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눌 것이 과거뿐인 사람들
"첫 데이트가 하고 싶어."
뜬금없이 그녀가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녀는 녹차 라떼를 시켜놓고 창밖에 내리는 비를 보고 있었고, 나는 아메리카노를 마시며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가끔 이해 못 할 말들을 하곤 했다. 가령 '오빠는 내 외모보다 성격, 마음 씀씀이가 좋아서 날 만나는 거잖아. 그럼 내가 남자로 태어나도 날 사랑했겠지?' 라던지 '오빠가 우리 아빠면 진짜 좋겠다. 우리 엄마 어떻게 생각해?' 라던지 하는 도무지 말의 의도를 파악 할 수 없는 말들을 할 때도 있었다.
그래도 그런 얘기들은 그냥 생각 없이 하는 말이 대부분이었고, 해맑게 웃으면서 농담처럼 하던 얘기들이었다. 그래서 대충 말을 맞춰주면 됐었다. 그런데 이번엔 진지한 얼굴을 하고 말하는데, 이건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한참을 그냥 그녀 얼굴만 쳐다봤다.
"첫 데이트라니, 그게 무슨 말이야?"
그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그녀의 시선이 머문 곳을 따라가봤다. 아무것도 없었다. 조용히 내리던 눈도 멈췄다. 그녀는 마치 잠깐 잠꼬대라도 한 것처럼 방금 한 말을 흘리고 금세 잊어버린 것 같았다. 나도 개의치 않고 다시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렸다.
한참 후, 다 식어버린 아메리카노를 한 모금 삼키고 그녀를 바라봤다. 멍한 눈을 하고 여전히 창 밖을 내다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시켜 놓은 녹차 라떼는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거렸다. 자꾸만 말을 꺼내려다 망설이고 있었다. 내가 물었다.
"남자랑 여자가 처음 하는 그 데이트? 그 첫 데이트?"
다 식어버린 녹차 라떼를 한 모금 마시고 그녀는 대답했다.
"아니."
답답함에 참고 있던 화가 치밀었다. 종일 멍한 얼굴을 하고 앉아있다가 한다는 소리가 '첫 데이트, 첫 데이트’뿐이다가 겨우 얘기 좀 하려고 했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아니' 라니. 당장이라도 쏘아붙여 한마디 하고 싶지만 꾹 참았다. 그녀와 싸우고 싶지 않았다.
"데이트를 지금 백 번도 넘게 했는데, 우리 둘이 어떻게 첫 데이트를 다시 해. 그건 내가 어떻게 해 줄 수 없는 일인데?"
그녀는 나를 빤히 쳐다봤다.
"오빠가, 웬만하면 네가 하고 싶다는 거 다 들어주려고 하는데, 첫 데이트는 어찌 할 수가 없다. 대신 우리 천 번째 데이트는 특별하게 보내자"
나도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 최대한 화가 난 눈빛을 숨기고 갑자기 툭 튀어나올 못난 말들을 꾹꾹 참으며 입술을 앙다물었다. 그리고 씽긋 웃어 보였다.
"뭘 입을까......구두를 신을까 운동화를 신을까, 머리는 묶어야 하나 풀러야 하나 수십 번 고민하고, 만나서는 무슨 말을 해야 하나......이런 얘기를 하면 그가 좋아할까? 괜히 어색하면 어쩌기 걱정하고 조심하고."
그녀는 조근조근 말했다.
"만나서는 다음에 이거 하러 가자, 이거 먹으러 가자 다음을 약속하고. 헤어져서는 오늘 내가 한 말, 내가 한 행동 되새기면서 괜히 부끄러워서 애먼 이불만 걷어차는 그런 첫 데이트.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에서 첫 이 아니라, 설렘, 걱정, 기대로 가득한 좋으면서도 뭔가 어색한 데이트가 하고 싶다구."
그녀가 지금 데이트에 불만이 있다는 걸 알았다. 그래서 멍한 얼굴로 앉아 날 보는 둥 마는 둥 했구나 깨달았다. 그녀는 계속 말을 이었다.
"첫 데이트에서는 서로 현재와 미래를 이야기해. 우리 내일 삼청동에 가자, 우리 토요일에는 돈 가스 집에 가자. 서로가 앞으로를 약속해. 그런데 우리는 언제부턴가 만나면 과거를 얘기해. 예전에 갔던 그 레스토랑 맛있었지? 지난 주에 본 영화 재미있었지?......"
그냥 그러면 되는 거였다. '카페에만 있지 말고 나가서 재미있는 거 하고 놀자.' 간단하게 말 하면 되는 거였다. 그렇게 조근조근 이해되지 않는 쓸데없는 말을 늘어놓을 필요는 없었다. 그건 계속해서 내 화만 돋우는 꼴이었다.
"우리 둘이 만나서 나누는 것이라고는 과거뿐이야. 이게 얼마나 슬픈 일인지 오빤 모르지?"
그래, 몰랐다. 과거를 나눈다는 게 뭔지, 그게 왜 슬픈지, 그녀가 도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나는 몰랐다.
"현재랑 미래는 무한한데, 과거는 나눌 수 있는 양이 정해져 있어서, 언젠가 떨어지게 되는 거야. 그리고 그때 나눌 것이 과거뿐인 사람들의 관계도 끝나는 거고."
난 더 이상 화난 눈빛을 숨기지 않았다. 붉으락 푸르락 상기된 얼굴로 그녀를 바라봤다. 그녀에게 한마디 하려 입을 떼는데 그녀가 먼저 말했다.
"그만 만나자."
그녀는 그 날 아침부터 헤어짐을 준비했을까, 아님 뜬금없이 꺼낸 그녀의 말처럼 뜬금없이 헤어지자고 한 걸까.
어찌됐든 그렇게 그녀는 우리의 마지막 날 처음을 그리워하면서 떠났다.
그리고 오늘 난 그녀가 말한 그 첫 데이트를 다른 사람과 하러 가는 중이다.
그녀의 덫에 걸려 나는 다른 사람과의 첫 데이트를 준비하면서 그녀를 생각한다. 내 첫 데이트는 설렘, 걱정, 기대에 옛 여인의 환영이 함께한다. 이 모든 게 그녀의 계략이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