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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쯔뜨끄 Feb 22. 2016

하얀 달이 뜬 밤

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


목이 너무 탔다. 현관문을 열기 무섭게 부엌으로 뛰 오갔다. 냉장고에서 생수 병을 꺼내 입을 대고 마셨다.


[벌컥벌컥벌컥]


"캬아아"


[벌컥]


아직 한 모금 정도 남아있는 생수 병을 뚜껑도 닫지 않고 식탁 위에 그대로 올려놨다. 몸이 천근 만근이다. 발걸음도 떼기 힘들어 발을 방바닥에 붙인 체 질질 끌고 거실 소파에 앉았다.

바닥에서 뭔가가 끌어당기는 것 같다. 눈을 감았다.

처음에는 엉덩이가,  그다음에는 다리가 질척한 진  흙바닥으로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편안하다고 해 야 할까, 불편하다고 해야 할까. 뭐가 됐든 묵직한 그 기분이 싫다. 일어나야 하는데, 일어나야 하는데  생각했다.  

당최 피곤함에 찌든 몸뚱이가 움직일 생각을 안 했다.

그냥, 그대로, 잠이, 잠이 들고 이...ㅆ...


[바스락]


소리에 퍼뜩 눈을 떴다.  나뿐인 방 안에서 바스락 소리가 났다.


'설마, 쥐인가!‘


지난 여름, 쥐가 집에  들어온 적이 있다.  그때도 조용한 집 안에서 갑자기 바스락거리는 소리가 들렸었다. 그 날 일을 생각을 하니, 순간 소름이 쫘악 끼쳤다.


두 다리를 소파 위에 올렸다. 초초한 맘으로 집안  구석구석을 살펴봤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다시 움직이는 작은 소리라도 들으려고 온 신경을 귀에  집중했다.


[바스락]


났다! 소리가 한 번 더 났다. 베란다다.


쥐새끼가 눈치 채지 못 하게 살금살금 다가가, 대번에  때려 죽여 버려야겠다고 생각했다.


뭐 막대기 같은 게 없나 살펴봤다. 티브이 옆에 리모컨이 보였다. 너무 짧다. 프라이팬? 설거지를 안  했다. 야구 방망이 같은 거 없나? 없다. 나는 야구를 싫어한다. 그래, 우산! 현관에 있는 우산이 생각 났다.

쥐새끼가 베란다에 있으니, 소파에서 내려와  현관으로 가도 되겠다고 생각했다. 소파에서  일어났다.

쁘드덕 하는 소리가 났다.


'젠장, 망할 가죽 소파’


순간 모든 동작을 멈추고 베란다를 바라봤다. 내  숨소리라도 들리면 쥐새끼가 도망 가 숨어 버릴까, 숨까지 참았다.


[바스락]


아까와 같은 바스락 소리가 또 났다. 다행히 쥐새끼가 내가 움직이는 소리를 듣지 못한 것 같다. 아주 조용하게 참았던 숨을 입으로 조금씩  내뱉었다. 그리고 내가 걸을 수 있는 한 가장 조용한 걸음으로 현관으로 갔다. 긴 우산이 보였다. 우산 꽂이에서 우산을 뽑아 들고 베란다로 가기 위해 돌아서는데 베란다 문이 스르르르 열렸다.


'이런, 쥐새끼가 아니고 도둑놈이구나!‘


아차 싶었다. 휴대 전화는 소파 위에 있었다. 잠깐 하는 순간 오만 가지 생각이 들었다. 도둑이라고  소리를 질러야 하나, 우산으로 도둑을 직접  때려잡을까, 아니면 그대로 돌아 현관문을 열고 도망칠까, 아니,  소파로 뛰어가 휴대 전화로 신고를 먼저 해야 하나.

아주 천천히 스르르르 열리던 베란다 문이 멈췄고, 열린 문틈으로 뭔가 보였다.



......



토끼다.



'토끼?‘


베란다에는 하얀 토끼가 코를 벌름거리면서 앉아 있었다. 귀는 쫑긋하게 세우고 연신 입을 오물오물,  콧구멍을  벌름벌름거렸다.


토끼가 도대체 왜 우리 집에 있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봤다. 다시 봐도 토끼였다. 그래…… 내가 술을 너무 많이 마셨다. 요즘 회사에 일도 많았고, 조직개편이다 뭐다 스트레스가 많았다. 게다가 오늘 술까지 마시지 않았나. 손바닥으로 얼굴을 세차게 문질렀다.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고 다시 베란다를 봤다. 여전히 하얀 토끼가 앉아 있었다.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나도 가만히 토끼를 바라봤다. 토끼의 하얀 털이 반짝 빛났다.


"쭈쭈 쭈쭈. 이리 와봐 “


토끼를 불렀다. 벌름거리던 토끼의 코가 멈췄다. 토끼가 나를 봤다.


"쭈쭈 쭈쭈. 이리 와보라니까 “


토끼가 두 번 총총  뛰어나왔다. 나도 한발짝 성큼 토끼에게 다가갔다. 토끼가 다시 베란다 문 밖으로 뛰어 나갔다.

저 토끼를 잡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귀엽게 생겼으니 내가 키워도 되고, 아니면 캐나다에 있는 애들한테 선물로 보내주면 좋아하겠다 생각하면서 베란다로 뛰어 나갔다. 혹시 도망갈지도 모르니, 베란다 문을 닫고 샅샅이 뒤졌다.


