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내는 이: 페르난두 페소아

<시는 내가 홀로 있는 방식>, 페르난두 페소아, 김한민 옮김, 민음사

by 이파리


어떤 이는 서양 문학사상 가장 위대한 작가로 셰익스피어 괴테 등과 더불어 페르난두 페소아를 꼽는다고 한다. 그런 작가가 일생동안 무역 회사의 해외 통신원으로 일 했다고 하고, 많은 글을 발표했지만 생전에 출간한 책은 포르투칼어 시집 한 권뿐이라는 소개 글이 묘했다. 47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후 사후에 엄청난 양의 글이 발견되어 지금도 출판이 계속되고 있다는 대목에서 왠지 모를 마음의 동요가 느껴졌다. 이미 모습을 드러낸 (그리고 사망한) 위대한 작가의 작품을 퍼올리는 일이 현재진행형이라니.


흙으로 빚은 병사와 말 모형이 줄 맞춰 선, 사진으로만 봤던 장면이 떠올랐다. 중국 운난성에 있다는, 아직도 발굴 중이라는 진시황릉 병마용 갱. 새로운 페소아를 발견하고 있는 사람들은 어떤 심정일까. 진흙에 숨어있던 진주를 처음 보는 기쁨에 더해 이 아름다움을 세상에 보일 생각에 설레고 충만한 기분이려나. 비장해질지도 모르겠다. 잘 전달해야 한다는 사명감이 생겼을지도.


차례를 보니 1부 2부 3부에 각각 다른 사람의 이름이 쓰여있다. '어? 페르난두 페소아의 시집이 아니고 시인에게 영향받은 시인들의 작품집인 건가?' 그러고 보니 교보문고에서 시인을 검색했을 때, "페소아와 페소아들"이라는 책 제목을 봤다. ‘페소아들’이라는 말이 페소아로부터 영향받은 시인들을 뜻하겠거니 생각했다. TV 예능 무한도전을 보고 자란 열혈 시청자를 일컬어'무도키즈'라고 하는 것처럼. 페소아의 시를 읽고 싶었던 건데 잘못 산건가 싶어 맨 뒤에 옮긴이가 쓴 '작품에 대하여'를 훑어보았다.


이명(異名). "상상 속 문학 캐릭터들의 이름을 가리키는 말", "이들은 이름 외에도 고유한 문체, 전기, 특징, 별자리 등을 갖춘 구체화된 존재"라는 설명이 있다. 더 읽지 않고 책을 덮었다. 다른 이의 이름으로 쓰였지만 시인의 창작물이라는 점만 아는 상태로 시를 읽고 싶었다. 나 나름대로 시를 경험하고 난 후에 작품 해설을 읽어야겠다는 마음이었다.




(.....)

나는 마치 금잔화를 믿듯 세상을 믿는다,

왜냐하면 그걸 보니까. 그것에 대해 생각하지는 않지만

왜냐하면 생각하는 것은 이해하지 않는 것이니......

세상은 생각하라고 만들어진 게 아니라

(생각한다는 건 눈이 병든 것)

우리가 보라고 있고, 동의하라고 있는 것.


내겐 철학이 없다, 감각만 있을 뿐......

내가 자연에 대해 얘기한다면 그건, 그게 뭔지 알아서가

아니라,

그걸 사랑해서, 그래서 사랑하는 것,

왜냐하면 사랑을 하는 이는 절대 자기가 뭘 사랑하는지

모르고

왜 사랑하는지,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법이니까......

사랑한다는 것은 순진함이요,

모든 순진함은 생각하지 않는 것......




또 다른 시.




내 마을에서는 우주에서 볼 수 있는 만큼의 땅이 보인다......

그래서 내 마을은 다른 어떤 땅보다 그렇게 크다,

왜냐하면 나의 크기는 내 키가 아니라

내가 보는 만큼의 크기니까......




또 다른 시.




나는 가축 떼의 지킴이.

가축 떼는 내 생각들

내 생각들은 모두 감각들.

나는 생각한다 두 눈과 귀로

두 손과 발로

코와 입으로.




완전히 이해했다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공명하는 느낌이었다.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고, 맑은 자연에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점이 좋았나,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잘 숙성시켰다가 써보면 나의 이해를 더 잘 알 수 있을 거다. 아직은 말이 둥글려지지 않는다. 감상은 더 발효시킨 후에 써야겠다. 생전에 영어와 프랑스어 포루투칼어로 다양한 산문, 시, 소설, 희곡, 평론을 썼다고 하니 반가운 마음이다. 게다가 지금도 발표되고 있으면 앞으로도 누릴거리가 많겠다 싶어 즐겁다.


2년 전 어느 시인으로부터 받은 강의 자료는 정말로 편지가 맞았다. 페소아를 소개하는 주선의 편지. 그리고 페소아의 시집도 역시 편지였다. 우치다 선생의 표현처럼 마치 수신인이 나인 듯한, 지극히 사적인 서신을 받은 느낌이었다.


천천히 여러 번, 거듭 읽고 있다. 뭐가 좋은지도 모른 채.


오래도록 그렇게 계속 읽어내고 싶은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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