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
“좋아했어.”
“네가?”
“우리.”
서로 좋아하는 사이였다니. 명한이는한 번도 그런 얘기를 한 적이 없다. 당황스러웠다. 명한이가취한 게 분명했다. 그도 그럴 것이 초저녁부터 둘이 만나 술을 마셨고,이 곳에 와서도 맥주를 연거푸 마시지 않았는가. 명한이가 취해서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언제?”
명한이는 애먼 눈을 지근지근 밟으면서 대답을 하지 않았다. 명한이가 지금까지 만난 여자들은 내가 다 알고 있다. 사귀기 시작하면제일 먼저 나에게 소개하여줬고, 사귀지 않고 짝사랑으로 끝나더라도 나에게 말해줬다. 그녀와 명한이 사이의 일은 한 번도 들은 기억이 없다. 한참을 말이없던 명한이가 입을 열었다.
“대학 때, 내가윤희를 많이 좋아했어. 미선이 친구였거든. 대학들어가서 미선이랑 사귀면서 제일 친한 친구라고 윤희를 소개받았어. 윤희 얼굴은 알고 있었어. 같은 과니까. 전공수업 때 오다가다 마주치면, 그냥 예쁘구나 생각하고만 있었어. 처음에는 그냥 미선이의 제일 친한 친구, 그 뿐이었는데 갈수록마음이 생기더라. 안 되지, 그러면 안 되는 거였어. 그런데 사람 마음이 그렇게 안 된다 마음먹어서 정리되는 게 아니잖아. 미선이랑 관계가 깊어질수록 윤희가 더 좋아지더라. 그때 윤희한테 남자친구가 있었거든. 내 속도 모르고 미선이가 자꾸 더블데이트를 하자는 거야. 윤희 커플도 CC였거든. 미쳐버리는 줄 알았어. 윤희 옆에 다른 남자가 있잖아. 윤희한테 고백했어.나, 너 좋아한다고."
취해서 하는 헛소리가 아니었다.명한이는 진지했다. 뭐라고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 왜 말하지 않았느냐, 따질 일도 아니고. 여자친구의 친구를 좋아하다니, 너 정말 나쁜 놈이다, 질타할 일도 아니다. 다만, 그렇게 좋아하던 여자를 왜 나에게 소개해 줬을까 궁금했다. 우선, 명한이의 얘기를 끝까지 들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윤희 착하잖아. 내가좋다고 하니까 착해서 거절을 못하는 거지. 미선이 몰래, 윤희 남자친구 몰래 가끔 만났어. 그러다가 나는 미선이랑 헤어지고, 윤희도 남자친구랑 헤어졌어. 둘이 사귈까 했는데, 착한 윤희가 차마 자기 친구가 마음에 걸려서 사귀지는 못하겠다고 하더라. 우리 서로 좋아했는데, 그냥 친구로 남기로 했어. 착한 우리 윤희.”
그녀와 만난 눈 오는 12월의어느 날에도 그랬다. 같이 밥을 먹던 레스토랑 직원이 그녀에게 맘이 있었던 건지, 내가 화장실에 간 사이에 그녀에게 연락처를 받아갔다. 멀리 화장실 앞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자리로 돌아와 무슨 일인지 물으니, 그녀는 강아지처럼 웃으며 직원이 연락처를받아갔다고 말했다. 자기는 저런 부탁을 거절하지 못 한다고 했다. 기껏용기 내서 한 행동을 거절하면, 그 사람이 상처받을까 걱정된다고 했다.너무 착한 그녀였다.
명한이는 코를 크흡 삼켰다. 추웠다. 눈이 내리고 난 후라 바람이 더 찼다.
“들어가자.”
명한이를 데리고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명한이의 동창들은 갈 채비를 하고 있었다. 명한이도 나도 짐을 챙겨밖으로 나왔다.
“너무 춥다. 진짜추워 죽겠다.”
장례식장 입구를 나서던 명한이의 동창생 한 명이 말했다.
방향이 같은 몇몇은 한 차로 이동했고, 나머지는 지하철을 타러 갔다. 명한이와 나는 같이 버스를 타러 정류장으로 걸어갔다. 버스 정류장에 다 왔을 때, 나는 휴대전화를 두고온 게 생각났다. 명한이를 버스 정류장에 세워두고, 다시 장례식장으로 돌아갔다.
