으로 들어와서 거실에 앉았어요!! 커요! 엄청, 엄청 커요!"


"…… 장난 전화하시면  안 됩니다."


장난 전화? 나는 이렇게나 심각한데 장난 전화? 몇 번이나 설명했어요. 우리 집에 호랑이가 있다고. 제발 도와 달라고.  그들은 내 말을 믿어 주지 않았어요. 결국 답답한 내가 전화를 먼저 끊었죠. 방 안을 이리저리 서성이며 생각했어요.


‘저 호랑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신고를 해도 믿어 주지를 않고, 어디 도와달라 할 곳도  없고…… 사진을 찍어서 SNS에 도와 달라고 올려볼까?’


한참을 고민하고 있는데 뭔가…… 이상했어요. 


밖이 너무 조용한 거에요. 방문을 살짝 열어 보니까,

글쎄,

호랑이가 잠을 자고 있는 거에요. 너무 평온한 얼굴로. 아까 그 소파 앞에서. 아주 얌전히.


까치발을 딛고 아주 아주 천천히 부엌으로 갔어요, 혹시 호랑이가 깰지도 모르잖아요. 사실 아까부터 시원한 물 한 잔이 마시고 싶었거든요. 부엌으로 걸어가는 동안에도,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는 순간에도 난 호랑이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어요.단 한번도.


아시죠? 호랑이가 얼마나 날쌘지? 난 알고 있어요, 어릴 때 동물의 왕국을 즐겨 봤거든요.


시원한 물을 한 잔 쭉 들이켜고 나니, 목젖까지  쿵쾅쿵쾅 뛰던 심장이 겨우 진정됐어요. 그제야 평소의‘나답게’ 이성적으로 생각할 수 있었죠.


‘첫째, 호랑이는 아직까지 나에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았다. 둘째, 호랑이는 우리 집에 들어와 그 어떤 소란을 피우지도 않았다. 셋째, 호랑이는 지금 잠을 자고 있다. 고로, 나는, 안전하다. 그래,  안전하다.’


호랑이 처리 방법 같은 건 나중에 생각하기로 했어요, 지금 나는 안전하니까.


긴장이 풀리면서 다시 잠이 쏟아졌어요. 아까 말씀 드렸죠? 요즘 좀 피곤했다고. 그대로 식탁에  앉아 잠이 들었어요.


얼마쯤 지났나…… 조금 오래 잔 것 같았어요. 다리가 뜨끈뜨끈 하더라고요. 스을쩍 눈을 떴는데, 글쎄! 호랑이가 내 발 밑에 앉아서! 갸릉갸릉  소리를 내면서! 내 다리에 얼굴을 비비고 있는 거에요! 선잠이 확 달아났어요! 순식간에 다리를 의자  위로 확 오므렸죠. 호랑이가 그런 나를 빤히 쳐다보는 거에요.


난 조심조심히 호랑이 머리를 쓰다듬었어요.

호랑이의 그 눈을 봤다면 누구든 그랬을거에요. 누구든, 나처럼 호랑이를 쓰다듬어 줬을 거에요.

정말 부드러웠어요. 호랑이도 좋은지 가만히 눈을 감더라고요. 싱크대 선반에서 소시지를 두 개 꺼냈어요. 하나는 내가 먹고, 남은 하나는 호랑이한테 줬죠. 냄새를 킁킁 맡더니 꿀떡 삼키더라고요. 하나 더 꺼내줬죠. 잘 먹던데요? 호랑이도 소시지를  좋아하나 봐요, 예전 동물의 왕국에서는 그런 말 없었는데……


아무튼 소시지를 쩝쩝 거리며 먹는 호랑이는 그냥 이 동네 고양이 같았어요. 음…… 조금 큰 고양이?


슬며시 안아 봤어요. 호랑이는 내 품에서 너무 얌전하게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어요. 커다란 덩치 탓인지 보드란 털 탓인지는 모르겠지만, 나도 너무 편안했어요. 난 조금 더 포근히 호랑이에게 몸을  묻었어요.


‘이렇게 얌전한데 한 번 키워볼까?’


잠깐 위험한 생각도 했죠.


한참 동안 호랑이와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는데, 또 초인종이 울렸어요. 아까와는 소리가 조금 달랐죠. 뭐랄까. 뭔가 묵직했고, 약간의 간격을 두고  천천히 울렸어요.


순간 호랑이 눈빛이 사나워지는 거에요. 초인종이 울릴 때마다 호랑이의 눈빛은 더욱 사나워졌고, 나는 점점 두려워졌죠. 호랑이를 진정시키려면 초인종 소리를 멈춰야 했어요. 누구냐고 큰 소리로 물었어요.


한 달 전에 헤어진 전 남자친구였어요. 그가 닫힌 문 밖에서 말했어요. 잠깐만 들어가게 해 달라고, 마지막으로 할 얘기가 있다고, 부탁한다고.


음,

내가 먼저 이별을 말한 후에, 그는 단 한 번도 내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어요. 단 한 번도.

다만…… 그는, 매일 먼발치에 서 있었어요. 하루 종일은 아니었지만, 네, 매일 서 있었어요. 그냥 우두커니…… 나를 보고 말을 건다거나, 위협을 한다거나 하지도 않았어요. 오히려 내가 먼저 그에게 다가가면 그는 자리를 떠나버렸죠.


그랬던 그가 우리 집 초인종을 눌렀고, 얘기 좀 하자고 나에게 말을 했어요.


난 그에게 잠깐만 기다리라고 말하고, 호랑이에게 갔어요. 우선, 눈빛이 사나워진 호랑이를 진정시켜야 했거든요. 그와 호랑이를 만나게 할 수는 없었어요.