"우쭈쭈 토끼야 아 토끼야 아 어딨니가 “


아무리 찾아도 베란다에 토끼는 없었다. 쪼끄만 토끼가 뭐 이리 빠른가 생각하고 뒤를 돌아봤다. 베란다 문 너머 거실에 토끼가 코를 벌름거리며 앉아있었다.


‘어느 틈에 저기로 나갔지’


토끼가 또 도망갈까 싶어서 베란다 문을 열지 않고 토끼에게 말을 걸었다.


"이리와 봐라. 나, 나쁜 사람 아니야아.“


검지 손가락을 까딱까딱 움직이며 토끼를  유인했다. 토끼가 내 손가락에 집중한 사이에 베란다 문을 슬며시 열고 몸을 날려 거실에 있는 토끼를 잡을  생각이었다.


"잡았다! “


잽싸게 몸을 날렸다. 거실 바닥에 고꾸라졌다. 내 품에 토끼는 없었다. 분명 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틈에 토끼는 소파 위에 앉아 있었다. 보통 빠른 놈이 아니다. 이렇게 해서는 도저히 저 토끼를 잡을 수 없을 것 같았다.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바지 뒷주머니에서 상추가 나왔다. 상추를 흔들며 토끼를 유인했다.


"이것 봐라, 토끼야 아~! 상추 우우~ 오오! 상추~! 맛있겠지이? “


소파 위 토끼는 콧구멍을 빠르게 벌름거리더니 이내 관심 없다는 듯 뒷다리로 귀를 긁었다. 상추를 바닥에 버리고 다시 주머니를 뒤졌다. 꾸깃한 만 원짜리 한 장이 나왔다. 만원을  살랑살랑 흔들며 토끼를 유인했 다.


"우우와! 만원이네에? 토끼야 아~ 만원 이다! 이것 봐라아“


연신 뒷다리로 귀를 긁던 토끼가 멈칫했다. 드디어 토끼가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사람이고 토끼고 그저 돈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 구만!’


토끼가 귀를 쫑긋 세우고는 내가 들고 있는 만 원을 쳐다봤다. 가끔 코를 벌름거리면서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렸지만, 눈은 내가 든 만 원을 향해 있었다. 나는 만 원을 흔들면서 토끼에게 조금씩 가까이 다가갔다. 완벽하게 만 원에 집중한 토끼는 내가 다가가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토끼 바로 앞까지 다가간 나는 한 손으로 만 원을 토끼에게 최대한 가까이 들이대면서 동시에 다른 한 손은 토끼를 잡으려고 준비하고 있었다.

긴장이 돼서 침을 꼴깍 삼키는 순간 토끼가 만 원만 잽싸게 획  낚아채서는 뛰기 시작했다. 순간 방심  했다. 젠장!  

망할 토끼를 잡으려고 뒤를 쫓았다. 무슨 놈의 토끼가 저렇게 빠른지 따라가기가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부엌 식탁 밑으로, 안방 침대 위로 또 아래로.


나는 다리에 힘이 풀려 자꾸만 미끄러졌다.  사람처럼 뛰어서는  안 되겠다 싶었다. 나도  토끼뜀을 하면서 토끼를 뒤쫓았다.


싱크대 위로 아래로, 쌓아둔 그릇이 와르르 무너졌다. 옷 장 안으로 밖으로, 비싸게 주고 산 와이셔츠에 토끼 발자국이 찍혔다. 장식장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애들 사진이 들어 있는 액자가 바닥으로 떨어져 와장창 깨졌다. 집 안을 몇 바퀴 돌고 다시 거실이다.


문득 달밤에 내가 뭐 하는 짓인가 생각이 들었다.  토끼뜀을 멈추고 그 자리에 그대로 벌러덩 누웠다. 멀찌감치 앞서 뛰던 토끼도 그제야 멈춰 서서 나를 쳐다봤다. 또 코를 벌름거리고 있었다. 거친 숨을 몰아 쉬고 있는데, 토끼가 천천히 내 옆으로 깡충깡충 뛰어 왔다.


누워있는 내 배 위에 올라탔다. 토끼는 나한테서  뺏어 간 만 원을 입에 물고 코를 벌름거리며 동그란  눈으로 나를  내려다봤다. 한참 동안 나를 내려다보던 토끼가 만 원을 툭 뱉어냈다. 그리고는 다시 베란다로 깡충깡충 천천히  뛰어갔다.

누워있던 내가 비스듬히 상체를 일으켜 뛰어 나가는 토끼를 바라봤다.


토끼는 낮은 베란다 문턱을 깡총하고 넘었다. 토끼는 높은 베란다 난간도 가볍게 깡총하고 올라갔다. 난간에 올라 선 토끼가 뒤를 돌아 나를 쳐다봤다.

토끼의 하얀 털이 반짝 빛났다. 토끼는 눈을 두어 번 깜빡이고는 입을 오물거렸다. 나에게 뭐라 뭐라  말하고는 가볍게 깡총 뛰어 창 밖으로 사라졌다.

나는 다시 허탈하게 벌러덩 누웠다.



'병신. 토끼 새끼가 나보고 병신이래.




*부크크 전자책으로 발간된 [빨간책_쁘쯔뜨끄의 짧은 이야기]에 수록된 글입니다.



정월 대보름이죠~?

달이 보이지 않는 날이네요.


그래도 기분 내 보려고,

2014년 남산 정월대보름 행사에 간 사진을 같이 올려봅니다.


소원빌고...



내 더위 네 더위 다 사가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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