휴게실에서 그녀의 오빠가 여자와 얘기를 하고 있었다. 식당에 들어가, 앉아있던 자리에서 휴대전화를 찾았다. 3호실 안에는 대여섯 명쯤 되는 인원이 조문을 하고 있었다. 조문객들은그녀의 부모님께 자신들을 그녀의 직장동료라고 소개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얼굴을 한 번 더 보고 싶어, 3호실 밖에서 기웃댔다. 사람들에 가려 그녀의 모습이 제대로 보이지않았다. 휴대전화 벨소리가 요란하게 울렸다. 명한이었다. 아차 싶어, 허둥지둥 밖으로 나와 전화를 받았다. 명한이는 먼저 버스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다는 전화였다. 명한이는나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전화를 끊고 담배를 한대 피우려는데, 그녀의 오빠와 같이 있던 여자가 함께 얘기를 하며 내 쪽으로 걸어왔다. 미선씨였다. 인사를 해야 하나, 뭐라고 말을 해야 하나, 아는 체를 해야 할까, 잠깐 고민을 했다. 그녀의 오빠와 미선씨가 점점 가까이 왔고, 괜히 혼자 놀라 잽싸게뒤를 돌아섰다. 어차피 두 사람은 나를 알아보지도 못 할 텐데, 굳이뭣 하러 그러나 싶었다. 혹시나 싶은 마음에 뒤를 돈 상태로 최대한 그들과 눈을 마주치지 않고 어그적어그적 그 자리를 피했다.
밤이 깊어 갈수록 눈이 얼어붙어 도로는 미끄러웠다. 사람도 차도 조심조심 길을 다녔다. 버스는 한참을 기다려도 오지않았다. 명한이에게 전화를 걸었다. 명한이는 벌써 집에 도착했다고했다.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다. 마신 술이 다 깨버렸다. 추위에 몸이 덜덜 떨리고, 이가 탁탁 부딪혔다. 몸을 잔뜩 웅크리고 버스 정류장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직장동료들이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왔다. 두 명은 바로 온 버스에 빠르게 올라탔고, 세 명은 내가 앉은 옆자리에나란히 앉았다.
“갑자기 이게 무슨 일이야.”
“그러게요.”
“윤희 씨 다음 주에 승진 예정되어 있었잖아요. 어쩌면 좋아.”
그녀의 이름이 그들의 입에서 흘러나왔고, 궁금함에 움츠렸던 몸을 억지로 펼치고 귀를 활짝 열었다.
“윤희 씨 승진해요? 빠르네……윤희 씨 착해서 그런가?”
“지난 분기에 새 프로젝트 기획서를 윤희 씨가 직접 사장님께 올렸대요. 그 프로젝트가 진행되지는 않았는데, 그 일로 사장님이 윤희 씨를 잘 봤나 봐요. 어차피 강대리 사직서 수료하고 나면, 그자리 비니까, 윤희 씨 앉히기로 했다나 봐요.”
“무슨 프로젝트였는데요? 박과장님은 아세요?”
“그게, 강대리가 예전부터 준비하고 있던 아이디어였어요. 매주 야근하고, 주말마다 출근해서 작업하고. 우리 회사가 좀 어려웠었잖아요. 인력이 부족하니까, 새 프로젝트 기획팀에 넣을 인력이 부족했거든요. 진행되고 있는 프로젝트 더 키워서 수익을 내는 게 더 중요했었어요. 그래서 새 프로젝트 기획팀에 강 대리하고, 윤희 씨만 있었던 거예요. 윤희 씨가 착하니까 그 팀에서 일 했지, 보통 사원들은 그 팀에서 일 못해요. 대접 못 받지, 커버 쳐 줄 팀장도 없지. 또 강대리가 좀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잖아요. 그 날도 공휴일이었는데, 강대리가 그 전날부터 야근하면서 기획서 마무리하고, 이제 오탈자 검사만 남아있었나 봐요. 마음이 놓인 거죠. 그때 윤희 씨가 강대리 일 하고 있다고 걱정된다고, 자기도 돕겠다고 오후 늦게 회사에 나왔대요. 착하잖아요. 강대리는 마무리만 윤희 씨한테 맡기고 잠깐 숙직실에서 눈 좀 붙이고 있었대요. 윤희 씨가 사무실에 혼자 남아서 마무리하고 있었는데, 사장님이 나왔대요. 공휴일에 나와서 일하고 있는 윤희 씨가 기특했나 봐요. 사장님이 기획서 가지고 와 보라고 윤희 씨한테 그 자리에서 지시했대요. 그래서 윤희 씨가 그 기획서를 사장님께 직접 올린 거예요. 그런모습을 사장님이 좋게 본 거죠. ”
“강대리님은요?”
