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한강,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 문학과 지성사

by 이파리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는 내가 처음부터 끝까지 전부 읽은 최초의 시집이다. 시를 읽지 못하는 병이 있었다. 아니, 시 한 편은 읽을 수 있었는데 시집을 읽지 못했다. 병마와 싸워보겠다며 시집은 종종 사 모았다. 늘 시 한 두 편을 읽어보려 애쓰다 다시 책장에 꽂았다. 거리에서도 별의별 걸 다 읽으면서 시는 읽히지가 않았다.


그녀의 소설처럼 시집에도 슬픔과 고통이 가득하다. 피하지도 않고 계속 마주한다. 마주하는 두려움이 얼마나 컸으면 '담 밑 하얀 돌'을 보고 '좋겠다 너는 생명이 없어서'라고 할까. 입술을 가르고 혀를 벤다. 시리게 춥고, 부스러지고 바스러지고, 피 흘리고. 검은 침묵, 검은 울음. 죽음의 고통. 다시 살아난 건 더 큰 고통. 사방에서 언제고 몰려든다. 새벽이고 밤이고 저녁이고 아침이고 쉴 틈도 없다. 과거에서도 꿈에서도 이국의 낯선 도시에서도 동네 산책길에서도. 시인은 생의 진통 속에서 '얼음의 고요한 모서리'를 응시한다.


회복기의 노래


이제
살아가는 일은 무엇일까

물으며 누워 있을 때
얼굴에
햇빛이 내렸다

빛이 지나갈 때까지
눈을 감고 있었다
가만히


회복기의 노래를 읽고 "하아~ 이제 좀 살만해지나, 삶이 좀 봐주는 시기도 있겠지" 하고 안도의 한숨을 다 내쉬기도 전에 곧바로 다음장에 아래 시가 나온다.


그때


내가 가장 처절하게 인생과 육박전을 벌이고 있다
고 생각했을 때, 내가 헐떡이며 클린치한 것은 허깨
비였다 허깨비도 구슬땀을 흘렸다 내 눈두덩에, 뱃가
죽에 푸른 멍을 들였다
그러나 이제 처음 인생의 한 소맷자락과 잠시 악수
했을 때, 그 악력만으로 내 손뼈는 바스라졌다


봐주는 건 없다. 쉬어가는 구간을 기대했는데 순진한 생각이다. 이름 모를 이놈은 어느 만큼 모진 것인가.


무제

무엇인가 희끄무레한 것이 떠 있다 함께 걸어간다
흘러간다 지워지지 않는다 좀처럼, 뿌리쳐지지 않는
다 끈덕진 녀석이다 말이 통하지 않는다 아무리 떠나
도 떠나지지 않는다 나는 달아난다 더 날아날 수 없
을 때까지, 더 날아날 수 없어 돌아서서 움켜쥐려 한
다 움킬 수 없다 두 팔 휘젓는다 움킬 수 없다 그러나
이따금
내가 홀로 울 때면
내 손금을 따라 조용히,
떨며 고여 있다


시인은 이 징글징글한 운명과 어떻게 합의를 볼 것인가 하는 물음이 생긴다.


서시

어느 날 운명이 찾아와
나에게 말을 붙이고
내가 네 운명이란다, 그동안
내가 마음에 들었니, 라고 묻는다면
나는 조용히 그를 끌어안고
오래 있을 거야.
눈물을 흘리게 될지, 마음이
한없이 고요해져 이제는
아무것도 더 필요하지 않다고 느끼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

당신, 가끔 당신을 느낀 적이 있었어,
라고 말하게 될까.
당신을 느끼지 못할 때에도
당신과 언제나 함께였다는 것을 알겠어,
라고.

아니, 말은 필요하지 않을 거야.

당신은 내가 말하지 않아도
모두 알고 있을 테니까.
내가 무엇을 사랑하고
무엇을 후회했는지
무엇을 돌이키려 헛되이 애쓰고
끝없이 집착했는지
매달리며
눈먼 걸인처럼 어루만지며
때로는
당신을 등지려고도 했는지

그러니까 당신이 어느 날 찾아와
마침내 얼굴을 보여줄 때
그 윤곽의 사이 사이,
움푹 파인 눈두덩과 콧날의 능선을 따라
어리고
지워진 그늘과 빛을
오래 바라볼거야.
떠리는 두 손을 얹을 거야.
거기,
당신의 빰에,
얼룩진.


안아주고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시인. 이 시집의 끝은 어떻게 마무리될까...


저녁의 소묘 5


죽은 나무라고 의심했던
검은 나무가 무성해지는 걸 지켜보았다

지켜보는 동안 저녁이 오고

연둣빛 눈들에서 피가 흐르고
어둠에 혀가 잠기고

지워지던 빛이
투명한 칼집들을 그었다

(살아 있으므로)
그 밑동에 손을 뻗었다


운명만큼이나 그녀 또한 만만치 않다는 생각이 든다. 놀랍고 아름답고 아프고 슬픈, 그러면서도 온기로 가슴을 꽉 채워준 그런 소설을 여러 편 쓴 사람이니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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