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럴라인 냅, <명랑한 은둔자>, 바다출판사
‘솔직하게 쓴다는 건 이런 거구나.’ 알코올 중독, 거식증 같은 이야기가 나올 줄은 모르고 제목이 마음에 들어 가볍게 고른 책이었다. <명랑한 은둔자>. 작가 소개 글을 읽으면서는 나와 많이 다르다 싶었다(나는 뭔가에 빠지는 게 두려운 쫄보다). 하지만 금세 나와 비슷하다는 걸, 전혀 다를 바 없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나 스스로 꽤 솔직하게 마음을 들여다보고, 상충하는 면들을 인정하는 편이라고 여겨왔다. 그녀는 나에게 더 솔직할 수 있다는 걸 보여줬다. 자기 자신에 대해 낱낱이 다 썼다. 인간의 마음은 항상 변하므로 다 안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지만, 적어도 그녀가 아는데 숨기는 건 없는 듯한 인상을 받았다.
낙엽 쓰는 두 가지 다른 종류의 빗자루만큼이나 나와 그녀의 솔직함의 정도 차는 컸다. 하나는 뒷동산에서 주워와 둘둘 말아 만든 (나뭇가지 묶음이라고 할만한) 성긴 대나무 빗자루. 다른 하나는 먼지 하나도 빠져나가지 못하게 촘촘하고 부드러운 천연 갈대를 빈틈없이 가득 넣고 야무지게 꽁꽁 묶어 만든 고급 싸리 빗자루. 고급 싸리 빗자루로 마음을 샅샅이 쓸어 완성한 책은 읽을만한 가치가 있었다.
그녀는 고립된 생활을 하며 고독하게 지내온 사람이다. 나는 40년 가까이 외향인으로 살아오다 최근 들어 고독을 즐기며 은둔 중이다. 작가는 불안하고 우울하지만 나름의 명랑함도 가졌다. 나는 명랑한데 우울한 면이 있는 쪽이다. 사람들은 그녀를 차갑다고 오해한다. 수줍어서 그런 줄 모르고. 나의 우울도 많이들 알아채지 못했다, 나조차도.
읽는 동안 자주 페이지를 펼친 채로 생각에 잠겼다. 그녀의 속내를 들여다보며 나에 대해 더 많이 알게 됐다. 꼭지마다 떠오르는 기억을 끄적이고 그에 대한 단상을 적었다. 어떻게 이 책은 독자가 자기 마음을 보게 할 수 있었을까, 쓰지 않을 수 없게 만든 걸까. 웬만해선 감당하기 힘든 고통을 아는 사람만이 심연의 먼지를 털어낼 수 있나 보다. 그리고 그 솔직한 마음이 읽는 사람 마음의 먼지도 털 수 있게 해주는 것 같다.
아버지는 정신분석가이고 어머니는 화가이다. 선망의 대상이면서 동시에 원하는 것을 주지 않는(줄 수 없었던) 아버지. 작가는 늘 감정을 억제하는 아버지로부터 거리감을 느꼈다. 그녀의 아버지도 술로 많은 걸 억누르고 피하는 사람이었다. 어머니는 화가로 작품활동을 많이 했고 물건을 버리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작가는 일찍이 술로 안정감과 사교를 유지해 왔지만 1년 사이 부모를 차례로 잃고 술로 버티다 선을 넘었다. 중독자의 삶과 중독에서 벗어나는 과정에 대한 현실적인 이야기들.
10년 전 섭식장애 전문가를 찾아간 날, '성냥개비 굵기의 까만 청바지와 회색 스웨터를 입었고, 10년 후 오늘도 성냥개비보다 약간 더 굵은 까만 레깅스에 크림색 스웨터를 입고 상담사를 만났다'라고 썼다. 몸무게는 6킬로그램 늘었고 (최저 몸무게 대비는 11킬로그램), 몸에 관한 생각이 (43kg인 여자가) '뚱뚱하다'에서 아주 가끔만 그렇게 느끼는 정도로 바뀌었다고.
그러니까 회색 대신 크림색, 11킬로그램이 증가한 몸무게, ‘뚱뚱하다’의 정의가 살짝 느슨해진 것. 이것이 회복이란 말인가? 별 대단한 일처럼 보이지 않을 수도 있지만, 많은 면에서 실제로 이것이 회복이다. 점진적인 약간의 변화. 이 보 전진했다가 일 보 후퇴하는 것. 한 번에 1그램씩 작디작은 변화. 그것들이 충분히 쌓인 후에야 상당한 변화로 보이고 느껴질 수 있는 것이다.
‘낫는 것은 아픈 일’이라는 그녀의 말에서 회복 과정의 지난함이 느껴졌다. 거식증도 알코올 중독도 나와는 먼 이야기고 파괴적인 방식으로 살 만큼 고통도 크지 않은데 이런 얘기는 나와는 별 상관없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외로운 사람.
수줍음 많고 내향적인 사람.
혼자도 싫지만 함께도 싫은, 관계가 늘 어려운 사람.
애정욕구와 인정욕구가 삶을 이끌지만 언제나 갈증 나는 사람.
가족 때문에 애끓고, 연애와 우정 때문에 아파본 사람.
죄책감과 수치심, 자기 비난을 멈출 수 없는 사람.
자기혐오의 속삭임과 분투 중인 사람.
그래서 무언가에 중독되었거나 중독된 걸 모른 척하고 사는 우리.
그게 무엇이든 우리가 회피해 온, 지금도 열심히 애써 외면하고 있는, 주제들이 다 들어있다. 다양하고 풍성하지만 산만하지 않다. 두터운 선박 고정용 밧줄이 단단히 붙잡아 주는 것 같은 든든한 구석도 있다. 그래서 너무 가슴 아프거나 불편하지 않게 읽을 수 있다. 심연에 닿을 만큼 무겁지만 읽을수록 수면 위로 떠오르는 가벼움도 느껴진다. 나이 든 그녀의 이야기를 읽을 수 없다는 게 애석하다(그녀는 마흔둘에 폐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너무 짙어 맑은 책이다. 깊고 진솔한 성찰을 원한다면 읽어보길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