“숙직실에서 자고 있었죠. 사장님오신 것도 나중에야 알았대요. 윤희 씨가 강대리를 깨우지를 못했대요.강대리가 너무 곤히 자고 있었나 봐요. 그도 그럴 것이 몇 주째 잠을 제대로 못 잤으니까. 기획서도 다 끝났겠다 안심하고 푹 잔 거죠. 윤희 씨가 착해서 강대리 고생한 거 너무 잘 아니까, 푹 자라고 깨우지를 않았나 봐요. 사람이너무 착해서……”
“그런데 그 프로젝트 진행은 안됐다면서요?”
“기획서 내용은 좋았는데, 회사내부 사정 때문에 진행이 연기된 거예요. 아마, 내년도 삼사분기 즈음 다시 진행할 거라고 하시더라고요. 사장님이 그 다음날 팀장 급 이상 다 모아놓고 윤희 씨 칭찬을그렇게 하시더라고요. 사람이 너무 착하다고. 그래서 이번에 윤희 씨가 승진 대상자였는데…… 그렇게 착한 사람이 이렇게 허망하게 가 버려서 어떡해요.”
그녀의 직장동료들은 저마다 안타까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얘기를 하던 박 과장이 먼저 온 버스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남은 두 사람이 박 과장에게 두 손 흔들며 배웅해줬다. 박 과장이 가고, 남은 두 사람은 말이 없었다. 서로 핸드폰만 만지작거렸다. 나는 다시 몸을 웅크렸다. 한참은 기다린 것 같은데 버스가 도통 오질 않는다.
“강대리님은 왜 그만두시는 거야?”
“건강이 안 좋다고 그러던데?”
“아, 어디가 안좋으실까……”
“글쎄.”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손바닥을펼쳐 내리는 눈을 받았다. 하얀 눈이 손바닥 위에서 금세 녹아버렸다.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꽂아 넣고, 왼쪽으로 간신히 고개를 돌렸다. 집으로 가는 버스가 멀리서 엉금엉금 기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윤희 씨는왜 강대리님을 안 깨웠을까?”
“강대리님이 너무 곤히 자고 있었다잖아. 윤희 씨 원래 좀 마음이 약하고 착해서, 못 깨웠을 거야. 나라면…… 깨웠을 텐데. 난 좀 못됐잖아.”
“그게, 착한 건가?”
한 사람은 대답 없이 어깨만 들었다 놨다.
드디어 버스가 도착했다. 버스정류장에 그녀의 직장 동료 두 명을 남겨두고 나는 버스에 올라탔다.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느리게 달려온 버스는 출발할 때도 느리게 출발했다. 집까지 한참은걸릴 것 같다.
버스 안은 따뜻했고, 꿉꿉한습기로 가득했다. 마지막 버스 안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빈자리가 많았다. 맨 뒷자리 창가에 자리 잡고 앉았다. 김이 잔뜩 서린 창을 손바닥으로 닦았다. 물기가 지저분하게 흩어진 창 밖으로 흐릿하게 밤 불빛이 비쳐 들어왔다. 창을 열었다. 찬바람이 훅 들어왔다. 꿉꿉한 버스 안 공기가 정화될 때까지 열어 둬야겠다.
“뒷자리 창문 좀 닫아주세요.”
버스 기사 아저씨가 소리쳤다. 나는 대답 않고 창문을 닫았다. 창에 비친 내 모습이 아른아른 보였다. 검은 목도리를 하고 있는 나를 가만히 보다, 목도리를 풀러 무릎위에 올려뒀다.
‘명한아, 아파트입구로 나와라. 술 한 잔 하자.’
명한이에게 문자 메시지를 보내고, 다시 김이 서린 창에 모양을 냈다. 주먹을 꼭 쥐고, 손난로 발바닥을 그리고, 검지 손가락을 펼쳐 점을 찍어 발가락을만들었다. 점을 네 개를 찍을까 하다, 다섯 개를 마저 찍었다. 아기 발바닥이 그려졌다. 내가 그린 아기 발바닥을 가만히 보다, 내 손바닥으로 다시 쓱쓱 닦아 없앴다.
창 밖에는 눈이 더 많이 오고 있었다. 눈 오는 12월의 어느 날, 착한 그녀 가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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