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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쯔뜨끄 Mar 02. 2016

문득 정신을 차려보니

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

누군가 날카로운 송곳으로 찌르는 것 같다.  머리에서 울퉁불퉁한 아픔이 반복적으로 느껴진다. 불쾌하기 짝이 없다. 베개에 머리를 쳐 박고 꾹꾹 아플  때마다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넷...... 열.


일정한 속도로 아픔이 느껴졌다. 더 이상 참지 못 하고 서랍장 깊숙한 곳에서 두통약을 꺼냈다. 부엌으로 달려가 수돗물을 그대로 받아 마셨다.


이제 좀 괜찮아지려나......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지 긋이  눌러본다.


커피 포트에 물을 올렸다. 커피가 말라붙은 컵 다섯 개가 개수대에 쌓여있다. 개수대에서 컵 하나를 꺼내 물로 대충 헹궜다. 커피 얼룩은 손가락으로 대충 문질러 없앴다. 싱크대 서랍에서  인스턴트커피 하나를 꺼내 컵에 털어 넣는다. 물이 끓는 잠시 동안 싱크대에 등을 기대고 섰다.


작은 원룸이 한 눈에 들어왔다. 방 안은 어두웠고, 축축했다. 창 밖을 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커튼이 창을 가리고 있었다. 커튼을 걷고, 창을 활짝 열었다. 찬 공기가 방안으로 훅 들어왔다. 날이 흐렸다. 방안은 많지 않은 햇빛으로도 충분히 환해졌다.


탁! 하는 소리에 움찔 돌아봤다. 물이 다 끓었다. 컵 안에 뜨거운 물을 붓는다. 조심히 컵을 기울여 빙글빙글 돌린다. 커피가 자연히 녹도록 내버려뒀다.


아직 뜨거운 커피를 들고 침대에 걸터앉았다. 호로 록 호로록 소리 내어 커피를 마신다.


멍하게 있다가 문득 정신이 들었다. 내 시선이 머무 는 곳이 어딘지, 난 뭘 하고 있는지.


내 시선은 TV에 머물러있었다. 나는 TV를 보고  있었다.

TV……


어? TV가 언제부터 켜져 있었지? 분명 나는 TV를 켠 기억이 없다. 원래 TV가 켜져 있었던 건가? 아니면…… 숨 쉬는 것처럼 너무 당연하게 TV를 켠 건가? 그리고 기억을 못 하는 건가?

방은 TV 소리로 가득했다. 방금 전까지 방 안은 조용하고, 공기만 가득 차 고독한 곳이었다.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방 안은 TV에서 떠드는 소리로 세상 더 없이 소란스러운  곳이었다. 설마, 이사 온 날부터 쭉 저 TV가 켜져 있었던 건 아니겠지? 그러고 보니......

나는 저 TV를 끈 기억도 없다.


컵을 들고 있는 오른쪽 손목이 너무 아팠다. 순간 들고 있던 컵을 놓쳤다. 미지근해진 커피가 바닥에  쏟아졌고, 컵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컵을 개수대에 가져 다 놓고 행주를 빨아 왔다. 바닥에  쏟아진 커피를 닦아야 했다.  

이전까지는 몰랐던 TV 소리가 바닥을 닦는 내내 귀에 거슬렸다. TV를 껐다.


조용하다고 느낀 방과 실제로 조용한 방은 달랐다. 도대체 난  그동안 어떻게 살았던 걸까? 어떻게 살았길래, 이 시끄러움을 조용하다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인 걸까?


TV 뿐일까……? 얼마나 많은 시끄러운 것들을  의식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내 집이 낯설어지는 순간이다.


침대에 누웠다. 오늘은 신경을 곤두세우고 모든 것을 의식해 보기로 했다. 작정하고 모든 소리를 듣기로 했다. 느낌이 좋다. 공기가 움직이는 소리까지도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고요하다.


