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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쯔뜨끄 Mar 26. 2016

K교수 이야기

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

 큰 창으로 햇빛이 가득 들어온다. 햇빛은 창가에 놓아 둔 유리잔에 그대로 쏟아졌다. 유리잔에 가득 차 있던 얼음이 달그락 녹아내렸다. 갈색 커피 사이로 투명한 얼음이 반짝 빛났다.

 

 K교수는 이틀 만에 눈을 떴다. 흐릿한 시야에 누군 가의 얼굴이 보였다. 부인인가 생각했다. 아니, 딸이다. K교수의 눈을 똑 닮은 딸이다. 딸은 쏟아지는 햇빛을 등지고 K교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괜찮아? “


 K교수는 대답이 없었다. 흐릿한 딸의 얼굴이 선명해질 때까지 눈을 깜빡이기만 했다.


 “의사 선생님 불러줄까?”


 잔뜩 불안한 표정을 하고 있는 딸을 보고 K교수는 씽긋 웃어 보였다. 그제야 K교수 딸은 잔뜩 쳐진 눈썹을 풀고 어색하게 K교수를 따라 웃었다.


 "웃으니까 더 못생겼네, 우리 딸."  


 "칫......"


 뼈만 남아 앙상해진 K교수의 손을 딸이 너무 꽉 잡고 있지만, K교수는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딸은 보드라운 엄지 손가락으로 K교수의 손등을 자꾸만 쓸어내렸다. K교수의 아내가 의사와 함께 들어왔다. 의사는 간단하게 몇 가지만 묻겠다고 하고는, 오늘이 며칠이냐 물었다.

 

 “궁금하오?"


 K교수가 되물었다. 젊은 의사는 K교수의 대답을 듣고 K 교수의 손가락을 살짝 들었다가 놨다. K교수는 부러 손가락에 힘을 주며,


 "1960년 8월 23일 아니오?"  


 자기 생일을 말했다.


 아내와 딸은 K 교수의 말에 키득 웃었다. 그 병실 안에서 오직 그 젊은 의사만이 괜히 더 심각한 얼굴을 하고 차트에 뭔가를 끄적거렸다. ‘망할 노인네가 나 랑 장난을 치려고 함.’이라고 적었을까, K교수는 속으 로 생각했다.  

 젊은 의사가 입고 있는 하얀 가운 주머니에서 작은 손전등을 꺼냈다. K교수의 눈에 비췄다.  

갑자기 화악 빛이 들어와 K교수는 얼른 눈을 찡그렸다. 큰 창으로 쏟아지던 햇빛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던 얼음이 된 기분이었다. 눈알이 달그락 녹아내릴 것 같았다.


 젊은 의사는 손전등을 다시 하얀 가운 주머니에 넣으면서 K교수에게 열부터 일까지 세어 보라고 말했다.  


 "텐, 나인, 에잇, 세븐, 식스, 파이브, 포, 쓰리, 투, 원."


 K교수는 젊은 의사 들으란 듯이 큰 소리로 수를 셌다. 의사를 따라 들어와 아무 말없이 서서 발끝만 동동거리던 예쁜 간호사가 힐끗 K교수를 쳐다봤다.


 의사는 쓸데없이 몇 가지를 더 묻고는 K교수의 병 실에서 나갔다. K교수의 아내는 다시 의사를 따라 나갔다.  

피곤했다. K교수는 잠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다시 속으로 숫자를 세어봤다.


 '일, 이, 삼, 사, 오, 칠, 팔, 구, 십.'  


 이상했다.  


 다시 손가락을 꼽아가며 숫자를 세어봤다.  


 '일, 이, 삼, 사, 오, 칠, 팔, 구, 십'  


 자꾸만 손가락 한 개가 남는다. 그새 손가락이 하나 늘었을까?  


 K교수는 어릴 적 같은 동네에 살던 형이 생각났다. 아직도 잊지 못하고 있는 파란 대문 집 형. 파란 대문 집에 살던 그 형은 여름에도 항상 왼손에 까만 벙어리 털장갑을 끼고 다녔었다. 털장갑을 낀 왼손을 등 뒤로 숨기고 걷다 보니, 걸음걸이는 자연히 뒤뚱뒤뚱했다. 어린 K교수는 물론이고 모두들 그 털장갑 속을 궁금해했다.


