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지, <여름 외투>, 문학동네
여름 외투
낙타의 등 모양이라는 산에서
도시의 측면을 내려다보며
좁고 높은 건물의 옥상을,
올라가는 계단이 보이지 않는 옥상을
옥상이 아니라 하나의 뚜껑처럼 보일 때까지
응시했다
한 마을 하늘을 혼자 쓰는 새
광화문 전광판이 자그맣게 보이는 풍경이
게임보다 더 게임 같아
네온이 다시 유행이라고 하는데
형광이라는 말이 어딘가 촌스러운가 하면
네온사인이란 말은 더 오래된 말 같고
형광이란 단어도 시의 제목에 놓인다면 멋스럽지 않을까
뭘 쓸지 골몰하느라
단어들의 자리를 생각한 건 환승을 하면서였다
나를 놀이동산에 데려가준 사람들에 대해 쓸까
크리스마스카드에 절교하고 싶었다고 쓴 사람에 대해
그 사람이 나중에 같은 방식으로 상처 준 것에 대해
코감기 약을 먹고 꾼
잠수함 꿈에 대해
너무 늦게 걷는 것도 몸에 안 좋다던데
혼자서는 더 늦게 걷는다
관객석으로 만들어진 데크에 앉아 운동화를 벗었을 때
바람에 꿀이 든 것처럼 쾌적한 날씨라는 것을 깨닫고
당황해서 계단에 등을 기댔다
'실외기'의 이름을 풀어본다
바깥 기계
대체 어떻게 이렇게 섭섭하게 이름을 지을 수 있는지,
이처럼 특별하고 단정한 이름이 또 있을까, 싶기도 하고
갑자기 퇴직하고
갑자기 휴일을 보내면서
내가 쓰고 싶은 건
여름 외투
겨울보다 추운 실내에서
어깨를 감싸주는
그런
시
시인들은 참 어여쁜 마음을 가진 사람들 같다. 여름 외투 같은 시를 쓰고 싶어서, 그런 시를 쓰려고 온종일 골몰하는 시인이 그려진다. 여기저기 도시를 걸으며 보이는 모든 것과 떠오른 것들도 빠짐없이 머릿속에서 이리저리 둥글려본다. 제목을 찾고 소재를 찾고 시상을 찾아 하루를 다 보내는 사람. '시인들은 이런 사람들이구나' 하고 생각하게 한 시이다. 그렇게 온통 시 생각으로 가득한 마음으로 온 하루를 다 보내고 쓴 거라서 다른 사람 마음에까지 가 닿을 수 있는 힘이 담기나 보다. 사람들의 시린 어깨를 감싸주려고 그 시간과 그 정성을 들이는 사람. 정작 자기들 마음은 잘 덮어주고 지내는지...
아래의 시에서도 어여쁜 마음을 보았다. 처음 읽을 땐, "ㅋㅋㅋㅋㅋㅋ 너무 귀엽네" 했다. '그럼 대체 되는건 뭔데요! 이것보다 더 평범한 거 뭐요! 징하시네 정말 뭘 준비하신 거죠?!' 같이 따져 주고 싶었다. 이참에 사리사욕을 채워보자 하고 와다다다 말한 줄 알았는데, 다시 읽어보니 시인이 간직해 온 소박한 바람과 힘들었던 마음을 내비친 듯 해 찡했다. 소원을 말하랬더니 상처 말고 사랑을 돌려주고 싶다고. 그 마음들이 살아가기에 사는 일이 적잖이 까슬하겠다 싶다.
제가 준비한 건
램프에 살고 피부가 파란색이고 소원을 들어주는 이로부터 카톡이 왔다 그건 어렵겠습니다 제가 준비해둔 건 평범한 거에요 공무원이 정말 프사의 그림처럼 파란 피부의 요정은 아니겠지만 평범한 것도 좋겠어요 학창시절의 저에게 작은 장학금을 주세요 뭘 잘해서가 아니라 그냥 당첨 같은거 되어서 그건 어렵겠습니다 제가 준비한 건 평범한 거예요 벽지를 바꿔주는 건요 그건 어렵겠습니다 6월까지 지인들이 밥 먹자고 안 했으면 좋겠어요 발등이 아직 다 낫지 않았거든요 제 게임에서 플래티넘 받지 못한 두 개의 라운드를 깨주실 수 있는지 궁금합니다 제 시집을 사주세요! 안부 인사 대신 전해주기 결혼식 대신 가주기
매일 아침 사과 먹고 싶어요
받은 만큼 돌려주기? 상처 말고 사랑요 그럼 되는 게 대체 뭔데요 게다가 오늘은
제 생일이라구요 제가 준비한 건 평범한 거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