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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쯔뜨끄 Mar 27. 2016

내 남자를 사랑한 여자(1)_분홍색 편지봉투

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

 "겨울이었어요. 전날 밤부터 뉴스에서 20년 만의 강추위가 올 거라고 떠들어대더니, 정말 그랬어요. 그날은 너무 추웠어요. 난 사실 약속 시간을 잘 지키는 편이 아니에요. 항상 약속 시간보다 5분 늦곤 하죠. 의도한 건 아닌데, 모르겠어요. 항상 늦었어요 그렇게. 그런데 그 날은…… 그 날 따라 약속 시간보다 10분 일찍 도착했어요. 사거리 횡단보도에서 친구를 기다리는데, 건너편 건물 1층에 카페가 보였어요. 난 카페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기로 했어요. 그날은 너무 추었거든요.”


 그녀는 내 눈을 똑바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저 가만히 눈을 살짝 아래로 내리깔고, 가지런히 책상 위에 올려둔 그녀의 손만 보고 있었다. 시원시원하게 생긴 이목구비와는 반대로 그녀의 손은 작고 통통했다. 나이에 비해 주름도 없는 편이었다. 나의 시선을 느꼈는지 그녀는 작고 통통한 손을 무릎 위로 옮겼다.


 “난 따뜻한 라테 한잔을 마시며 창 밖을 구경했어요. 카페 창 밖의 모든 사람들은 20년 만에 온 강추위에 모두들 한껏 움츠리고 다녔어요. 그가 보였어요. 그 많은 사람들 속에서 그 사람은 단번에 내 눈에 들어왔어요. 그는 내가 서 있던 그 횡단보도 앞에 서 있었어요. 어깨에서부터 깔끔하게 툭 떨어지는 긴 코트가 잘 어울렸어요. 짧은 회색 울 목도리를 목에 두르고, 코트 깃을 세웠더군요. 세워진 깃 사이로 부드러운 목도리가 보였죠. 코트 단추는 빠짐없이 채웠어요. 검은색 가죽 장갑을 낀 손으로 갈색 서류가방을 들고 있었어요.”


 아래로 내리깐 그녀의 눈이 반짝였다. 나에게 그날의 그의 모습을 얘기하며 그녀는 속으로 그날의 그를 그리고 있는 것 같았다.


 “그 사람은 어깨를 쫙 펴고 걸었어요. 움츠리고 걷는 다른 사람들과는 달랐어요. 그 모습이 어찌나 자신감 넘쳐 보이던지……눈을 뗄 수가 없었어요. 그는 횡단보도 신호가 바뀌자 성큼성큼 걸어 내가 있는 카페로 들어왔어요.”


 이 대목을 말할 때 그녀는 연신 내리깔고 있던 눈을 똑바로 치켜떴다. 그리고는 허리를 곧추세우고 그녀의 어깨를 힘껏 폈다. 마치 어깨를 쫙 피고 걷는 그 날의 남자를 재연이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가 카페 문을 열고 들어와 자리에 앉을 때까지 눈을 뗄 수 없었어요."


 그녀가 내 눈을 똑바로 쳐다봤다.


 "저보다 더, 잘...... 아시죠? 그 사람이 얼마나 멋진 사람인지......?"


 나는 아무 말 없이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는 내가 동의해 주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의 눈은 여전히 반짝였고,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1



 두 달 전이었어요. 같은 동네에 사는 엄마들을 불러 커피 한잔에 수다를 떨고 있었죠. 난, 그런 걸 좋아해요. 많은 사람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많이 웃고 떠드는 그런 거. 유쾌한 사람들의 웃음소리 사이로 초인종 소리가 들렸어요. 현관으로 나갔어요. 근데 누구인지 물어도 아무 대답이 없더라고요.


 현관문을 열었어요. 분홍색 편지 봉투가 발 앞으로 툭 떨어졌어요. 누군가 문틈에 꽂아놓고 간 것 같았어요. 떨어진 봉투를 들고 작은 정원을 지나 울타리까지 걸어 나왔어요. 좌우를 둘러봐도 아무도 없었어요. 분홍색 편지 봉투에는 내 이름이 쓰여 있었어요. 딱, 내 이름만. 세상에 그렇게 기분 나쁜 물건은 처음이었어요, 처음.

……


 그때 그냥, 버려버릴 걸 그랬어요. 그랬더라면, 난 그냥 아무것도 모르고 지나갔을 텐데...... 항상 그랬던 것처럼, 행복했을 텐데.....


 아무튼 분홍색 편지 봉투를 들고 멀뚱히 서 있는데, 집 안에 있던 동네 엄마들이 우르르 나왔어요. 저녁 장을 보러 가야 한다고 인사를 하고 저마다 집으로 돌아갔어요. 나도 저녁을 준비해야 했어요. 그녀들을 배웅하고, 분홍색 편지 봉투를 들고 집으로 들어왔죠. 그리고 나중에 뜯어볼 요량으로 그 기분 나쁜 물건을 거실 테이블에 올려뒀어요.