 어느 날, 어린 K교수와 친구들은 누군가 한 명이 형의 그 털장갑을 벗겨 보자고 도모했다. 장갑을 벗길 술래를 정해야 했다. 다 같이 가위, 바위, 보를 했고 어린 K교수는 술래가 됐다. 어린 K교수의 친구들이 파란 대문 집 형을 붙잡으면, 어린 K교수가 재빨리 털장갑을 벗기기로 했다. 어린 K교수와 친구들은 골 목 끝에 몰래 숨어 파란 대문 집 형을 기다렸다.


 한참 뒤, 항상 그렇듯 왼손을 뒤로 감추고 뒤뚱뒤뚱 걸어오는 파란 대문 집 형이 골목 어귀에 나타났다. 무리 중 하나가 작은 소리로 '하나, 둘'까지 세었다. 뒤이어 어린 K교수가 큰 소리로 "셋!" 하고 외치면서 모두들 파란 대문 집 형에게 달려들었다. 순간이었다.


 어린 K교수는 벙어리 털장갑을 들고 서 있었고, 친구들은 “으악!” 소리를 지르며 도망갔다. 파란 대문 집 형은 그렁그렁 눈물이 가득 찬 눈을 하고, 장갑이 벗겨진 채 어린 K교수와 마주 보고 서 있었다.  


 어린 K교수도, 파란 대문 집 형도, 조용히 흐르던 그때의 그 시간마저 그대로 멈췄다. 어린 K교수와 파란 대문 집 형은 한참 동안 움직이지도 못하고 서로 마주 보고 서 있었다. 모든 게 그대로 멈춰 버렸다.


 그때 그 순간에, 그곳에서 움직이고 있던 건 오직 하나였다. 까만 털장갑이 벗겨진 왼손에 구부정하게 나와 있는 형의 여섯 번째 손가락. 그것뿐이었다.


 그 날의 기억이 아직도 또렷하다. 어찌 잊을 수 있겠는가?


 파란 대문 집 형의 그렁그렁한 눈에서 눈물이 툭 떨어졌다. 그제야 멈춰있던 모든 것이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형은 어린 K교수의 손에 들려있던 털장갑을 오른손으로 도로 빼앗았다. 그리고 왼손을 바지 주머 니에 푹 꽂아 넣고 어린 K교수를 빠르게 지나쳐갔다.


 파란 대문 집 형은 잘 있을까?    


 K교수는 다시 한 번 손가락을 꼽으며 숫자를 샜다. 이번에는 영어로 샜다.  


 '원, 투, 쓰리, 포, 파이브, 식스, 세븐, 에잇, 나인, 텐'

 

 이번에는 제대로 수를 샜다. 그런데도 손가락이 하나 남는다. 왼손 새끼손가락 옆으로 구부정하게 무언가 꿈틀거렸다. K교수의 왼쪽 여섯 번째 손가락이 삐죽 나와 있었다. K교수는 화들짝 놀라 번쩍 눈을 떴다.


 밤이다. 잠깐 눈을 감고 있는다는 게 그만 잠이 들 었다. 벽에 붙인 작은 간이침대에 K교수의 아내와 딸이 앉아 있었다.


"...... 여보."   


 "물, 마실래요?"  


 K교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음…… 얼음 좀 넣어줘요."  


 K교수의 아내는 컵에 따랐던 물을 반쯤 본인이 마시고, 남은 컵에 얼음을 네 개 넣었다. 그리고는 누워 있는 K교수를 일으켜 물을 먹여줬다.


 K교수는 물은 마시지도 않았다. 그냥 컵에 입만 댔다가 뗐다.  


 "괜찮아요?"  


 K교수의 아내가 묻는다. 아내의 걱정돼 죽겠다는 목소리에 조용히 앉아있던 딸이 일어나 침대 가까이 왔다.  


 "내가 마실게."  


 K교수는 아내에게서 컵을 받아 들었다. K교수는 컵을 가만히 둥글렸다. 컵 속에 들어있던 얼음이 달그락달그락 소리를 냈다. K교수의 아내와 딸은 침대 철 프 레임에 손을 얹어 놓고 K교수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K교수는 아내와 딸의 손가락을 낱낱이 세어봤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  


 K교수는 속으로 숨을 휴우 내쉬었다.  


 ‘휴…… 잊지 말아야지.’




*부크크 전자책으로 발간된 [빨간책_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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