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매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선란, <천 개의 파랑>, 허블

by 이파리


콜리는 인간의 구조가 참으로 희한하다고 생각했다. 함께 있지만 시간이 같이 흐르지 않으며 같은 곳을 보지만 서로 다른 것을 기억하고, 말하지 않으면 속마음을 알 수 없다. 때때로 생각과 말을 다르게 할 수도 있었다. 끊임없이 자신을 숨기다가 모든 연료를 다 소진할 것 같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따금씩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알아차렸고, 다른 것을 보고 있어도 같은 방향을 향해 있었으며 떨어져 있어도 함께 있는 것처럼 시간이 맞았다. 어렵고 복잡했다. 하지만 즐거울 것 같기도 했다. 콜리가 감정을 느낄 수 있었다면 모든 상황이 즐거웠으리라. 삶 자체가 연속되는 퀴즈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콜리야, 네 말이 맞아. 인간은 알다가도 모를, 참 요상한 존재들이지. 나도 그렇게 생각해. 연재네 가족과 같이 살면서 네가 목격한 것 말고도 인간 세상에는 말도 못 하게 많은 모순과 비합리가 가득하단다. 인간 삶의 키워드는 네 표현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라고 생각한 적이 있어. 어떻게 결혼할 상대를 알아보냐고 묻는 동생이 있었는데, 그때 생각난 말이었지. 연인이든 가족이든 친구든 타인을 사랑하는 일뿐 아니라 자신을 사랑하는 일에도 해당하는 말인 것 같아. 힘든 일이 파도처럼 몰려올 때도 있고,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아 괴로운 시기도 있거든? 어떤 경우든 인간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루하루 살아가. 부서진 채로, 불완전한 채로. 그러면서 더 인간다운 인간이 되어가기도 하고. 웃기지? 인간으로 산다는 게.


근데 콜리야, 네가 감정이란 걸 느껴 본 적 없어서 모든 상황이 즐거울 것 같고 재밌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하는 거야. 감정은 신호거든? 너의 진동감지기 같은 거. 다칠 수 있으니 조심하라거나 도움 되는 상대니 다가가라거나, 어떤 행동을 할지 선택하는데 도움을 주는 신호 체계라고 할 수 있지. 그렇다 보니 아무래도 생존 확률을 높이기 위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크게 인지하고 더 오래 기억하는 편향이 있어. 우리가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것을 느끼고 생각하고 기억하는 비율이 7:3 이래. 연구자에 따라서는 9:1까지 보기도 하고. 좋은 감정은 잔잔하고 잠깐인데 불쾌한 감정은 그 반대라는 거지. 유전자 세팅값이 그렇기도 하고 살면서 반복 학습해서 패턴이 더 강화돼서 그런 것도 있어. 아무튼 대체로 많은 인간에게 감정은 괴로운 경험이라는 말이야.

그래도 네 말처럼 생의 즐거움을 누리며 사는 사람들도 있어. 알려진 비법은 단순해. 연재 엄마가 말했잖아, “현재에서 행복을 느껴는 게 유일하게 그리움을 이기는” 거라고. 그럼 다들 왜 그렇게 안 사나 싶지? 단순하다고 꼭 쉽게 실천할 수 있는 건 아니야. 머리로는 아는데 마음으로 알기까지 시간이 좀 걸려서 그런 것 같아. 생존 모드가 원체 강력하니 그런 게 아닐까.

온기 없는 네가 감지하기에도 인간은 진동과 빛으로 이루어진 생명체잖아. 최신 과학자들도 그렇다고 말하거든. 그런데도 우리는, 자유로운 존재인데도 자유를 찾아 헤매는 답답한 개체이기도 해. 3%의 생존 확률이어도 구하러 뛰어들고 80%의 생존확률이었다가 주검으로 가족에게 돌아오기도 하고. 지구 바깥에도 우리처럼 어려운 존재들이 있을까?

아무튼, 넌 실수로 잘못 만들어진 휴머노이드지만 투데이에게도 연재네 가족에게도 너의 존재는 큰 행복이었어, 알지? 역시 인간계에서도 그렇지만 실수나 실패 오작동이 꼭 안 좋은 일은 아닌 것 같아. 야 은혜 봐라, 얼마나 멋있냐. 보경이랑 연재는 또 어떻고. 너도 멋져. 연재 엄마가 왜 너한테 마음을 털어놨는지 알겠다. 나도 이러고 있네.


*

어제, 동두천 중학교 학생에 관한 뉴스를 봤다. 폭염주의보가 내려진 무더운 날씨에 노상에서 물건 파는 할머니를 지나치지 못하고 서성이다, 5만 원짜리 지폐를 바꿔다 3만 원을 할머니께 건넨 남학생. 괜찮다고 손사래 치다 할머니가 주신 콩을 받아 가면서 꾸벅 인사하는 모습이 영상에 담겼다. 질풍노도의 시기에는 저만 보이기 마련인데, 타인의 고통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마음이 예뻤다. 말을 살리려는 은혜와 휴머노이드를 살린 연재도 그랬다.

나라면 어땠을까. 말이고 휴머노이드고 인간 이웃이고 살리고자 하는 마음을 냈을까, 행동으로 옮겼을까? 콜리가 표정 없는 얼굴로 묻던 말이 떠올랐다.

당신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요?


'나의 시간은 어떻게 흘러가고 있나...'

살아 있다고 느끼는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살아 있다는 건 호흡을 한다는 건데, 호흡은 진동으로 느낄 수 있어요. 그 진동이 큰 순간이 행복한 순간이에요.


'호흡지간에 행복을 느끼고 있나, 아니면 놓치고 있나.'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천천히'


지수 서진 복희 민주 보경 은혜 연재 투데이 콜리. 소설에 나오는 등장인물 이름을 이렇게 선명하게 기억하기는 처음이다. 360쪽짜리 소설인데 260쪽을 넘어가는 와중에도 이후 전개에 대해 감도 오지 않았다. ‘얘들이 진짜 어쩌려고 이러나, 그 비책이라는 게 진짜 비책이면 좋겠는데... 딱히 방법이 없지 않나...’ 동동거리는 마음으로 읽은 나머지 페이지는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다. 이렇게 완벽한 결말이 또 있을까 싶을 만큼.


나온지 5년이나 된 책이 도서관마다 죄다 대출 중이고 예약 대기도 길었다. 앞으로 아무 작품이고 천선란 작가라면 믿고 집어들 것 같다. 좋은 소설을 덮을 때마다 내 입에서는 이 말이 꼭 나온다. “소설가들은 진짜 이상한 사람들이야.” 진짜 이상한 소설가가 쓴 이상하게 좋은 이야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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