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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쯔뜨끄 Apr 09. 2016

낭만에 대하여

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


그날 기억해?
그가 물었고, 나는 기억나지 않는다고 말했다.
사실 나는 기억이 났다.
항상 기억하고 있지는 않았는데,
그의 물음에 번뜩 생각이 났다.

맞아. 그랬다.
나는 술을 마시면 한강으로 갔다.
신천역 단골 술집에서
삼성동 우리 집으로 가는 길에는
탄천이 있었다.
그 탄천을 따라 조금만 걸어가면 한강이었다.

강물 흐르는 소리가 크게 들리고
강건너에는 테크노마트 불빛이 현란했다.

길고 긴 한강 줄기 중 일부였다.
사람이 없었다.
간간히 자전거 타고 훽 하니 지나가는 사람들.
그들 뿐이었다.
공원으로 만든 구역도 아니었다.
가로등이 밝지도 않았다.
그냥 정말 쌩,
날 것의 한강 가 였다.

술을 마신 날이면,
혼자 가서 풀만 가득한 그 곳에 앉아 있었다.

발을 뻗으면
넘실대는 강물에 신발이 다 젖을 만큼,
그렇게 가까이 가 앉아있었다.
대부분은 혼자였지만,
언젠가는 좋아하던 오빠와 함께 가기도 했고(아마 그가 기억하냐 물은 그날이 그날인것 같다)
말 많은 친구와 같이 가기도 했다.
태지의 앵콜 심포니공연을 보고 온 날
눈을 맞으며 그 곳에 가서 울었고,
우울함이 극에 달했던 어떤 날은
압구정까지 걸었다.
해가 뜰 때까지
혼자 앉아 있었던 날도 있었다.
와, 정말 그랬다.

강물은 크게 넘실 거렸고,
내 마음도 그에 못지 않게 크게 넘실거렸다.
강 건너 불빛은 신기루 처럼 아른거렸다.

이 얼마나 낭만이 그득한 기억인가!
최백호에게 낭만은
비 내리는 날 옛날 식 다방에 앉아 마시는
도라지 위스키 한잔에
색소폰 소리 듣는 것이지만,

나에게 낭만이란,
술기운에
가물가물 정신이 나가기 직전 한강에서의
물 소리와,
풀 썩은 내,
아른아른 거리던 강 건너 불빛이 만드는
몽롱함이다.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낭만에 대하여 생각해 보니,
그 때가 내 인생 최고의 낭만기인것 같다.

그렇게 한두시간 앉아있으면,
그대로 그 자리에
한강의 돌이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 하곤 했다.
심장이 아릿하고,
오금이 찌릿했다.
다시 생각해도 그렇다.

역삼동으로 이사를 하고 난 후부터
내 낭만은 끝이났다.
그 때 사귄 남자친구는 걷는 걸 싫어했고,
그 다음에 사귄 남자친구는
강보다 바다를 좋아했다.

6년동안 그 아린 낭만을 잊고 지냈다니......

그래도 다행인 건,
20살 21살에 낭만을 느꼈다는것.
더 다행인 건,
이제라도 다시 그 날들이 생각 났다는 것,
더욱 더 다행인건,
자취방 계약 기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자취방을 다시 삼성동으로 옮기면 된다는 것.

아직 가지 않은 20대.
그 어린 날의 낭만을 다시 느끼고 싶다.
그리고 좋아하는 사람과 그 곳에 가서
그에게 말 해야겠다.

발가락이 참 예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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