 커피잔과 접시들을 치우고, 뒷 베란다에서 빨래를 걷어 정리했어요. 오늘 저녁은 뭘 먹어야 하나, 냉장고 문을 열고 고민하고 있는데 남편에게서 문자가 왔어요.


[오늘 조금 늦을 거 같아요. 저녁 먹고 들어갈게요.]


 아이들은 점점 크고, 각자 자기들만의 세상을 꾸려나가기 시작하면서 점점 나와 멀어지고 있었어요. 큰 아이는 대학생이 되자 교환 학생으로 유학을 떠났고, 둘째 아이는 여느 또래 고등학생과 다르지 않게 사춘기를 겪고 있었죠.


 여자가 아닌 엄마로 산 20년이었어요. 오직 아이들 만을 위해 살아왔는데...... 그런 아이들이 이제 점점 나에게서 멀어지는 것 같았어요. 그 시기에 난 상처받고 있었어요.


 그때 상처받는 내 옆을 지켜준 게 남편이에요. 바쁜 시간 쪼개 먼저 연락해주고, 주말마다 교외로 여행을 다녔어요. 따듯한 말 한마디 한마디가 위로가 됐어요. 그동안 아이들에 밀려 남편에게 전혀 신경을 못쓰고 있었던 게 어찌나 미안하던지. 그렇게 어디 모난 것 없이, 내 가정은...... 평범하게 완벽했어요.


 아이들도, 남편도 없는 집에서 간단하게 요기를 하고 거실 소파에 앉아 텔레비전을 켰어요. 거실 테이블 위에 아까 그 분홍색 편지 봉투가 보였어요. 오랜 인생을 살아온 감이었을까, 아니면 아직 조금 남아있는 여자의 육감이었을까. 난 그 편지 봉투를 뜯고 싶지 않았어요. 한참을 만지 작 거렸어요. 그러다 문득 익숙한 냄새를 맡았어요. 남편의 향수 냄새. 봉투에서 희미하게 남편의 향수 냄새가 났어요. 더 이상 망설일 수가 없었어요. 분홍색 편지 봉투를 조심히 열어봤어요.


 누군가의 장난으로 치부해버리기에 난, 너무 오래 살았어요. 편지를 다시 곱게 접어 분홍색 편지 봉투 안에 넣었어요. 그리고 화장대 서랍 가장 깊숙한 곳에 봉투를 넣었어요. 아무도 꺼내지 못 하도록.

남편은 12시가 다 되어서야 돌아왔죠. 평소와 같이 웃으며 들어오는 남편에게서, 향수 냄새가 났어요.

그 날 남편은 일찍 잠이 들었어요. 난 잠든 남편의 얼굴을 보고 앉아 있었어요. 누군가의 장난일까. 아니야, 누가 이런 위험한 장난을 친단 말이야. 다른 집으로 가야 할 편지가 잘못 온 걸까...... 아냐, 분명 내 이름이 쓰여 있었잖아......


 난,여러 가지 가정을 해 봤어요. 그런데 단 한 가지 가정은 절대 할 수가 없었어요. 아니 어쩌면 제일 먼저 떠올린 생각을 온갖 가정들로 덮어버린 걸지도 모르겠네요. 그렇게 날이 샜고, 남편은 출근을 했어요.

남편이 출근 한 텅 빈 집안에서 난 하루 종일 정리되지 않는 생각에 사로 잡혀있었어요. 그리고 저녁 무렵 화장대 서랍에 넣어 둔 봉투를 꺼내 편지 내용을 다시 한번 확인했어요.


[그를 놓아주세요. 010 **** ****]


 광고 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요즘 이런 식의 광고가 많으니까. 편지를 찢어 버릴까, 생각했어요. 그런데 차마 찢지 못 했어요. 아직도 남편의 향수 냄새가 났거든요. 남편이 돌아오면, 편지를 보여주고 상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남편이 돌아왔어요. 남편은 찌개가 맛있다며 밥을 두 그릇이나 먹었어요. 밥은 먹고. 그래 밥은 먹고 난 그다음에, 그다음에 말해야지...... 생각했어요.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가 인정 해 버릴까 봐. 사실이라고 할까 봐. 자기를 그만 놔 달라고 할까 봐......

다음 날 난, 편지에 적힌 전화번호를 눌렀어요. 여섯 번 연결 음이 울리고 단아한 목소리의 여자가 전화를 받았어요. 아무 말도 나오지 않았어요. 내 이름을 말해야 할까. 남편 이름을 말해야 할까. 내 남편을 아느냐 말해야 할까, 편지를 받았다고 말해야 할까…… 망설이다 결국 아무 말도 못 하고 전화를 끊으려는데 수화기 너머 여자 목소리가 들렸어요.


 "만나고 싶어요."







2편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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