 

왜냐면...... 아니에요, 이 얘긴 그냥 넘어가죠. 중요한얘기는 아니니까.


호랑이를 서둘러 내 방 안으로 밀어 넣었어요. 절대 나오지 말라고 신신당부했어요.


그를 집 안에 들이기 좀 뭣해서, 현관에 서서 물었죠, 할 얘기가 뭐냐고.


그 사람이요, 먼발치에 그냥 서 있을 땐 몰랐는데 많이 핼쑥하더라고요. 조금 마음이 짠했어요. 집  안으로 데리고 들어와서 뭐라도 먹이고 싶었어요. 하지만 부질없는 동정은 버려야 한다고 간신히 맘을 다 잡았죠.


잘못했대요. 다짜고짜 잘못했다고 말하더군요.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어요. 그런 내 눈치를 살피던 그는 곧 조곤조곤히 말을 이어했어요.


그에게 반했던 이유 중 하나였어요, 그 조곤조곤 한 말투. 그의 말을 듣고 있으면, 시간이 어찌나 빨리 가버리던지…… 할 수만 있다면 황진이가 잘라내어 숨겨 둔, 동짓달 기나긴 밤을 빌려다 쓰고 싶을 정도였어요.


그런데 달랐어요. 그는 여전히 조곤조곤 말을 하고 있는데, 내 시간은 여전하지 않았어요. 그렇게 빨리 가버리던 그와의 시간이, 어찌나 더디던지. 아마 예전에 황진이에게서 빌려 온 시간에 나도 모르는, 이젠 쓸곳 없는 이자가 붙었었나 봐요.


그의 말이  길어질수록 내 온 신경이 방 안 호랑이에게 쏠렸어요. 내가 다른데 정신이 팔려 있는 걸 알았는지, 그가 갑자기 나를 집 안으로 밀어붙였어요. 그제야 아차! 정신이 들었죠.


소리 지를 새도 없이 그는 내 양 팔을 붙잡았어요. 나는 당황하지 않았어요. 오히려 내 스스로도 소름 끼칠 만큼 냉정하게 그에게 말했죠. 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고, 내 팔 놓고 얘기하라고. 그랬더니 그가 얌전히 내 팔을 놓더라고요.

 

잘못했다, 용서해달라, 다시 한번 잘 해 보자, 너 없이 못 살겠다…… 다시 또 뻔한 얘기의 반복이었어요.


그만하고, 이제 돌아가라. 우리는 이미 한 달 전에 끝났다. 이번엔 좀 강하고 단호하게 말했어요. 그가 저를 힘껏 안았어요. 난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그의 어깨를 꽉 물었죠. 그는 반쯤 정신이 나가 있었어요. 아파하지도 않더라고요. 힘은 어찌나 세던지 저 혼자 감당하기에 너무 버거웠어요. 빨리 그에게서 빠져나가야겠다는 생각에 이번에는 그의 코를 힘껏 물었죠.


아팠나 봐요. 아팠겠죠. 그는 손을 풀고 나를 바닥에 내던졌어요. 도망쳤어요. 빌어먹을 집이 너무 좁아서 도망 칠 곳도 없었지만, 우선은 그와 최대한 멀리 떨어져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난 싱크대에 있던 칼을 집어 들었어요. 가까이 오면 죽여버리겠다고 칼 끝을 그에게 겨눴죠. 부엌에 서서 그 사람을 봤어요. 그의 눈이 붉었어요. 그와 만나는 동안에는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눈을 하고 있었어요. 마치 잔뜩 사나워진 아까 그 호랑이의 눈 같았어요. 그래요, 호랑이 눈.


다시 방 안에 있는 호랑이가 생각났어요. 그에게 당장 나가라고 소리쳤어요. 방 안에 호랑이가 있다고, 계속 이러면 호랑이가 당신을 죽일 거라고 말했어요. 그는 헛소리를 한다며 오히려 더 화를 냈어요. 점점 가까이 오는 그가 무서웠어요. 바보같이, 난 칼을 떨어뜨렸어요. 이때다 싶었는지 그는 곧장  나에게 달려왔어요.


나를 쓰러뜨리고 그의 무릎으로 내 몸을짓눌렀어요. 도와달라고 소리쳤어요. 발버둥쳤어요. 떨어진 칼을 다 시 잡으려고 손을 힘껏 뻗었어요. 헛수고였죠.

 

그는 내 몸을 깔고 앉았어요. 그는 무릎으로 내 두 팔을 눌렀고, 그는, 그의 손은 내 목을 조르기 시작했어요. 


이제 난 끝이구나 눈물이 가득 차 올랐어요.


가득 찬 눈물 너머로 어른어른 뭔가가 보였어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떴어요. 눈 안에 가득 찼던 눈물이 떨어지고, 아주 선명히 보였어요. 그건, 호랑이었어요. 호랑이가 서 있었어요. 호랑이는 증오에 찬 눈을 희번덕이었고, 선홍빛 잇몸에 단단히 박힌 하얀 이는 다 드러나 있었어요. 목이 졸려 목소리가 나오지도 않았어요. 겨우겨우 입만 움직여서 말했어요.

 

 

 

 

"도와줘……"








한참 후에야 경찰이 왔어요.

그는 내 앞에 쓰러져 있었고, 나는 피가 잔뜩  묻은 칼을 들고 앉아있었어요.

난 피범벅이었어요, 얼굴에도 손에도  온몸에도.

그도 마찬가지였어요.

경찰은 나에게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었어요.

절대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려고 했는데, 어쩔 수 없었어요. 경찰이 날 마구 다그쳤거든요. 난 모 든 걸 다 얘기했어요.



 "호랑이가, 호랑이가 저 사람을 죽였어요."





*부크크에서 발간된 [빨간책_ 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에 수록 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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