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이 매일 이어짐
오래된 아이폰을 사용하다 보니 배터리 잔량이 자주 급격히 떨어진다. 그럴 때 저전력 모드를 켠다. 화면 밝기를 낮추고 시각적 효과를 끄거나 백그라운드에서 진행되는 작업을 줄여 배터리 사용 시간을 연장한다. 전문 용어로는 멋지게 최적화라고 표현하던데, 아무튼 유용하게 잘 쓰는 기특한 기능이다. 70대이신 부모님 못지않게 기본 기능과 자주 쓰는 앱 몇 개만 사용하는 편이라 불편함이 크진 않다.
신랑도 불필요한 일들에 신경을 끄는 저전력 모드를 잘 쓴다는 걸 최근 들어서야 알았다. 예를 들어, 요리하면서 주방 정리를 한다거나 출근 준비를 하면서 동시에 어질러진 주변을 치우지 않는다. 전에는 '저거는 저거는, 어머님이 등짝 스매싱을 너무 아끼셔서 저렇다'라고 속으로 욕을 많이 했었다. 근데 아니었다. 나도 아프고 난 뒤부터 신랑처럼 지금 가장 중요한 한 가지 일만 신경 쓰고 나머지는 나중에 하기 시작했다. (힘이 딸려서 그렇게밖에 할 수 없기도 했지만.) 그랬더니 훨씬 편하고 오히려 낭비되는 에너지가 적으니, 나중에 나머지 일들을 처리할 때 힘도 덜 들었다.
오늘 아침에도 그걸 또 확인한 일이 있었다. 신랑이 욕실에서 머리를 말리면서 선풍기를 틀었다. 우리는 샤워부스 안쪽의 물기를 더 빨리 제거하기 위해 잠시 선풍기를 틀어두곤 한다. 으레 그 이유 때문일 거로 생각한 내가 선풍기 방향을 샤워부스 쪽으로 돌렸다. 그러자 신랑이 말했다. “지금 더워서 나 바람 쐬려고 튼 거야.” 그러니까 신랑은 머리 말리는 잠깐도 더운 걸 안 참는 쪽인 거다. 나는 머리 금방 말리니까, 귀찮으니까, 하면서 더운 걸 참는 쪽이다. 신랑은 자기도 불편한 걸 참는다고 말하지만 나보다는 불필요한 전력 소모를 잘 막는 편인 것 같다.
사소한 일로 치부하며 미련하게 견디기보다는 뭔가를 바꾸거나 옮기고 간단한 도구를 사용해 불편을 최소화한다. 특히 매일 하는 일상적인 것에 있어서는 작은 것이라도 자기 편의에 맞춘다. 나는 귀찮다는 핑계로 (이미 소진되어 힘이 없으니 악순환의 결과이기도 했지만) 좀 더워도 참고 좀 추워도 참고 힘들고 불편해도 넘겼다. 아무리 충전해도 완충은 커녕 에너지가 늘상 새고 있었다. 그런 게 쌓이고 쌓여 면역계며 자율신경계, 대사기능과 소화계, 피부계까지 온통 방전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전에는 신랑의 그런 면을 보며 자신을 끔찍이도 아끼는 ‘되련님'이라고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지만 내가 배워야 할 점이었다.
40대가 되면서는 최대치의 마력을 얼마나 폭발적으로 끌어올릴 수 있느냐 하는 건 중요하지 않은 것 같다. 매일이 매일 계속된다. 40년을 반복하고서야 알았다. 내일도 모레도 다음 주도 끝없이 오늘이 이어진다. 다음 달에도 3년 후 5년 후에도 나는 계속 일하고 놀고 배우고 관계하며 삶을 살아가야 한다. 폭발적인 힘을 보여줘야 하는 스프린트(단거리를 전력으로 수영하거나 달리는 레이스)가 아니라, 멈추지 않고 오래오래 가는 마라톤이다. 그리고 이미 많은 거리를 쉼 없이 달려온 상태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치열한 경쟁속에서 살아온 꽃같이 예쁜 청춘들이 몸도 마음도 방전된 상태로 막막해하곤 했다. 이렇게 어떻게 사냐고, 앞으로 나이가 들수록 사회에서는 힘든 일이 더 많다던데, 하면서. 힘든 일이 많이 있지만 그 일들을 감당할 수 있는 근육과 지혜가 생긴다고 말해줬다. 그건 완벽하게 유능한 인간이 됨으로써가 아니라 내려놓고 선택할 줄 알게 되면서 할 수 있게 되는 거고, 지금처럼 살다 보면 그건 꼭 될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인터스텔라의 한 장면처럼, 벽장 넘어 미래의 아빠가 딸에게 말 거는 장면처럼, 미래의 네가 지금 네 방 창문을 죽어라 두드리며 외치고 있을 거라고. '너 괜찮아, 충분히 잘하고 있어, 나 이렇게 잘 살아왔어.' 그러니까 너무 불안해하고 힘들어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주고 있을 텐데 20대의 나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하긴 했다고 말해주곤 했다. 힘든 시기에 힘들어하는 건 당연한 거라고, 힘들어하는 나를 구박하기보다는 쉬게도 해주고 격려도 해줘야 더 오래 더 멀리 갈 수 있다고 얘기해 줬다. 그 말들이 얼마나 가 닿았을지는 잘 모르겠다.
올해는 나도 전에 비하면 훨씬 저전력 모드로 살아가고 있다. 에너지 효율이 좋아지고 완충되어도(건강해져도) 앞으로도 계속 저전력 모드로 살 생각이다. 삶에서 정말 중요한 일에만 에너지를 쓰고, 쓸데없는 일에 더 이상 에너지를 낭비하지 않는 거다. 가령 이런 것들이다. 일정을 가득가득 채우지 않는 거다. 쉬는 시간을 많이 가지는 거다. 때로 No라고 말하고 목에 건 '언제든 이용 가능' 팻말을 뒤집어 두는 거다. 양질의 수면을 최대한으로 확보하기 위해 생활방식을 점차 조정하는 거다. 몸에 받지 않는 음식을 줄이는 거다. 핸드폰은 비행기 모드나 방해 금지 모드로 해두고, 삶에 놀이를 더 많이 들이고 아끼는 사람들과 편안하고 많이 웃는 시간을 갖는 거다. 자연에서 보내는 시간을 늘리고 무엇보다 내 상태에 귀 기울이며 무리하지 않는 거다.
나를 돌보는 일, 몸 건강과 마음 건강을 가장 우선시하는 거다. 다른 사람의 시선과 평가를 신경 쓰고, 남과 비교하고, 누군가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까 걱정하는 일은 더 많이 최적화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