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묘한 메모의 묘미> 서평

끄적이는 것을 좋아합니다.

by 이파리

오늘 글은 뭘 쓸까 하고 심플노트(노트앱)를 켰다. 딱히 글감이 떠오르지 않는다. 잠시 우산을 쓰고 우중 산책을 하고 오니, 온라인 서점에서 주문한 책이 도착했다. 여러 권 중에서 지금 당장 시작하고 싶은 책은, 유유 출판사의 신간 마수에 또 걸려들어 주문한 <미묘한 메모의 묘미>. 끄적이기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그리고 이렇게 말맛이 좋은 제목의 책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림을 곁들인 메모, 마인드맵, 타이핑해서 정리한 메모와 지도 캡처가 올망졸망 그려진 옅은 회색의 책 표지가 귀엽다. 유난스럽기도 하지, 괜히 커버도 한번 벗겨봤더니 하늘색 속살에는 휘갈겨 써 알아보기 힘든 손 글씨와 옵시디언의 매핑 사진이 하얗게 숨어있다.


메모하지 못할 때는 아쉬웠고 가능하면 메모하는 편이지만 “메모를 다 이어 붙이면 당신이 될 것입니다.”라는 문장을 보니 ‘아 정말 그렇겠구나’ 싶었다. 과거 한 순간의 기록이자 나의 일면에 대한 흔적으로만 여겼다. 메모들을 쌓고 연결하면 생겨날 흐름을 떠올리니 그게 나구나 싶다.


무수히 많은 메모앱과 글쓰기 프로그램을 시도해 본 메모광답게 여러 가지 앱들도 소개해준다. 메모의 유형과 방식, 역할과 의미에 대해서 알아가며 자연스럽게 요즘 나의 메모하기와 글쓰기에 대해서도 생각을 정리할 수 있었다.

브런치에 11개의 글을 발행했다. 가볍게 생각하려고 했지만 '발행'이라는 단어가 주는 무게감이 있다. 그래서인지 브런치 화면에 곧바로 글을 쓰는 건 아직 어렵다. 먼저 심플노트에 메모에 가까운 짤막한 글을 되는대로 끄적인다. 그중에서 원하는 부분을 새 노트에 옮겨 본격 글쓰기를 하고 퇴고한다. 발행 전에 브런치 페이지에 복사해서 맞춤법이나 표현을 수정하고 발행한다. 괜한 부담 때문에 너무 번거로운 방식으로 하는 건 아닌가 하는 고민이 있었다.

또 아침에는 꼭 일기를 쓰는데, 계속 써왔지만 매일 같은 시간에 쓰기 시작한 건 올 초부터이다. 종이에 애용하는 펜으로 free writing이라고 할 수 있는, 필터 없는 일기를 쓴다. 어제 일이 나오기도 하고 꿈을 적을 때도 있다. 오늘 할 일 목록을 정리하기도 한다. 있었던 일에 대한 기록일 때도 있고, 감정이 쏟아져 나올 때도 있다. 뜬금없는 과거나 허무맹랑한 미래가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고 나서 일기를 훑어보면 요즘의 혹은 지금의 내가 선명하게 보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마음으로 사는지가.


일기 쓰기는 분명 좋지만, 손 글씨로 노트에 일기를 쓰는 게 비효율적이지 않나 생각했다. 검색도 안되고 분류나 정리도 어려우니까. 그리고 메모를 수첩에도 하고 휴대폰 메모장에도 하고 있다. 한마디로 중구난방인 이 방식도 좀 고쳐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다. 작가는 책에서 손으로 작은 수첩에 쓰는 메모, 휴대폰에 타이핑해서 남기는 간결한 메모 등, 각각의 메모 방식이 나름의 기능과 역할이 있다는 걸 설명해 줬다. 자유로운 끄적임이나 생각의 파편과 독자가 있는 글 사이에 중간 지대가 필요하고 메모가 그 역할을 해준다고도 알려줬다. 긴가민가 그만해도 되겠다. 계속 나만의 방식을 지속하면 되겠다.


그나저나 유유의 책은 이게 문제다. 앉은자리에서 다 읽어 버린다. 재밌는 책은 순식간에 끝나버려서 바로 그 점이 참 아쉽다. 다 읽고 나서 쓸데없는 걱정도 했다. ‘메모 거의 안 하고 사는데요? 메모 그거 왜 하죠?’ 하는 사람들도 많을 텐데. 이미 메모하는 사람들만 읽기엔 아까운데.


작가는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메모를 시작하는 순간 세상을 다르게 볼 수 있다. 보이지 않던 게 보이고, 알고 있던 게 새로워진다." 이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그리고 메모를 하는 일과 메모를 다시 들여다보는 일이 자기 자신을 더 잘 이해하게 해 준다고 믿는다. 종이에 적어보지 않으면 자기가 흐릿해지는 것 같다. 마치 중간중간 끊어지며 치지직 치지직 불완전하게 보이는 홀로그램처럼 말이다.


이미 메모를 사랑하는 이도 아직 메모의 맛을 모르는 이도 모두 즐길만한 책이다. 세상의 모든 평면이 종이였으면 좋겠다는 사람의 메모에 대한 사랑과 그가 느끼는 묘미가 전해졌다. 누군가 뭔가를 무척 좋아하는 모습은 보는 사람마저 신나게 만드는 것 같다. 나도 메모를 더 열심히, 더 많이 해야지.


다 읽고 작가 이름을 검색해 보니 소설과 에세이를 많이 쓰셨던데, 한 권도 읽은 게 없다. 책 표지에 작가 이름 "김중혁" 옆에 출판사 이름 ”유유“가 쓰인 게 꼭 작가님이 울고 있는 것 같다. "이렇게 또 인연이 됐으니 곧 작가님의 다른 책들과도 만나겠지요, 허허허." ("위로하지 말고 책을 읽어"라는 소리가 들린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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