웅웅웅 냉장고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도대체 어떻게 저렇게 요란한 소리를 지금껏 몰랐을까. 한 번  의식된 소리들은 더 이상 소리가 아니었다. 소음이 되었다. 금 새 방안 가득 냉장고 소리로 가득 찼다. 웅웅웅 철커 덕 웅웅. 이 곳은 내가 알던 내 방이 아니었다.

공장 한 가운데 누워있는 것 같았다. 벌떡 일어나, 냉장고 전원 코드를 뽑아버렸다.


다시 고요해졌다.

내가 내뱉은 숨을 재빨리 다시 삼켜봤다. 후우, 흡! 후우. 흡! 고요한 방에 내 숨소리로 가득 찼다.  

조금 더 숨을 길게 빼 봤다. 후우우우우 하고 다시 흡! 삼키려는데 이상한 신음소리가 내 들숨에 섞여 들어왔다.


옆집이다. 순식간에 내 고요가 또 깨져버렸다.

옆집 여자. 나와 생활 패턴이 달라 거의 마주친 적은 없다. 겨우 한 번? 언젠가 퇴근하고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가는데, 외출하는 그녀와 마주친 적이 있다.  그때 그녀는 화려한 옷에 두꺼운 화장으로 치장하고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또각또각 구두 소리에 어울리는 화려한 향수 냄새가 났다.


신음소리는 점점 더 격렬해졌다. 우리 집이 이렇게 방음이 안 되는 곳이었나, 짜증이 몰려왔다.

베개로 머리를 감싸고 노래를 불렀다. '한 곡 다 부르면 끝나 있겠지......' 생각하고 아무 노래나 부르기 시작했다. 간주 전주 생략하고 불렀더니 노래가 너무 짧았나, 격렬한 신음은 아직 그대로였다.

벽을 힘껏 세게 두드렸다. 쾅쾅쾅 쾅! 쾅쾅쾅 쾅! 그들의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더 이상 내가 뭘 하겠나...... 나는 다시 누워  손가락으로 귀를 틀어막았다. 그들의 즐거운 시간은 한참 후에야 끝났다. 격렬한 신음은 옆집 여자가 냈는데, 왜 내가 기운이 빠지고 다리에 힘이 풀린 걸까. 옆집 현관문이 열렸고, 투박한 발소리를 내는 누군가가  내려갔다.

씨발. 나는 조용히 말했다.


격렬한 신음소리가 지나간 후에 내 방은 다시 전처럼 고요해졌다.



쿵... 쿵... 쿵...



소리가 들렸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무슨 소리인지 가만히 들어봤다.



쿵... 쿵... 쿵...



내 심장 소리가 들렸다. 크고 강하게 내  몸속에서 뛰고 있다. 집중해서 들으려고  할수록 쿵쿵 소리는 더 커졌다. 내 귀에 내 심장이 뛰는 소리가 들린다. 평소에도 이렇게 큰소리를 내며 뛰고 있었을까?


양손으로 가슴을 살짝 눌렀다. 내 심장의 울림을 느끼고 싶었다. 심장은 생각보다 강하게 뛰고 있었다. 그 울림이 고스란히 가슴을 누르고 있는 손으로  전달됐다.


왜 이렇게 뛰는지 알 수 없지만, 심장이 뛰는  소리와 손으로 전달되는 그 움직임이 좋았다. 점점 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더 가까이 그 움직임을 느끼고 싶었다. 조금 더...... 조금 더......



[와장창]



심장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울림도 느껴지지 않았다. 내 심장이 깨졌다.


깨진 심장은 날카롭게 조각 났다. 심장 조각은 순식 간에 온 몸으로 흩어졌다. 깨져버린 심장이  온몸을 아프게 했다. 머리로 올라 간 조각은 머리를 쿡쿡 찔러 아프게  했고, 다리로 간 조각은 발가락 끝을 찔러 저리게 했다. 어떤 조각은 내 귀로 올라갔다. 귀를 막아버렸다. 나는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들을 수 없다. 들리지 않았다.  

눈물이 난다. 작은 심장 조각 하나가 눈을 찌른다.




“개새끼…… 나는 이렇게 힘든데…"




*부크크 전자책으로 발간된 [빨간책_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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