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신피로증후군
어릴 때는 숙제, 양치, 목욕, 학습지, 피아노 학원 등등, 하기 싫지만 해야 하는 일을 하는 게 힘들었다. 재밌게 놀다가 그런 것들을 해야 할 때가 되면, '으아악! 하기 싫은데 맨날 해야 한다니!‘ 매번 그런 심정이었던 것 같다. 어른이 되면 해야 하는 일이 힘든 건 여전하고(이걸 읽고 있는 어린이가 없길….) 거기에 더해 놀이마저 어려워지는 것 같다. 어릴 땐 노는 게 제일 좋고 노는 법을 따로 배우지 않아도 아무렇게나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아무리 놀아도 지루해지는 법도 없었고 계속 종목을 바꿔가며 놀고 내 맘대로 새로 만들어 놀았다.
어른이 되어 스트레스를 해소해 보자며, 가벼운 흥미와 재미로 시작한 취미 생활도 잘하려는 욕심이 따라붙는다. 누구도 주지 않은 부담과 안 느껴도 되는 압박감에 짓눌린다. 남들과 비교하다 재미는커녕 괴로움 때문에 아예 시작도 못 하거나 중도 포기하게 된다. 어떤 일을 하는데 가장 방해되는 요소가 "잘해야 된다는 생각"이라고, 필즈상 받은 허준이 박사님도 유퀴즈에서 말씀하시던데. (그 말에 동의하지만 그래도 수학을 즐길 수는 없겠어요, 박사님) 어른 되기가 어려운 건 딴 게 아니고 순수하게 즐기는 법을 잊고 삶에서 놀이를 잃어서가 아닐까.
올 2월부터 일을 줄일 수 있게 되어 휴식 시간을 많이 가졌다. 일을 줄이니 시간이 많았다. 쉬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한동안은 그간의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미뤄뒀던 청소나 집 안 정리 같은 나만의 프로젝트 TO DO LIST를 만들어 하나하나 지워가며 보냈다. 보고 싶었던 전시나 영화도 보고, 관광객처럼 북촌으로, 서촌으로, 박물관으로 다니면서 서울 여행도 많이 즐겼다. 고생한 나에게 보상을 주는 것 같아 즐거웠고 영감도 많이 얻었지만, 지친 몸으로 여기저기 다니기엔 힘에 부치기도 했다.
아무 의무도 책임도 없고 계획도 생각도 할 필요가 없었다. 그 낯선 시간을 손바닥에 받아 들고 가만히 앉아 '뭘 하고 노는 거였더라? 뭘 해야 즐겁고 신나지?' 하고 나에게 물었다. 내가 삶에서 놀이를 오래 제쳐두었다는 걸 여실히 느낀 시간이었다. 그리고 책을 읽고 글을 쓰는 일이 자꾸만 하고 싶고 그 시간이 기다려지는, 내가 순수하게 즐기고 좋아하는 놀이라는 걸, 하면서 점점 더 알아간 시간이기도 했다.
작년에는 아무리 많이 자도 아침에는 정신이 안 깨고 밤에는 잠이 안 왔다. 일을 줄인 직후에는 몸이 기다렸다는 듯이 한동안 10시간씩 잤다. 수면시간은 자연스레 줄어들었지만, 몇 달 전부터 새벽 3시쯤 쿵쾅대는 심장에 놀라 깨는 일이 반복됐다. 새벽에 깨는 게 건강이 나빠지고 있다는 신호라는 내용을 어디서 보고 걱정도 많이 했었다.
최근에는 코르티솔 주기가 정상 리듬을 되찾은 것 같다. 코르티솔 분비가 시작되는 새벽 5~6시에 깨고, 오전 7~8시에 가장 높을 때 스트레스 반응이 약간 느낀다. 하루 동안 완만하게 낮아지다가 많이 떨어지는 시간인 오후 4~5시가 되면 졸려서 30분쯤 낮잠을 잔다. 밤 9시~10시가 되면 너무 졸려서 취한 듯 침대로 들어간다. 망가진 신체의 리듬과 균형이 천천히 조정 과정을 거쳐 이제 안정적인 수면 사이클이 자리를 잡은 것 같다. 오늘 부신 혈액 검사 결과에서도 수치가 정상 범위에 들어온 걸 확인할 수 있었다.
부신 피로 증후군. 이름도 낯선 부신이라는 작은 기관에서 코르티솔이 나온다. 이름이 스트레스 호르몬이긴 하지만 하는 일이 많다. 스트레스 상황에서 외부 자극에 맞설 수 있게 맥박과 호흡을 증가시키고 근육을 긴장시키고 혈압과 포도당 수치를 높이는 등의 일을 한다. 코르티솔 수치가 높은 상태가 오래 지속되면 많은 문제가 생긴다. 그런데 다른 기능도 하므로 또 너무 안 나와도 문제다. 체내 혈당 생성, 기초 대사 유지, 지방 합성 억제, 항염증 작용, 항알레르기 작용에 코르티솔이 필요하다. 지속적인 스트레스에 노출되어 과다 생성되다 보면 어느새 코르티솔이 고갈되어 나오지 않게 되고 다양한 증상이 나타난다.
작년 검사 결과지의 내 코르티솔 수치는 높낮이가 없이 그래프 바닥에 납작하게 지렁이처럼 붙어 있었다. 의사 선생님이 이건 70-80대의 수치라고 말했던 게 기억난다. 작년 10월에 들은 많은 진단명 중 하나다. 이후로 바로 일을 줄일 수는 없었지만 수면의 질을 높이고 식이를 제한하고 많이 쉬고 무리하지 않으면서 치료와 생활 습관 개선을 이어오고 있다. 이제 하나의 치료를 마친 셈이다. 3개월 뒤 재검에서도 계속 정상 범위인지 확인해 보기로 했다.
며칠 전 도서관에 들어서는데 입구에서 숲해설사 분이 학생 6~7명을 데리고 무슨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게 보였다. 뭔가를 짠~하고 보여주고는 “유치원 친구들은 이 대목에서 '와'하는데 역시 중학생들이라 반응이 없군요”라고 했다. 그러면서 "여러분은 청소년이잖아요, 어린이 시기는 지나갔고 어른이 되기 전이잖아요?" 하니 학생들이 “네” 하고 대답했다. 아이들의 그 대답에 놀랐다. 일단 중학생이라 대답을 안 할 줄 알았다. 그리고 자신이 어른이 되어가는 중이라는 걸 안다는 게 왠지 생경하게 느껴졌다.
'나도 저 나이 때 내가 어른이 되기 전 단계에 있다는 걸 알고 있었나? 어른이 된다는 건 어떤 거로 생각했을까?' 뭘 생각했든 혹은 아무 생각 없었든 80대의 부신 상태를 마흔에 경험할 줄은 상상도 못 했지. 어른 되면 놀이가 어려워진다는 건 일단 비밀로 해야겠다. 어쩌면 어른이 되어도 신나게 놀아 재낄 수도 있지, 쟤들은 신인류니까. 꼭 지혜롭게 놀이를 만끽할 줄 아는 어른이 되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