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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쁘쯔뜨끄 Jan 19. 2017

30년 전에 담근 그 술은 보약 대접을 받는다

농담_쁘쯔뜨끄의 책이야기


소란  (박연준, 북노마드)

지난 제주 여행을 떠나기 전에,
어차피 뚜벅이 여행일테고, 자주 쉴 것을 예상해서 책을 한 권 챙기기로 했다.
마음은 먹었으나, 아침 부랴부랴 짐을 챙기면서 빠뜨렸다.
비행기 안에서도, 숙소에서도 빈 시간 동안 읽을 거리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멍때리면 즐거웠지만......
여튼.
김포 공항에서 책을 챙기기 않았다는 걸 깨닫고는,
제주에 있는 작은 책방에 들르자~ 친구들과 약속했다.
노느라 우리는 까맣게 잊어버렸고,
떠나기 전 날 밤.
회를 먹으려 찾아간 어두운 길 가에, 떡하니 있었던 아주아주아주아주아주
정말 아주아주아주 작은 동네 서점
만춘서점.
오픈한지 한 달 정도 됐다고 했다.
딱, 내가 차리고 싶은 바닷가 작은 서점이었다.
신나서 이것저것 물어보고 구경하고 살펴보다, 책 한권을 샀다.
내가 딱 좋아하는 크기의 책.
클러치에도 쏙 들어가고, 지하철에서 한 손으로 들고 읽을 수 있는 딱 좋은 크기.

서울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반 읽고,
홍대에 약속 있어 가는 길에 꺼내 읽고,
잠들기 전에 꺼내 읽다가
성질이 나서 집어 던졌다.


크기에 비해, 종이가 너무 두꺼웠다.
한 손으로 들고 읽기에 너무 뻣뻣했다.
책을 참 조심해서 읽는 스타일인데, 잘 넘어가지 않는 책장에.
고정되지 않아 잔뜩 손가락에 힘을 줘야하는 책때문에 성질나서 던져버린 그 책을.
잠들기 전에 차분한 마음으로 다시 읽기 시작했다.

산문집을 좋아하지는 않는데, 이상하게 요즘 산문집을 자주 읽는다.
그저 누군가의 일기장을 훔쳐보는 기분으로,
다른 사람은, 작가는, 시인은 무슨 생각으로 살아나가고 있을까,
그저 그게 궁금해 읽는다.

그러다 와 닿은 파트.

"서른"

아, 정말로 내일 모레 서른이 되는 나는.

(뭐, 생일이 지나지 않아 제대로 서른은 아니고,
미쿡나이로 따지자면 2017년 1월1일은 아직 만 28세일테고, 생일이 지나도 "만29"세 이니...
라고 변명하는 순간 서른을 인정하는 건데...젠장)

아무튼, 요즘 서른에 예민하다.

나는 서른이 안될 줄 알았다.
나에게 서른은 없는 나이인 줄 알았다.
내 마음은 아직도 20살 대학 새내기의 마음가짐인데,
왜 내 육체는 잠깐 오르는 계단에도 숨이차고,
깊게 박힌 베개 자국은 쉬이 사라지지 않고,
점점 눈가에 주름이 보이는 걸까.

본문에 최승자 시인의 글이 나온다.

이렇게 살 수도 없고 이렇게 죽을 수도 없을 때, 서른살은 온다.
여전히 나는 작은 일에도 쉽게 화가 나 평정을 잃고
방방 뛸 때가 많지만 서른이 넘었으므로 이내 괜찮은 척, 기다리는 척 한다.
마흔이 넘어서는 뭘 하는 척해야 하나?
쉰이  넘고 예순이 넘어서는?
(중략)
늘 무언가를 생각하고, 준비를 해야 어른인 '척'도 하고, ㅈㄹ 사는 '척'도 하고, 사랑하는 이들을 안심시키는 '척'도 할 수 있을 테니까.

정말 힘든 아홉수를 보냈다.
아홉수 친구들끼리 만나, 술을 마시는 자리에서
나는 아홉수들 중에서도 단연 아홉수를 가장 아홉수 답게 보낸 사람으로 인정 받았다.
아, 인정받아 버렸다.

오늘이 12월 29일이니,
정말 내일모레가 지나면 나는 서른이 된다.

마음이 소란하다.

가구나 장신구, 기계따위는 삼십년이 지나면 골동품 대열에 오르고,
음악이나 영화, 책도 30년 묵으면 반 고전 대열에 낄 수 있고,
30년 전에 담근 술이 있다면 그 술은 보약 대접을 받는다.

30년 묵은 나는,
점점 나이만 들어가는 노처녀가 될 것인가, 귀한 사람이 될 것인가
이제야 인간 취급을 받을 것인가.

아직 늙지도, 이제 젊지도 않은 나이 서른.
아, 서른....
오늘 난 좀 술을 마셔야겠다.


덧,
제주의 만춘 서점은 함덕서우봉해변 무슨 리조트 더라, 그 옆길에 있어요.
세모 모양의 하얀색 건물이
정말 정말 정말 생각지도 못하게 툭.
하고 나타납니다.

따로 포스팅 할 거에요.

나도 책방을 갖고 싶어요.
나중에 나중에 나중에 그렇다고 너무 나중은 아니고...
우리 멍멍이 포가 더 늙어 죽기 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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